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25화 (26/70)

25화

* * *

“들어와.”

세헌이 현관문을 열자 서하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실례합니다…….”

작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이 세헌의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나밖에 없으니까 실례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요. 이거 신는 거예요?”

서하가 슬리퍼를 가리키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발에 한없이 큰 슬리퍼를 신은 그녀가 거실로 향했다.

“와…. 세헌 씨, 집 너무 좋은 거 아니에요? 한강이 다 보여요!”

마치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서하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원래 성격이 그랬나.”

“네?”

두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쳐다보는 서하를 향해 그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혼잣말이야.”

“아, 네. 와… 밤에 보면 야경이 너무 예쁘겠어요.”

연신 감탄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며 세헌은 신기했다. 기억을 잃어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억눌러져 있던 성격이 튀어나온 것일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동안 세헌이 알고 있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렸다.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을 잃어버렸는데 성격이 바뀌다니.’

분명 서하의 주치의는 그녀가 사람과 관련된 기억들만 잃었다고 했다. 예를 들면 휴대폰은 기억하고 있어도 휴대폰과 얽힌 사람과 관련된 추억이라든가 기억은 모두 잃어버린 상태였다.

야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매일 볼 거야.”

“그렇겠죠? 제가 여기 있을 때는?”

서하가 활짝 웃어 보였다. 마치 아무 상처도 받은 적이 없다는 듯 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세헌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그리고 지금 이 모습이 원래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세헌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밥 먹으러 가지.”

“아, 배고파요? 제가 요리해드릴게요.”

“요리?”

“네. 라면 정도는 끓일 수 있어요.”

라면 정도라니.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세헌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라면 끓이는 법은 까먹지 않았나 보군.”

“…그러게요.”

어색하게 웃으며 서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라면은 어딨어요?”

“없어.”

“네?”

“없다고, 라면.”

“그러면 집에 요리할 수 있는 게 있어요…?”

대답 대신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리는 세헌을 보며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요!”

그녀가 부엌으로 향하더니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빈 냉장고에는 커피와 생수만 줄을 맞추어 가지런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니….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예요?”

서하의 시선이 냉장고 옆에 있는 와인 셀러로 향했다. 가득 채워진 와인 병을 보며 그녀가 세헌을 향해 말을 이었다.

“혹시…. 알코올 중독자, 그런 건 아니죠?”

“내가 그래 보이나?”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피식 소리를 내며 웃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지.”

“네? 어디 가요?”

“밥 먹으러.”

두 사람이 나란히 향한 곳은 세헌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이었다.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 테이블 위에 놓일 때 즈음 서하가 맞은편에 앉은 세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헌 씨…? 라고 부르면 될까요?”

오랜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이 듣기 좋아 세헌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헌 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말해.”

“그게…….”

겸연쩍게 웃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배도윤 씨한테 들었는데.”

“뭐를 들었다는 거지.”

“세헌 씨랑 제가…. 친한 사이였다고.”

정확하게 도윤은 두 사람의 사이가 긴밀한 사이라고 말했지만 서하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배도윤이 그랬다고?”

“네. 그래서 궁금해서 그러는데…. 우리 무슨 사이였나요?”

그가 서하와 잠시 시선을 맞췄다.

“무슨 사이였을 거 같은데.”

길게 뻗은 그의 눈매가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져서 서하는 시선을 피한 채 웅얼거렸다.

“네? 모르니까 물어본 거잖아요…….”

“이럴 땐 똑같네.”

짓궂은 농담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던 서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해줄까.”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서하한테 미친 듯이 매달리고.”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하는 세헌의 모습에서 서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진서하는 내가 좋으면서도 밀어내는 관계였는데.”

좋으면서도 밀어내는 관계.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서하를 향해 그가 물었다.

“나도 아직 정의하지 못한 관계인데. 진서하가 이건 어떤 관계인지 정의 좀 내려줬으면 해.”

잠시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던 서하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세헌 씨는 나한테…. 매, 매달리고 저는 그런 세헌 씨가 좋으면서 밀어냈다고요?”

“그래.”

“그런 관계가 어딨어요. 좋으면 좋은 거지. 왜 밀어내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유려하게 휘어진 입꼬리가 서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왜 밀어냈을까.”

“…그건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네요.”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서하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어쩌면 알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이 왜 그를 밀어낸 건지. 정말로 세헌을 좋아하면서 밀어낸 것이 맞다면 그에게 너무 빠질 것이 무서워 밀어낸 것이 아닐까 하고 서하는 생각했다.

