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31화 (32/70)

31화

* * *

서하가 세헌의 집으로 들어 온 지 2주일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거실 창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심각했다.

“세헌 씨한테 받은 건 많은데…. 정작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네.”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로 세헌의 집에 눌러앉은 것도 염치가 없었지만, 그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어서 선물을 주는 것도 받기만 하기에는 더는 서하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그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기에 서하의 속은 더 바짝 타들어 갔다.

그녀가 소파 위에 올려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라고는 세헌의 번호와 혹시 몰라 알아둔 도윤의 번호가 다였다.

서하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도윤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신호음이 뚝 끊긴 수화기 너머로 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배도윤입니다.

“도윤 씨? 저 진서하예요.”

-네?! 서하 씨?! 아, 세헌이 회의 들어가는 바람에 전화 안 받아서 저한테 하셨구나!

“아니요.”

-아니라고요?

당황한 듯한 도윤의 목소리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도윤 씨한테 뭐 좀 물어보려고요. 세헌 씨, 뭐 좋아해요?”

-음…. 우세헌이 좋아하는 거라…. 모르겠네. 서하 씨가 주는 거면 다 좋아할걸요?! 며칠 뒤에 세헌이 생일이라서 선물 사시려고 하는구나!

생일이라는 단어에 서하가 놀란 듯 되물었다.

“잠, 잠깐! 세헌 씨 생일이에요?”

-네? 선물 사시려고 물어보신 거 아니에요?!

“세헌 씨, 생일이 언제인데요?!”

-이번 주 금요일인데…!

이번 주 금요일이라니. 생일까지 고작 3일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에 서하는 크게 놀랐다.

“…중요한 날을 그냥 넘어갈 뻔했어요.”

-하하, 세헌이가 생일을 막 챙기는 것도 아니라서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아요!”

가볍게 심호흡을 한 서하가 말을 이었다.

“도윤 씨, 저 좀 도와주세요.”

* * *

오전부터 진행된 회의는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늘어졌다. 점심 식사라는 핑계로 잠시 중단된 회의에 뻐근한 고개를 돌리던 세헌이 휴대폰을 들었다. 11시 30분, 곧 점심시간이었다.

그에게는 꿀 같은 시간이었다. 잠시나마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함께 밥을 먹을 수 있었기에. 매일 보는 서하지만 출근을 하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그녀가 보고 싶어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도 임원들과 점심을 같이하고 바로 회의에 들어가야 하기에 서하와 함께 밥을 먹는 건 포기해야 했다.

“또 시켜야 하나.”

도윤이 지난번처럼 햄버거를 먹고 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배도윤.”

“점심 어떻게 할 거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물어오는 도윤을 보며 그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임원진들이랑 점심 먹는다며. 서하 씨는?”

“네가 왜 진서하를 걱정하는데.”

그 물음에 도윤이 진저리난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나 시킬 거잖아. 그리고! 내가 뭐, 진서하 씨 잡아먹냐! 나 네 최측근이야, 최측근! 질투 좀 그만해라! 진짜 서운해지려고 한다!”

“시끄러워.”

“내 말이 맞으니까 괜히 시끄럽다고 하는 거지?!”

도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가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세헌 씨?

들려오는 달콤한 목소리에 매서웠던 그의 눈매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점심에 못 갈 것 같아.”

-괜찮아요, 많이 바빠요?

“응. 그래서 배도윤을 보낼까 해.”

-도윤 씨요?

“답답하면 나가서 먹어도 되고. 배도윤 보고 데려다 달라고 하면 어디든 데려다줄 거니까.”

-알겠어요. 세헌 씨도 아무리 바빠도 점심 챙겨 먹고요.

걱정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듣기 좋았다.

“듣기 좋은데.”

-네?

“더 걱정해줘.”

세헌의 입에서 나온 걱정해달라는 말에 앞에 있던 도윤은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정작 서하는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말….

“일찍 퇴근해야겠네.”

-알겠어요, 조심히 와요.

서하와 통화를 마친 그가 입매를 휘며 핸드폰을 내려놓자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도윤이 말했다.

“우세헌 입에서 닭살 돋는 말 듣는 게 이렇게 소름 끼치는 일일 줄이야.”

세헌이 언제 미소를 지었냐는 듯 다시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도윤을 바라봤다.

“진서하, 점심 사주고 와. 딴짓할 생각 말고.”

“딴짓 안 하거든! 간다!”

대표실에서 나온 도윤이 히죽거리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서하 씨?! 타이밍 정말 끝내주네요! 저 지금 갈게요!”

통화를 마친 도윤이 중얼거렸다.

“우세헌, 진짜 나한테 고마워서 절해야 해.”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하는 도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잠시 후, 차를 끌고 세헌의 집 앞으로 간 도윤은 로비에서 나오는 서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서하 씨! 여기예요!!”

