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39화 (40/70)

39화

* * *

어스름한 새벽녘, 자신의 품에서 잠든 서하를 바라보는 세헌의 시선이 뜨거웠다.

자는 모습까지 이렇게 사랑스러울 줄이야. 그 사랑스러움에 그녀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한 세헌이었다.

“자는 것도 예쁘지.”

세헌의 목소리에 서하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

세헌은 그녀가 잠들어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잔뜩 피가 몰린 자신의 하복부를 보며 그녀가 발정난 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으니까.

그의 마음은 하나도 모른 채, 순진한 얼굴로 잠이든 그녀를 보며 세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한참을 잠든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그녀가 깨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뜨거워진 몸을 빨리 식혀야 했다.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는 하복부의 열까지도.

샤워기를 틀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지더니 그의 몸 굴곡을 따라 흘러내렸다. 뜨거워진 몸이 천천히 식어가는 것을 느끼자 세헌이 그제야 숨을 토해냈다.

“짐승이 따로 없네.”

터져나오는 헛웃음을 참아가며 샤워를 마친 그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도 서하는 잠이 들어있었다.

그가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서야 잠에서 깬 서하가 목소리를 냈다.

“으응… 세헌 씨?”

그 목소리에 세헌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를 향해 다정한 눈빛을 쏟아냈다.

“더 자.”

“아니에요. 이제 일어나야죠. 아, 출근하는 거예요?”

“응.”

“오늘도 일찍 올 거예요?”

세헌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답했다.

“그래.”

“알겠어요. 아, 오늘은 나가서 산책도 하고 장도 볼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수줍은 듯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그녀가 말했다.

“저 요리 배워도 돼요?”

“요리?”

“네.”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서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냥…! 저번에 한 요리, 세헌 씨가 맛있게 먹어주니까 또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완성된 요리 보는 것도 은근 뿌듯하기도 하고 지금 배워두면 나중에 편할 것 같아서…….”

“나중에 왜 편한데.”

“결혼하면 요리는 직접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야 많이 배워두면 편하잖아요.”

서하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그의 눈동자가 작게 진동했다.

“누구랑 결혼해서 요리하려고.”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움직이던 그녀의 입술이 멈칫했다. 자신도 모르게 툭 나온 단어였다. 아직 연인으로 얼마 되지도 않은 세헌을 보고 당연히 그와 결혼할 것이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지금 좋다고 한들 미래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서하가 애꿎은 질문을 하는 세헌을 장난스럽게 흘기며 말했다.

“몰라요. 대답 안 할 거예요.”

“왜 대답을 안 해.”

그가 고개를 숙이며 서하의 얼굴을 반쯤 가린 이불을 끌어 내렸다.

“우세헌이랑 할 거라고 말해야지.”

“아…….”

벌어진 그녀의 입술을 살짝 베어 물며 세헌이 말했다.

“겨우 잠재웠는데 말이야.”

“…응? 뭘 잠재워요?”

“말해주면 나 회사 지각할 텐데.”

야릇한 어감에 서하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서, 다녀와요!”

“그래.”

아쉽다는 듯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 때는 도윤이 불러줄 테니까 도윤이랑 같이 나가.”

“괜찮아요. 혼자 가도.”

“내가 불안해서 그래.”

“과보호예요, 그거.”

그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지갑에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마음대로 써.”

검은색의 네모반듯한 카드를 협탁 위에 내려놓는 그를 향해 서하가 말했다.

“괜찮아요, 나도 돈 있어요…!”

“100만 원 남은 건 진작에 다 쓴 거 같은데.”

“…아니거든요.”

세헌이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나 돈 많아.”

“…알아요.”

“그러니까 펑펑 써줘. 혼자는 죽을 때까지 못 쓰니까.”

혼자는 죽을 때까지 못 쓴다니.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의 주식 잔고와 통장 잔고 이자는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다 못 쓰고 죽으면 아깝잖아.”

반문할 수 없던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알겠어요.”

* * *

TA 건설 대표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업무 메일을 읽고 있던 세헌의 입에서 툭 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귀엽기도 하지.”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들릴 줄이야. 게다가 자신 때문에 또 만들어주고 싶어서 요리를 배운다니. 그의 입에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혼은 생각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먼 미래라고 해도 그녀가 결혼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세헌은 감사했다.

