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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먹는 밤-40화 (41/70)

40화

* * *

돈을 내놓으라니. 그동안 서하를 키운 값을 내놓으라는 뻔뻔하다 못해서 독한 설영의 모습에 세헌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세헌은 잠시 고민했다. 설영이 진성 건설에 있을 때 금품을 제공한 것도 모자라서 업체들에게 돈을 받았다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는 그였다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배임과 횡령 건으로 설영을 고소해서 죗값을 받게 하고 싶은 그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서하 때문이었다.

혹시나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래도 계모도 엄마라며 자신을 원망하게 될까 봐.

“얼마를 원합니까.”

그의 물음에 설영이 움찔했다. 욱하는 마음에 던져본 말인데 세헌은 진심으로 답하고 있었으니까. 주춤거리며 생각을 하던 설영이 입을 뗐다.

“10억, 아니 20억은 줘야죠. 요즘 서울 아파트들은 10억 주고도 못 산다는데.”

고작 20억이라니. 돈 따위는 얼마가 들든 상관이 없었다. 그저 서하가 다시는 상처받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소소한 금액에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알겠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답하는 말에 설영이 멈칫했다.

“현금으로 줘야 해요!”

“알겠습니다. 다만.”

그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치켜뜨며 말을 이었다.

“다시는 진서하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얼쩡거리는 것도 용납 못 합니다.”

“하.”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설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볼 생각도 없으니 돈이나 잘 챙겨주세요!”

앙칼지게 목소리를 높인 그녀가 돌아섰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대표실 문을 바라보던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젖혔다.

“고작 20억으로 네 행복을 살 수 있었으면 진작에 샀을 텐데.”

그동안 그녀가 고통받은 걸 떠올리며 그가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세헌!”

닫혔던 대표실의 문이 열리며 도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아줌마가 뭐래? 나한테 현금 준비되면 연락하라고 하던데?”

도윤의 물음에 그가 덤덤하게 답했다.

“돈 주기로 했어.”

“…뭐? 돈을 주기로 했다고?!”

“진서하 키운 값.”

“설마 저 여자가 진서하 씨 키운 값을 달라고 했어?!”

세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이 경악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최악이네, 정말. 그렇다고 돈을 주면 어떡하냐! 너 저 여자, 증거 다 가지고 있잖아. 확 감옥에 넣어버려.”

“진서하가 싫어하면 어떡하라고.”

“그래도 그렇지! 얼마 주기로 했는데?”

“20억.”

입을 벌린 채 돌처럼 굳어버린 도윤이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얼마라고?”

“들었잖아. 준비해.”

“미쳤냐!!”

도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나한테 20억을 줘! 평생 네 발닦개 노릇할 테니까!”

그가 물끄러미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돈 필요해?”

“뭐…?”

“필요하면 말해. 줄 테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답답한 듯 도윤이 중얼거렸다.

“그런 여자한테 20억을 주는 게 문제라는 거지!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렇지!”

“상관없어. 진서하만 행복하면 돼.”

“하… 아주 대단한 사랑꾼 나셨어.”

“배 비서.”

깊게 한숨을 내쉰 도윤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네 마음 이해해. 서하 씨가 그동안 많이 시달렸으니까 더는 그런 꼴 보기 싫겠지. 그런데…. 야, 어디 가?!”

“반차.”

“…뭐?”

“먼저 퇴근할 테니 알아서 퇴근해.”

그 말을 끝으로 사라지는 세헌의 뒷모습을 도윤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그 시각, 나갈 준비를 마친 서하가 현관을 나서려던 때, 가방에서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세헌 씨?”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벌써 나온 건 아니지.

“아, 네. 지금 나가려던 참이에요.”

-내려와.

“응? 회사 아니에요?”

-진서하랑 데이트하려고 반차 냈는데.

놀란 그녀가 말했다.

“아니, 데이트하려고 회사를 쉬는 게 어딨어요!”

-여기 있잖아. 어서 내려와.

“잠깐…!”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로비를 나서자마자 정문 앞에 세워진 그의 차를 보며 서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를 발견한 세헌이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

“정말 반차 쓴 거예요?”

“응. 그러니까 타.”

조수석에 탄 서하를 보고는 그가 운전석으로 향했다. 핸들을 돌리며 그가 물었다.

“요리 배우는 건 어디서 배우는 거지?”

“아, 집 앞에 가정식 배우는 곳이 있더라고요. 쉐프님이 세 분이라서 한식, 일식, 양식 다 배울 수 있대요.”

밝게 이야기하는 그녀를 보며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네?”