그 목소리에 두리번거리던 서하가 도윤을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도윤 씨! 아, 세헌 씨는 점심 먹으러 갔어요?”

“네, 임원분들이랑 점심 먹으러 갔어요. 아마 점심 먹고 바로 회의 들어갈 거라 정신없을 거예요.”

안도하듯 서하가 말했다.

“다행이네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세헌이가 서하 씨 점심 사주고 오라고 했으니 알리바이는 충분합니다!”

알리바이라는 말에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러니까 꼭 뭔가 일 저지르러 가는 사람들 같은데요?”

“아닌가요?”

“맞아요. 어서 가요!”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세헌의 집 인근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던 서하가 말했다.

“선물로 마땅한 게…. 역시 넥타이겠죠?”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넥타이는 매일 해야 하니까 선물로는 딱이죠.”

“그런데…. 넥타이 종류가 이렇게 많았나요?”

줄지어 진열된 넥타이들을 같은 색이었어도 디자인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음, 세헌 씨 보니까 티 안 나는 무늬를 쓰는 거 같던데.”

“네, 주로 단색이나 아니면 무늬가 티가 나질 않는 걸 선호하는 것 같긴 하네요!”

한참을 진열대 앞에서 서성거리던 서하가 검은색과 짙은 청색이 오묘하게 섞인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이거…. 세헌 씨한테 어울릴 것 같아요.”

“엇, 저도 이거 보고 있었는데!”

색 배합도 예쁘면서 패턴도 작고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고급스러웠다.

“그래요? 이걸로 해야겠어요!”

만족한 얼굴로 직원을 향해 넥타이를 건넨 서하가 도윤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럼, 저희 밥 먹으러 갈까요?”

서하와 도윤이 쇼핑을 끝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던 그 시각, 세헌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회의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서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고개가 갑작스러운 진동에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아버지?”

그가 귓가로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세헌이냐.

“네, 아버지.”

-주말에 본가에 오거라. 네 생일이 금요일이니 같이 밥 먹자고 하는구나.

“어머니가요?”

-그래. 밖에서 먹는 것도 괜찮지만 네 어머니 성격에 손수 하는 걸 좋아할 테지.

호탕하게 웃으며 우 회장이 말을 이었다.

-이참에 데려오는 건 어떻냐.

“누굴 데려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네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 말이다.

우 회장의 말에 그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글쎄요.”

아직 일렀다. 서하와 세헌은 아직 연인 사이도 아니었으며 만약 가족을 소개해준다고 하더라도 기억을 잃은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었다.

-응? 아직도 발전이 없는 게냐? 네가 너무 일만 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신경이 온통 서하에게 쏠린 게 문제인데 일만 하는 거라니.

“물어는 보겠습니다.”

-데리고 왔으면 좋겠구나.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럼, 그때 보자꾸나.

“네.”

우 회장과 통화를 마친 세헌이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같이 가자고 하면 뭐라고 할까.”

동그랗게 뜬 큰 눈을 깜빡이며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부담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말을 돌릴까. 서하의 모습을 떠올리던 그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서하가 보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회의를 끝내고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기에 한숨이 나왔다. 가만히 서하를 떠올리던 세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버려야겠네.”

그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서하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사를 포장해 집으로 온 세헌은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연신 생글거리며 웃는 서하가 귀엽기도 했지만, 웃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냥, 오늘은 기분이 좋네요.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그가 서하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끼었던데.”

“아하하…. 아니 아까는 좋았는데 말이에요. 이상하네?”

따갑게 꽂히는 세헌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그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음식 식겠다! 우리 밥 먹어요, 밥!”

서둘러 포장지를 벗기는 서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진서하.”

“네?”

“이번 주 토요일에 본가에 갈 생각인데.”

“본가요? 세헌 씨 본가?”

세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같이 갈래?”

“세헌 씨…. 본가에 저랑요?”

“안 가도 상관없어. 점심만 먹고 나올 거니까.”

갑자기 본가라니. 세헌의 부모님이 다 계실 본가에 같이 간다는 생각만 해도 온몸이 긴장되는 것 같았다.

‘왜 갑자기 본가에 같이 가자고 하는 걸까.’

혹시나 그도 집안에서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을 데려가 여자가 있다며 미루려고 하는 걸까.

‘그건 너무 과한 생각이야. 그렇다면…. 아! 생일.’

세헌의 생일은 금요일이었다. 아마도 그의 생일을 축하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짝 긴장했던 서하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정말 단순하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밥을 먹는 자리라면 자신도 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서하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제가 가도 되는 거예요?”

“너라서 같이 가자고 한 건데.”

태연하게 말을 내뱉는 그를 보며 서하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럼, 같이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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