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 * *
“저거, 맛있어 보여요.”
서하가 가리킨 곳은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새하얀 소프트콘 위에 알록달록한 토핑들이 얹어져 있는 그림을 보며 그녀가 세헌의 팔을 이끌었다.
“세헌 씨는 어떤 거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하나에 아이같이 행복해하는 서하를 보며 그는 차마 단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아무거나 상관없어.”
“응? 그래도 좋아하는 맛이 있을 거 아니에요.”
“네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
“음… 그렇다면…….”
토핑들 앞에서 고민하던 그녀가 결심한 듯 손가락으로 진열장을 가리켰다.
“솔티드 캐러멜이랑 쿠키…!”
보기만 해도 입 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달아지는 조합이었지만 세헌은 그녀가 좋다면 상관없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주문하는 그녀를 바라보던 세헌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누군가 서하의 어깨를 잡았기 때문에.
“진서하!”
도민이 이름을 부르며 서하의 어깨를 잡자 세헌이 단숨에 그의 손을 떼어버렸다. 그녀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세헌이 도민을 사납게 노려보며 물었다.
“누구시죠.”
“…그쪽이야말로 누군데 서하 씨랑 같이 있는 거죠?”
그가 딱딱하게 말을 뱉어냈다.
“애인인데.”
“… 뭐라고요?”
“애인이라고.”
그대로 굳어진 채 아무 말도 못 하던 도민이 고개를 돌렸다.
“서하 씨,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도민이 서하를 향해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두 눈을 깜빡인 채 얼어붙어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 서하 씨 애인 맞아요?”
재촉하는 듯한 도민의 말에 서하가 주춤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도민을 향해 서하가 입을 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그쪽이 누군지 기억이 안 나서…. 혹시, 절 아시나요?”
기억이 안 난다니. 게다가 자신을 아냐고 묻는 서하를 보자 도민의 표정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서하가 대꾸한 것이 아니었다. 세헌이 시선을 내려서는 충격받은 얼굴을 한 도민을 보며 말했다.
“기억을 못 하는 것뿐이죠.”
“기억을 못 하다니! 분명 서하 씨는 저와 결혼을…!”
세헌이 도민을 향해 바짝 다가서더니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수도 투자증권 손자인가 보네.”
도민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며 세헌을 바라보았다.
“그거 벌써 없었던 일로 된 거 아닌가.”
“무슨 소리입니까?”
“새로운 약혼녀를 찾아 만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서하의 정략결혼 상대였기에 도민 관련 소식을 예의주시했던 세헌이었다. 도민이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그건…!”
“이만 방해 말고 가줬으면 좋겠는데. 우리 서하가 놀란 것 같아서 말이지.”
그 말에 도민의 시선이 서하에게로 향했다. 잔뜩 움츠린 그녀를 보며 도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하 씨…….”
놀란 듯한 얼굴로 세헌의 뒤에 숨는 서하를 보며 도민이 입술에 꾹 힘을 주었다. 도민이 무슨 상황인 건지 파악을 하기도 전에 세헌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선 세헌이 서하를 향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잡은 그녀가 도민을 향해 묵례하고는 돌아섰다.
“서하…….”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민이 이를 악물었다. 차마 서하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도 못했다. 자신을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를 떠올리며 도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게 무슨 경우야.”
애인이 생겼다는 것도 놀랄 일인데 저를 못 알아보는 서하가 더 놀랄 일이었다. 고작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정략결혼하려 했던 상대를 몰라보다니.
“애인이 생겨서 일부러 모른 척한 건가.”
하지만 서하의 겁먹은 눈동자는 정말로 자신을 못 알아보는 듯했다. 혼란스러움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던 도민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김 비서님.”
-무슨 일이십니까, 도민님.
“진서하 씨를 만났는데…….”
-…만나셨는데요?
도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절 기억하지 못합니다.”