평소라면 부장들의 실수에 날카롭게 질책했을 그였지만 오늘은 그저 말 한마디 하고는 넘어갔다. 그만큼 세헌에게 오늘 서하가 한 말은 위력이 강했다.

“뭐든 용서해주고 싶은 날이지.”

입가에 미소를 띤 그가 다시금 일에 집중하려던 순간, 대표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당황함과 분노가 교차하는 얼굴로 대표실을 들어온 도윤을 이상한 듯 바라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데 표정이 그러지.”

“와…. 진짜.”

“왜.”

도윤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밖에 누가 왔는지 알아?”

“누구.”

“홍설영.”

세헌의 눈가가 일순간 좁아졌다.

“홍설영?”

“그 진서하 씨 계모 말이야. 진 대표 부인.”

“말레이시아에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한국에 왔나 본데?! 서하 씨 관련해서 할 말이 있대.”

설영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서하가 걱정돼서가 아님을 알고 있는 세헌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뭐든 용서해주고 싶은 날이긴 한데, 용서 안 되는 게 있네.”

작게 중얼거리던 그가 도윤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궁금했다. 과연 설영이 뭐라고 말을 해댈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접대용 소파로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듣기 싫은 목소리가 귓가를 긁어내렸다.

“어머! 우 대표님.”

세헌을 향해 매번 냉정하고 차갑게 말을 뱉어냈던 설영이었지만 오늘은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바쁘실 텐데… 제가 실례한 건 아니죠? 호호.”

가식적이게 눈웃음을 치며 말하는 설영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앉으시죠.”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딱딱하게 말을 뱉어내는 세헌을 보며 설영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지만 이내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친절히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설영이 소파에 앉자마자 짙은 향수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그 냄새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세헌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남편한테 들었어요. 우 대표님한테 신세를 진 게 많다고.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인사드리러 왔죠.”

“진 대표님께서 제게 신세를 진 건 없는데 말이죠.”

“어머, 그럼 우리 우 대표님이 신세를 진 건가? 호호.”

우리 우 대표님이라니. 그의 하관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용건만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주 바빠서요.”

딱 잘라 선을 긋는 세헌을 바라보는 설영의 입가가 불편함에 움찔거렸다.

“우 대표님이 성격이 급하시네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죠.”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니. 결국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던 설영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하, 우 대표님.”

대꾸 없이 그가 설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서하랑 같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설영의 입에서 나온 ‘우리 서하’라는 말에 그는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아무리 얼굴이 철판을 깔았어도 이 정도로 뻔뻔할 줄이야. 그녀에게 한 짓은 생각지도 못하는 건지. ‘우리 우 대표님’보다 더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그렇습니다만.”

덤덤하게 말하는 그를 향해 설영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습니다만이라뇨?! 우리 서하랑 같이 있다는데! 제가 엄마로서 안 놀랐을 것 같나요?”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죠!”

설영의 반응에 결국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나왔다.

“매몰차게 버리고 가신 줄 알았는데 놀라다니.”

조소를 띤 얼굴로 세헌이 말을 이었다.

“올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긴 말이군요.”

“…무, 무슨!”

“홍설영 씨.”

싸늘한 시선이 설영을 향했다.

“용건만 말하세요.”

그 말에 입술을 비죽거리던 설영이 입을 뗐다.

“서하 돌려주세요.”

“무슨 권리로?”

“무슨 권리라니! 내 딸이에요!”

“딸? 홍설영 씨 딸은 하나로 알고 있는데. 진다미 씨.”

설영의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어머, 우리 다미를 아나 보죠?”

“통 말귀를 못 알아먹어서 나중에 신고할까 하고 외워둔 겁니다.”

설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헌이 말을 이었다.

“문전박대 하려다가 진서하 씨 생각해서 이 정도로 참은 겁니다. 더 용건 없으면 돌아가 주시죠.”

거만하게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세헌을 보며 설영이 이를 악물었다.

“하, 정말…. 아무리 TA 그룹 회장님 아들이라지만.”

드디어 터져 나오는 설영의 속내에 그가 입술을 비스듬히 휘었다.

“서하, 안 돌려줄 거면.”

설영이 독기를 품은 눈으로 세헌을 노려보며 말했다.

“돈 내놔요. 그동안 서하 키운 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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