“먹어.”

나긋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포크를 들고 있던 서하가 정신을 차렸다.

“먹을 거예요.”

“먹여달라는 것처럼 포크만 들고 있어서 말이지.”

태연한 얼굴로 그가 와인잔을 들었다.

“원한다면 그래 줄 수도 있고.”

“제가 직접 먹을 수 있어요.”

서하가 먹기 좋게 잘린 고기를 푹 찍어 들고는 입 안에 넣었다. 오물거리며 먹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세헌이 그제야 포크를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 바뀐 그녀의 성격도, 지금 이 상황도.

‘차라리 기억을 되찾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이대로 제 영역에서 계속 있어 줬으면 하는 음습한 바람이었다.

* * *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온 세헌이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거지?”

옷 하나를 돌돌 말아서는 베개를 만들고 카디건을 덮은 채 소파에서 잘 준비하던 서하가 그를 보며 외쳤다.

“세헌 씨야말로 뭐, 뭐 하는 거예요!”

“뭐가.”

“그런 차림으로…!”

대충 묶은 가운은 앞섶이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보이는 단단한 가슴에 서하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가린 것치고는 아주 잘 보이는 것 같은데.”

“안 보이거든요!”

고개를 돌리는 서하를 보며 그가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서 지금 뭐 하는 거지.”

“아, 자려고요.”

“씻지도 않고?”

“씻긴 해야 하는데.”

“진서하가 이렇게 더러운 줄은 몰랐는데.”

능글맞은 그의 말에 서하가 발끈하며 답했다.

“더럽다니요! 민폐일까 봐 잠자코 있던 건데.”

“민폐면 계속 안 씻으려고 했나.”

“아니…!”

귀까지 새빨개진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세헌에게는 자극적이었다.

“진서하.”

“…왜요.”

“씻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언제는 더럽다면서요.”

그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순진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척하는 건지. 순수한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는 서하를 보았을 때는 후자는 아닌 게 확실했다.

“저, 그러면 씻고 올게요.”

스르륵 소파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보지도 않고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은 내 방에 있어.”

“어… 아까 현관 쪽에도 욕실이 있던 것 같은데.”

“거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내 방 욕실 써.”

“아, 알겠어요.”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서하의 뒷모습을 보며 그가 다시금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같이 살면, 자신의 품 안에 가둬두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이것대로 곤욕이었다.

“…거실 욕실을 쓰게 하는 게 더 나았나.”

자신이 쓰는 욕실을 사용하는 서하라니. 머릿속에 떠오른 야릇한 이미지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쳤군.”

자신의 저속한 머릿속을 떨쳐버리기 위해 와인 셀러로 향하던 세헌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알콜 중독자가 아니냐고 묻던 서하의 얼굴이 왜 하필 이 타이밍에 떠오른 것인지.

그녀가 자신의 공간에 들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이제는 모든 것을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 생각들까지도.

“하.”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나직하게 한숨을 내뱉은 그가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천천히 돌아섰다.

“세헌 씨, 샴푸랑 바디워시 썼는데 괜찮죠?”

자신의 몸에서 나는 향과 똑같은 향을 풍기며 다가오는 서하를 바라보는 세헌의 눈에 열기가 들끓었다.

“세헌 씨?”

눈동자에만 열기가 들끓은 것은 아니었다. 저릿하게 하복부로 피가 몰리는 느낌에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시 샤워해야 할 판이군.”

세헌의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서하는 개운하다는 듯 소파로 향할 뿐이었다.

“그럼, 저는 소파에서 자면 되는 거죠?”

한결 상쾌해진 얼굴로 묻는 그녀를 보며 세헌이 곤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내 방에서 자.”

“…네?!”

“내 침대에서 자라고.”

“아니…. 아직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아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귀까지 새빨개진 그녀가 말하자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네?”

천천히 서하를 향해 다가가자 그녀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왜, 왜요…….”

“원한다면 같이 자줄 수는 있는데.”

“무슨…!”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그를 올려다보며 서하가 시선을 돌렸다.

“잘게요. 잘 거예요, 저.”

“그래.”

“세헌 씨도 잘 자요!”

당황한 서하가 서둘러 세헌의 방으로 향했고, 이내 부스럭거리며 천이 비벼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침대에 들어갔음을 확신한 그가 느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불편한 것은 딱 질색인 세헌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입가는 저절로 휘어졌다.

“나쁘지 않네.”

말과는 달리 오늘은 왠지 잠 못 이루는 긴 밤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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