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32화 (33/70)

32화

* * *

서하가 상기된 얼굴로 거실을 왔다 갔다 하는 일을 반복했다.

“앞으로 5분 뒤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휴대폰을 열어 도윤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가 부엌으로 향했다.

“음식은 준비됐고.”

세헌이 출근하기 무섭게 장을 봐온 서하는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인터넷 영상을 보며 파스타와 샐러드, 스테이크를 준비했다. 맛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냄새는 합격점이었다.

“후.”

긴장된 표정으로 현관을 바라보던 그녀는 뭔가가 떠올라 짧게 탄식을 내뱉었다.

“케이크! 케이크!”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 문구를 확인한 그녀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세헌 씨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케이크 위에 쓰여있는 문구를 바라보던 서하는 현관문에서 나는 인기척에 서둘러 촛불을 꺼냈다.

“빨리…. 빨리.”

마음이 급해진 그녀는 달랑 초 하나만 꽂고는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혹여나 늦을세라 케이크를 들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철컥거리며 잠금장치가 풀리자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천천히 열리는 문틈으로 그가 보였다. 우세헌이.

“생일 축하해요!”

생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어릴 때 말고는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생일을 챙겨줬을 때도 매번 덤덤하게 지나갔던 세헌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대로 굳어진 채, 그녀를 응시하던 세헌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알고 있었나?”

“그럼요! 아침에 모르는 척해서 서운했죠? 사실 다 계획한 건데!”

서하의 계획이었다. 일부러 생일을 모르는 척하고 이렇게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서 그를 놀려주는 것을.

세헌의 시선이 천천히 케이크로 향했다. 일렁거리는 촛불 하나를 그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서하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자, 소원 빌고 후! 하세요.”

후, 하라니. 어릴 때 이후로 무언가를 불어본 적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귀엽게 케이크를 내미는 서하를 보자 세헌은 그 장단에 맞춰주고 싶어졌다.

“후.”

그가 촛불을 끄자 서하가 환호를 하며 말했다.

“다시 한번 축하해요, 세헌 씨!”

마치 자신이 생일인 양 활짝 웃어 보이는 서하를 보며 세헌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세헌의 눈이 일순간 커졌다. 서하가 그의 손을 잡아 이끌고 있었다.

“배고프죠? 어서 씻고 와요. 내가 저녁 준비해놨어요.”

“저녁을 준비했다고?”

“네, 직접 만들었어요.”

귀엽게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거실 테이블 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조금 식었을 텐데 괜찮을 거예요! 어서 손 씻고 와요.”

서하가 손수 만든 음식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란 세헌이 그대로 굳어졌다.

“어서요.”

손을 씻기 위해 욕실로 향한 세헌은 이런 생일이라면 매일이 생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잠시 동안 생각했다.

다시 거실로 나온 그를 향해 서하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세헌이 홀린 듯 조용히 소파에 앉자, 서하가 그를 향해 포크를 내밀었다.

“생일인 사람이 처음 맛을 봐야죠, 안 그래요?”

서하가 내민 포크를 조용히 받아든 그가 음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샐러드와 스테이크, 파스타까지. 천천히 그녀가 만든 음식을 바라보다 먹음직스럽게 익혀진 스테이크 한 조각을 찔러 들었다.

세헌의 입 안으로 스테이크가 사라지는 걸 본 그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어때요? 괜찮아요?”

수많은 스테이크를 먹어 보았다. 미슐랭 출신 셰프가 만든 스테이크부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스테이크까지. 안 먹어본 것이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가장 맛있는 걸 꼽으라면 자신의 앞에 놓인 서하가 만든 스테이크였다.

식어서 딱딱해졌음에도 그의 입에서는 마치 살살 녹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헌이 입술 끝이 매끈하게 솟았다.

“맛있군.”

“정말요? 다행이다! 걱정했거든요. 세헌 씨가 안 좋아할까 봐. 파스타도 먹어봐요!”

아이처럼 들뜬 서하를 보며 그가 포크를 움직였다. 이내 파스타도 맛을 본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맛있고.”

세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서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와인을 깜빡했네요. 저기서 아무거나 가져오면 되는거죠?”

그녀가 와인 셀러를 가리키자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맨 위에 올려진 와인을 한 병 꺼낸 그녀가 세헌에게 내밀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투명한 크리스털 와인잔에 검붉은 와인이 굽이치며 담겼다. 세헌과 서하가 동시에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짠할까요?”

