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30화 (31/70)

30화

* * *

“진서하가 좋아해?”

세헌의 물음에 운전을 하던 도윤의 시선이 룸미러로 향했다.

“아, 햄버거? 엄청 좋아하던데? 서하 씨, 불고기 맛 좋아하더라고.”

“서하 씨?”

나직하게 흘러나온 음성에 도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왜, 왜?”

“언제부터 배도윤이 진서하를 서하 씨라고 불렀을까.”

움찔거리는 도윤을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 점심시간 이후부터인가.”

“야, 야…….”

“햄버거만 가져다주고 온 거 맞는 거지.”

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룸미러 속 도윤의 눈을 응시했다.

‘눈치는 더럽게 빨라 가지고.’

도윤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햄버거 하나 먹었다.”

“하나가 아니겠지. 네 식성에.”

“진짜 너무 배가 고파서! 빨리 먹고 나왔어! 서하 씨랑 손끝 하나 닿지 않았다고.”

“닿았으면 죽어야지.”

“야…. 아무리 그래도 친구한테 그런 살벌한 말을…….”

울상이 된 도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채, 세헌은 고개를 차창 밖으로 고정했다.

“빨리 가기나 해.”

“알겠어.”

집 가는 길이 이렇게 설레고 즐거운 일이 될 줄이야.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창 밖으로 멀리 보이는 자신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집에 서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헌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기다리고 있을까.’

그녀가 자신을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이윽고 세헌의 집 앞에 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그가 문을 열어젖혔다.

“아, 다음 주 월요일 오전에 회의 있는 거…! 야, 우세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사라진 세헌의 빈자리를 보며 도윤이 중얼거렸다.

“아주, 진서하라면 정신을 못 차리지.”

도윤이 뭐라고 하건 차에서 나온 세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혼자 있는 서하가 걱정이 되면서도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오늘따라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느렸다. 숫자가 바뀌는 걸 바라보던 세헌의 입에서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띵.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긴 다리를 뻗어 성큼 집 앞으로 향한 그가 도어록에 손을 올렸다.

띠띡띠띠. 띠리릭.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그토록 기다리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왔어요?”

해사하게 절 보며 웃는 서하의 모습에 그의 입꼬리가 절로 솟아올랐다.

“오늘은 더 일찍 왔네요?”

“금요일이니까.”

“금요일이면 다음 날이 주말이니까 더 힘내서 일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직장인들이 들으면 욕하겠는데.”

세헌의 말에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들어가지.”

온기라고 하나 없던 집이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졌다. 차가웠던 야경까지 세헌의 눈에는 따스하게 보일 정도였다.

“집이.”

“네?”

“따뜻해진 것 같아.”

그 말에 서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답했다.

“아, 아까 따뜻한 물로 오래 씻었는데! 온기가 퍼졌나?”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세헌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저녁은 어떻게 할래요? 나가서 먹을까요?”

“그러든지.”

그가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을 이었다.

“뭐 먹고 싶어?”

“세헌 씨가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요 며칠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었잖아요.”

“난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좋던데.”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말을 잘도 내뱉는 그를 보며 서하가 얼굴을 붉혔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거 말고요. 세헌 씨가 좋아하는 거.”

“진서하 말고는 특별히 없어.”

쐐기를 박는 말에 결국, 서하가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내가 또 정할게요. 따뜻한 국물 요리 어때요? 어제 나갈 때 보니까 집 앞에 바로 샤부샤부 파는 곳이 있던데.”

“그래.”

두 사람이 사이좋게 샤부샤부 집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주문을 마친 서하가 물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세헌 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그가 서하와 시선을 맞췄다.

“생각해봤는데…. 저 세헌 씨 집에 들어오는 조건으로 뭐든 다 하겠다고 했는데…….”

“했는데?”

“그런데 세헌 씨는 아무것도 안 시켜서요. 집안일이라도 해야 하나 싶은데.”

집안일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밥은 밖에서 사 먹는 데다가 빨래나 청소는 일주일에 두세 번 오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다 해놨으니까.

“밥도 매번 얻어먹고 심지어 세헌 씨는 서재에서 자는데 전 안방에서 자고…. 이건 너무 저만 좋은 거 아니에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서하를 보며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서.”

“네?”

“뭘 하고 싶은데.”

“그건 세헌 씨가 정해줘야죠.”

정해달라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면 서하가 다시는 이런 소리를 하지 못할 것이라고 세헌은 장담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제 품에 안고 싶은 것도 모자라서 완벽하게 옭아매고 싶다는 것을.

“내가 말도 안 되는 걸 해달라고 한다면?”

“네?”