-…네? 기억하지 못하신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장, 진성 건설이랑 진서하 씨 관련해서 빨리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민이 힘없이 휴대폰을 든 손을 툭 떨어트렸다. 그토록 간절하게 만나길 원했는데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서하를 보자 허무함이 몰려들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심각해진 얼굴로 한동안 도민은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 * *
지끈거리던 머리는 누군가 꼬챙이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더욱더 아파졌다.
“아…….”
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에 세헌이 우뚝 멈춰 섰다. 서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세헌을 향해 그녀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너무 놀라서 그런지…. 갑자기 두통이 생겨서.”
“병원에 가자.”
발길을 돌리려는 그의 손을 서하가 붙잡았다.
“괜찮아요. 이제는 안 아파요.”
“그래도.”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녀가 생긋 웃어 보였지만 세헌은 걱정스러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시 아프면 말해. 당장이라도 가게.”
“알겠어요. 아!”
멈칫하는 그녀를 보며 세헌이 놀란 듯 물었다.
“아파?”
“아니요. 우리 아이스크림 안 받아왔어요. 어서 가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그가 긴장이 풀린 듯 실소를 터트렸다.
“아이스크림이 중요한 거였군.”
“그럼요. 빨리 가요!”
다시 아이스크림 가게로 되돌아간 서하가 아이스크림을 챙겨서는 맞은편에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던 서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헌 씨.”
“응.”
“그 남자 누구예요? 세헌 씨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의 시선이 서하에게 향했다.
“절 아는 것 같았는데…. 전 기억이 안 나니까요.”
모른다고 하자 충격을 받은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던 도민을 떠올리며 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친구였나…?”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자신이 기억을 못 한다고 하자 도민이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냈던 게 생각이 났다.
“아니.”
단호하게 말하는 세헌을 향해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세헌은 잠시 고민했다. 알고 있었다. 수도 투자증권의 손자 양도민, 그는 서하의 정략결혼 상대였다.
단순히 정략결혼 상대라고 말하면 됐지만, 괜히 두려웠다. 혹시나 그녀가 약속한 거라면 도민과 결혼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하게 될까 봐.
하지만 괜히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 앞에서는 누구보다 떳떳해지고 싶었다.
“세헌 씨?”
생각에 잠겼던 세헌이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 남자.”
자신을 올려다보는 맑은 눈동자를 보며 그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네 정략결혼 상대였어.”
그 말에 놀란 듯 눈만 깜빡인 채 서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내 결혼 상대였다고요?”
“응.”
“그…. 가족들이 강제로 정했다는 정략결혼 상대 말하는 거죠?”
“그래.”
“…그랬구나. 그래서 마지막에 그 말을 했던 거구나…….”
정략결혼 상대. 사랑도, 마음도 없었을 텐데 크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그녀의 뇌리에 박힌 듯했다. 마치 잃어버린 연인을 보는 듯한 그 눈동자가 자꾸만 서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혼란스러웠다. 가족에게 버림받은 거라면 차라리 과거의 기억 따위는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마주친 도민과의 만남은 그녀로 하여금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도민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기억을 잃기 전의 일들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진서하.”
나긋한 음성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헌 씨.”
“생각하지 마.”
“네?”
“그 자식, 생각하지 말라고.”
불안했던 걸까. 평소와 달리 그의 눈에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생각 안 했는데.”
서하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궁금했을 뿐이에요.”
“… 뭐가.”
“제 잃어버린 기억이요.”
자신의 볼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붙잡은 세헌이 물었다.
“기억이 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건 하나야.”
“어떤 거요?”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
그다운 고백에 서하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세헌의 올곧은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또한, 그가 지금 무척이나 불안해한다는 것도.
서하가 그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도 같겠네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헌 씨를 좋아하게 되는 건.”
세헌이 손을 뻗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따스한 온기에 그가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밀어내지만 마.”
“그럴 일 없어요.”
“그래.”
세헌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서하는 다짐했다. 그가 걱정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