서하의 제의에 그가 작게 실소를 터트리고는 가볍게 그녀의 잔에 잔을 부딪쳤다. 크리스털이 부딪히며 나는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자 서하가 웃으며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거실 사이드 조명과 전면 유리창으로 보이는 밤 야경, 그리고 와인까지. 분위기 때문인 걸까, 서하는 점차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내일이잖아요, 세헌 씨 본가 가는 거.”

“무서워지기라도 했나.”

“아니요, 그냥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거죠. 아무래도 세헌 씨…. 부모님이니까 잘 보이기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고. 그 말에 그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휘었다.

“왜 잘 보이고 싶은데.”

서하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그야…. 세헌 씨 부모님이니까요.”

“그러니까 왜 내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은 건데.”

“그건, 당연히…!”

“당연히?”

그의 집요한 시선이 서하에게 고정됐다.

“…내가 세헌 씨한테…. 잘 보이고 싶으니까요.”

무심결에 흘러나온 그녀의 말에 세헌의 두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뭐라고?”

“세헌 씨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고요, 내가.”

술의 힘일까, 그녀도 깨닫지 못했던 속내가 거리낌 없이 터져 나왔다.

“세헌 씨랑 함께 있으면 좋고…. 좋아요.”

맑은 눈망울에 그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취한 건가.”

그의 중얼거림에 서하가 발끈하듯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럼, 그 말, 무르는 일 없어야 할 거야.”

“네…?”

“내가 좋다는 말.”

끈적하고도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평소라면 피했을 서하였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럴 일 없어요.”

서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잔을 채웠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젖힌 뒤 손을 뻗었다.

단단하고도 긴 그의 팔이 서하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자신에게로 바짝 당겼다.

“앗…!”

놀란 그녀의 입술이 벌어졌을 때, 세헌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슬쩍 벌어진 그녀의 입술 틈새로 제 입술을 욱여넣고는 입 안을 벌렸다.

“으읍…….”

참아왔던 욕망이었다. 그가 매일 서하를 보며 참고 또 참아왔던 욕망을 폭발하듯 그녀의 입 안에 퍼부었다.

탐닉하듯 입 안을 휘젓고 서하의 혀를 감아올리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의 몸도 절로 움찔거렸다.

달뜬 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그저 세헌이 주는 숨을 헐떡이며 받아 마실 뿐이었다.

“하아…….”

길고 강렬했던 키스가 끝나고, 서하가 몽롱해진 정신으로 그의 목에 손을 감았다.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세헌 씨…….”

물기 어린 그녀의 입술을 보며 다시금 올라오는 욕구를 억누른 그가 말했다.

“여기서 그만하자고 해.”

그가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안 그러면 멈출 수 없을 거 같으니까.”

“멈추라는 말…. 안 했는데.”

단숨에 그의 욕망이 끓어올랐다. 후끈하게 오른 열기에 온몸이 뜨거웠다.

“봐줄 생각 없어.”

말은 그렇게 했어도 세헌은 최선을 다해 이성을 잡고 있었다. 첫 경험인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촉이 그녀의 맨살을 쓸었다.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간지러우면서도 소름 돋는, 설명할 수 없는 감촉이 서하의 세포 하나하나를 일깨웠다.

달뜬 숨을 내뱉으며 서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욕에 젖은 세헌의 눈빛은 뜨겁게 그녀를 향해 있었다.

애가 타는 자신과는 다르게 능숙하게 행동하는 그를 보며 서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와 이렇게 뜨거운 밤을 보낸 적이 있었는지. 고작 썸만 타는 관계였다고는 했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었으니까.

“세헌 씨…….”

“왜.”

탁한 목소리가 야릇하게 그녀의 귓가를 휘감았다.

“…혹시 전에도…. 저랑 이렇게…….”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서하를 내려다보며 그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니. 없어.”

단호한 어조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신사적으로 하고 있는데.”

세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갔다. 뭉근하게 그녀의 손목을 쓸던 그가 입을 맞췄다.

“어때.”

손목에서 그의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그 온기에 서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속눈썹을 바라보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내렸다.

서하의 온몸에 열꽃이 폈다. 붉은 자국들이 빈틈없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 피어났다.

“하윽!”

자신의 하복부에 가득 들어찬 이물감에 서하가 본능적으로 세헌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세, 세헌 씨… 흐읏!”

“그래. 그렇게 잡아.”

점차 고양되는 사정감과 감각에 정신이 혼미했다. 잔뜩 풀린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서하와 눈을 맞추며 세헌이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세헌은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지 못한 채, 이렇게 자신의 품에서 평생 있길 바라며 그가 다시금 몸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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