“감당할 자신은 있고?”

서하의 입술이 슬그머니 닫혔다. 가만히 세헌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이 다시금 열린 것은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헌 씨라면…. 말도 안 되는 걸 시킬 리가 없잖아요.”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졌다가 작아졌다.

“내가?”

“네.”

오늘 도윤에게 그의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서하는 더 확신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흔들림 없는 서하의 눈빛을 보며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서하.”

“네?”

“네가 그러니까.”

그가 가볍게 입술 끝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진짜 감당 안 되는 걸 시키고 싶잖아.”

어느새 그의 눈에서 열기가 들끓었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용기가 생겼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네.”

진득하게 달라붙은 목소리에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세헌 씨 정도면…. 더 좋은 조건의 여자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외모든, 능력이든, 집안이든.”

삐딱하게 기울어지는 그의 고개에도 그녀가 말을 이었다.

“왜 하필 저예요?”

집안은 빚쟁이가 쳐들어올 정도로 망했고, 그런 집안에서조차 버림을 받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억까지 모조리 잃은 상태였다. 그런 자신을 모든 걸 다 가진 세헌이 보살피는 이유가 궁금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글쎄.”

확실히 서하가 특출나게 미인인 것도, 매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리숙하면서도 경계심이 많은.

그녀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는 언제든지 만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서하였다. 무엇 하나 가진 게 없어도 존재만으로도 세헌을 벅차게 만드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하나야. 내가 진서하가 아니면 안 되는 거.”

가끔 그가 서하를 직시하며 나직하게 목소리를 낼 때, 그녀는 온몸이 옴짝달싹 못 하게 꽁꽁 묶여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처럼.

“그래서 너는 어떤데.”

흔들림 없이 서하의 눈동자에 깊숙하게 들어온 그의 시선은 그녀의 속내를 발가벗기는 것 같았다.

“너도 내가 그런가.”

“…아.”

마치 곧 말을 내뱉으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게…….”

“지금 말해달라는 게 아닌데.”

여유롭게 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다릴 수 있어, 진서하라면. 그러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타이밍 좋게 직원이 나타났다. 두 사람 앞에 샤부샤부 전용 냄비와 음식들을 내려놓은 직원이 밝게 목소리를 냈다.

“맛있게 드세요!”

그가 조용히 젓가락을 들고 서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맛있게 먹으라잖아.”

서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샤부샤부 냄비에서 뿌옇게 올라오는 수증기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그래서 보지 않아도 새빨개진 게 느껴지는 얼굴을 감출 수가 있어서.

“잘, 먹을게요.”

하지만 서하는 모르는 듯했다. 애써 태연한 척 목소리를 냈어도 떨리는 손가락만큼은 감출 수가 없다는 것을.

잠시 후, 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이 나란히 향한 곳은 바로 휴대폰 매장이었다.

“여기서 아무거나 골라도 돼요?”

들뜬 목소리로 묻는 서하가 귀여워 그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으음, 어떤 거로 할까.”

진열대에 주르륵 놓여 있는 휴대폰들을 한참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세헌에게로 향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그런데…….”

“그런데?”

“세헌 씨 휴대폰은 뭐예요?”

서하의 물음에 그가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세헌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받아든 그녀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이거 디자인 예쁜 것 같은데…. 세헌 씨랑 어울리는 검은색이네요? 음, 다른 색도 있나?”

그러자 앞에 있던 직원이 물었다.

“남성분 폰으로 커플폰 하시게요?”

커플폰이라는 말에 당황한 서하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 폰, 색상 여러 가지예요. 보통 남성분이 검은색 하시면 여성분 흰색이나 골드 색 많이 하시는데.”

직원은 세헌이 가지고 있는 휴대폰과 똑같은 디자인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똑같은 디자인인데 색상만 다른 거예요.”

서하의 손이 저절로 골드 색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아…. 이거 색 예쁘네요. 디자인도 더 깔끔해 보이는 것 같고.”

“그렇죠? 인기 많은 색상이에요.”

세헌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서하를 바라보더니 직원을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이거 주세요.”

“잠깐만요! 가격도 물어보고…….”

말리는 그녀를 향해 세헌이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이게 좋아.”

“네?”

“커플 휴대폰이라잖아.”

그러고는 그가 다시금 직원을 향해 카드를 내밀었다.

“일시불이요.”

결제하는 세헌의 입가가 살짝 휘어 보였다면 착각일까, 그런 그를 보며 서하도 나쁘지 않은 기분에 슬쩍 입술을 휘어 보였다.

이내 휴대폰 매장을 나온 두 사람의 손에는 똑같은 디자인의 색만 다른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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