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도민을 만나고 난 뒤부터 서하는 간헐적으로 두통에 시달렸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두통이 온다는 그녀의 말에 세헌은 병원에 가길 권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서하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세헌은 그녀를 진료했던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다면 기억이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겁니까?”
그의 물음에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꺼번에 기억이 돌아오는 겁니까.”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천천히 하나씩 기억이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한꺼번에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억이 다 돌아온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일부분만 돌아오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혹시나 두통이 계속된다면 병원에 오셔서 검사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뇌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의사와 통화를 마친 그가 깊게 숨을 내뱉었다.
태연한 척은 했지만, 그녀가 기억을 모두 되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세헌은 무척이나 불안해하고 있었다. 과거의 서하는 지금과 너무 달랐기에 더욱 불안했다.
“가족에 집착했지.”
설영과 다미가 구박을 해도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참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녀의 기억이 돌아온다면, 예전의 성격까지 모두 돌아온다면. 그래서 자신을 밀어내고 가족이 원했던 정략결혼을 한다고 하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마음이 복잡해진 세헌이 미간을 좁혔다.
“그럴 일은 없어.”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때마침 대표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문 쪽으로 움직였다.
“들어와.”
슬그머니 열린 문틈 사이로 도윤이 몸을 들이밀고는 재빠르게 문을 닫았다.
“무슨 일이야.”
“그, 수도 투자증권에 양도민 씨가 널 찾아왔는데?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그의 눈치를 보며 도윤이 말을 이었다.
“양도민이면 서하 씨, 정략결혼…. 상대 아니야?”
“맞아.”
“근데 왜 찾아왔대? 설마…. 서하 씨 내놓으라고 하는 거 아냐?!”
도윤의 물음을 무시한 채 세헌이 말했다.
“밖에 있지.”
“응,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냥 돌려보낼까?!”
“아니.”
세헌의 입가가 비스듬히 휘었다.
“들어오라고 해.”
들어오게 하라는 말에 멈칫하던 도윤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향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못 했는데 말이지.”
그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빳빳한 정장을 툭툭 털어냈다.
“이번 기회에 알려줘야겠네.”
서하를 절대 줄 수 없다는 것을.
대표실 중앙에 놓인 접대용 소파로 향한 그가 자리에 앉았다. 긴 다리를 꼰 채 문 쪽을 바라보던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대표실로 들어서던 도민이 그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는데 대화를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도민을 보며 세헌이 입을 뗐다.
“별말씀을요. 앉으시죠.”
그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대표실 중앙에 놓인 접대용 소파를 가리켰다. 도민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바로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민의 고개가 세헌을 향했다.
“진서하 씨, 어떻게 된 겁니까?”
세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어떻게 된 거냐니. 제대로 말씀을 주셔야 제가 답을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누구 하나 성급히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로를 날카롭게 응시하며 빈틈이 있나 확인했다.
세헌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것을 안 도민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진성 건설 인수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운영 문제로 말이 많았던 진성 건설을 인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서하 때문이냐고 묻고 싶은 겁니까?”
그 말에 멈칫하는 도민을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우선 답부터 해드리죠. 맞습니다. 진서하 때문입니다.”
세헌의 직설적이면서도 솔직한 대답에 놀란 것도 잠시 도민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견례를 앞두고 갑자기 비리가 터져서 운영과 자금난을 겪은 진성 건설을 리스크를 안으면서까지 인수했다. 게다가 인수한 이유가 서하 때문이라고 한다.
도민이 차갑게 식은 얼굴로 세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갑자기 진성 건설 비리가 터진 것은 우연입니까?”
가만히 도민을 바라보던 세헌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지금 그 말씀은 제가 일부러 진성 건설을 인수하기 위해 비리를 터트렸다고 들리는데.”
“시기가 너무 맞아떨어져서요.”
“시기가 맞아떨어진다고 다 맞는 건 아니죠.”
더욱더 짙어진 긴장감이 대표실 안을 팽팽하게 죄어왔다. 작게 숨을 들이마신 도민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진성 건설 비리랑은 우세헌 씨와 관련 없는 걸로 생각하죠.”