“갑자기 요리는 왜 배우고 싶어진 거야.”

서하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세헌 씨한테 요리해주고 싶어서요.”

제 일이라면 뭐든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그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할 줄 아는 게 없는 서하가 한참을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바로 요리였다. 세헌의 생일날, 고작 밀키트로 만든 요리에 기뻐하던 그를 떠올리며 서하는 요리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밀키트가 아니라 더 맛있는 요리를 세헌 씨한테 만들어주고 싶어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좋네.”

“그래요?”

“진서하.”

“네?”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워.”

매력적으로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다 해.”

덤덤하게 내뱉는 그 말에 서하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마치 단 한 번도 하고 싶었던 것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은 세헌의 손은 따스했다. 서하가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 * *

설영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경호는 집을 구하러 나가고 없었다. 경호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설영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이제 자기가 누군지 알려졌다 이거지? 하, 어이가 없어서.”

세헌과 나눈 대화들을 곱씹으며 설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20억은 너무 적게 달라고 했나? 명색이 TA 그룹 회장 아들인데. 쯧, 30억 정도는 달라고 할걸.”

금액을 더 높게 부를 걸 그랬다고 후회하던 설영이 문에서 나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나 다미.”

문을 열자마자 설영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왔어? 피곤한데 더 쉬지.”

“괜찮아. 그런데 엄마 어디 다녀왔어? 아까 점심 먹으려니까 없던데.”

“그게, 앉아보렴.”

“왜? 무슨 일인데?”

다미의 손을 이끌고 침대에 걸터앉은 설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우 대표 만나러 갔다왔어.”

“우세헌? 우세헌 만나고 왔다고?!”

“그래.”

설영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서하랑 같이 지내는 거 맞다더라.”

“같이 지낸다고?! 그래서! 엄마가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그 기집애 내놓으라고 했지.”

다미가 사나워진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랬더니 우세헌이 뭐래?”

“싫다고 하더라고. 아주 대놓고 날 무시하더라니까?”

세헌의 모습을 떠올린 건지 설영이 치가 떨린다는 듯 몸을 작게 떨었다.

“나보고 문전박대 하고 싶은데 서하 때문에 참는다고 해서…….”

“우세헌이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래. 그래서 내가 그럴 거면 돈으로 달라고 했어. 진서하 키운 값.”

“엄마!!”

다미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자 설영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왜! 20억 달라고 해서 현금으로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았는데!”

“고작 20억이 중요해?! 우세헌 앞으로 TA 그룹 차기 회장 될 건데!”

설영이 멈칫했다. TA 그룹의 차기 회장이라니. 차마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그녀였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지?”

TA 그룹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면 당연히 경영 승계를 받을 터였다. 다미가 속 터진다는 듯 말했다.

“20억이면 우세헌한테는 껌값이라고! 그리고 난 진서하랑 우세헌이 같이 있는 꼴, 절대 못 봐! 그년한테 우세헌 못 준다고!”

“다미야…….”

“엄마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가지고 일을 이렇게 만든거야?!”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다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가서 돈 안 받겠다고 하고 진서하, 그 기집애 데리고 와. 엄마.”

“다미야.”

“빨리!”

닦달하듯 말하는 다미를 바라보던 설영의 머리에 순간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잠깐만. 잠깐, 다미야.”

“왜, 또!”

“잠깐만 있어 봐. 우 대표한테 서하 만나고 싶다고 해도 꼭꼭 숨겨두면 못 만나는 거잖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설영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스쳤다.

“우리가 서하를 찾으면 되잖니.”

“…뭐? 그 기집애를 찾는다고?”

“그래. 아마 우 대표 집에 있겠지? 그럼 우 대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서하 나오면 잡으면 되잖니? 아마 서하는 우리 말 거역하기 힘들 테니까.”

서하가 애정 결핍 때문에 가족에게 맹목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설영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다시 강원도로 보내버리든지. 서하를 우 대표랑 떨어트리면 돼.”

설영의 말에 분노로 이글거리던 다미의 눈동자도 차츰 가라앉았다.

“엄마,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서 왜 그랬어? 좋아. 당장 우세헌 집 어딘지 알아보자.”

“찾는 거야 쉽지. 엄마 이런거 잘하는 거 모르니?”

설영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돈을 주고받을 때 이용했던 흥신소 번호를 찾아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미,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우 대표 마음이나 돌릴 준비 하렴.”

“걱정 마, 엄마. 이번엔 제대로 꼬실 거니까.”

두 여자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아주 께름칙한 웃음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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