의심스러웠지만 심증만 있었기에 도민은 화제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도민이 돌린 화제 또한 세헌에게는 거슬릴 만한 내용이었다.
“서하 씨랑은 예전부터 아시던 사이였습니까?”
도민의 물음에 세헌이 딱딱하게 답했다.
“제가 그걸 왜 말씀드려야 하죠.”
“전, 진서하 씨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습니다. 충분히 알 권리가…!”
“집안에서 강제로 정한 정략결혼 상대에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는데.”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세헌 말대로 서로 사랑해서가 아닌 집안에서 찾은 상대였기에.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도민이 아니었다.
입술을 꾹 물며 감정을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아내던 도민이 말했다.
“서하 씨와 다시 한번 만나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세헌이 느릿하게 눈을 치켜뜨며 답했다.
“예전 정략결혼 상대였던 남자가 내 여자와 만나고 싶다고 하는데, 어느 정신 나간 남자가 좋다고 받아드리겠습니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와 결혼하겠다고 한 여자입니다. 고작 한 달 만에 애인이 생겼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세헌의 신경을 거슬렸다.
“양도민 씨.”
“네.”
“모르나 본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가 도민을 향해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이 진서하를 알기 전부터 만나던 사이였습니다.”
세헌이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뜻을 눈치챈 도민도 하릴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는 보겠습니다. 만날 의향이 있는지.”
“꼭 물어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대표실 밖으로 나가는 도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헌이 고개를 돌렸다.
“젠장.”
도민이 한 말을 서하에게 전해야 하는 건지 세헌은 고민하고 있었다. 이대로 말하지 않고 넘겨도 괜찮겠다 싶었지만, 그녀를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민의 말을 전했을 때, 혹시나 서하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어쩔까 무서웠다. 과연 자신이 그녀가 도민을 만나게끔 해줄 수 있을까.
목구멍까지 차오른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세헌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타나질 않길 바라며.
* *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세헌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웠다.
“세헌 씨, 어디 아파요?”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순순히 제 품에 안기는 그녀를 끌어안은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진서하.”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응.”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녀를 걱정스럽게 만들기는 싫었기에 세헌이 천천히 입을 뗐다.
“두 가지 일이 있었는데.”
“두 가지나…. 요?”
“응.”
서하가 손을 올려 그의 등을 토닥였다. 일정하게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을 조용히 느끼던 세헌이 말했다.
“네 담당 주치의와 통화를 했었어.”
“저 병원에 있을 때 봐주신 선생님이요?”
“그래.”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간헐적으로 두통이 온다고 말씀드렸더니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셨어. 부분적으로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다 돌아올 수도 있다고. 물론, 안 돌아올 수도 있지.”
그녀의 기억이 안 돌아오길 바라는 세헌이었지만.
“그렇구나…….”
“혹시 모르니까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대. 뇌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서하가 그를 보며 물었다.
“하나는 끝났고, 또 다른 일은 무슨 일이에요?”
눈치가 빠른 서하였다. 묻자마자 굳어지는 세헌의 몸을 토닥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말해봐요.”
“양도민이 찾아왔었어.”
“양도민?”
서하의 물음에 그가 숨을 들이마시며 답했다.
“네 정략결혼 상대였던 남자.”
그 말에 서하가 짧게 “아.” 소리를 냈다.
“너를 만나고 싶대.”
“…그래서 세헌 씨는 뭐라고 답했어요?”
서하를 안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 답했을 거 같은데.”
“안 된다고 했어야죠.”
작게 실소를 터트린 그가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네 생각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된다고 했어요?!”
“아니. 물어만 본다고 했어.”
서하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만약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안 그럴 거 아니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서하를 껴안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는 것은 그만큼 세헌이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그의 진심을 아는 듯 서하가 목소리를 냈다.
“맞아요. 안 만날 건데 그래도 그럴 땐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녀가 세헌과 시선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내 여자는 절대 못 만난다고.”
긴장으로 굳어졌던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이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세헌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