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 *
삼 일째였다. 깊게 잠든 그녀가 깨지 않은 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세헌은 서하의 옆에서 떠나질 않았다. 잠든 그녀의 옆을 묵묵하게 지켰다. 매분 매초가 지옥이었다.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란 피는 모조리 마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원에서는 그녀의 상처는 회복되고 있는데 왜 안 깨나는지 원인을 모른다고 했다. 깨어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혹은 깨어나서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휘저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잠깐이라도 출근을 해야 한다는 도윤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나온 그의 표정은 온종일 어두웠다. 회사에 도착해 회의를 진행하면서도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진서하’라는 이름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으니까.
황급히 회의를 마치고 다시금 병원으로 향하려던 그의 재킷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우세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다급한 도윤의 목소리에 그의 눈매가 매섭게 올라갔다.
“말해.”
제가 없을 때 서하의 옆에 있으라고 남겨둔 도윤이었기에 그의 신경이 더 날카롭게 섰다.
-서하 씨, 깨어났어!
그 소리에 다물린 입술 새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깨어났다니.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툭 떨어졌다.
“깨어났다고?”
-응, 그런데….
주춤거리던 도윤이 나지막하게 말을 이었다.
-기억을 못 해.
“뭐?”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해. 이름도, 나이도. 의사는 검사해봐야겠다는데…. 아무튼 지금 검사하러 갔으니까 곧 결과 나오겠지.
이름도, 나이도 기억을 못 한다니. 다시금 핸들을 붙잡으며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기다려. 갈 테니까.”
통화를 끝낸 그가 그대로 액셀을 밟았다. 당장, 어서 빨리 그녀가 깨어난 모습을 보고 싶었다.
* * *
도윤이 힐끔거리며 누워있는 서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의 시선이 도윤에게 향했다.
“저…….”
그 말에 깜짝 놀란 도윤이 황급히 답했다.
“네, 네?!”
“그쪽은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절 보는 서하를 보며 도윤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지금 오는 사람이 잘 알 거예요. 우세헌이라고. 서하 씨랑은 아주 긴밀했던 사이죠.”
“…긴밀했던 사이요?”
“뭐라고 해야 하지, 썸 탔던 사이?”
“썸…?”
“아니… 아 설명하기가 힘드네.”
다시금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곤란해하던 도윤이 화제를 돌렸다.
“다른 건 궁금한 건 없어요?!”
“아…. 다른 사람들은 없나요? 가족이라든가…….”
궁금했다. 그녀가 깨어나서 지금까지 병실에서 본 사람이라고는 도윤이 유일했으니까.
“그게…….”
더 곤란해졌다는 듯 가만히 서하를 바라보던 도윤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뭐,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이니 말씀드릴게요.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네.”
“가족이 있긴 한데…. 그 가족들이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진서하 씨 버리고 도망갔어요.”
“…버리고 갔다고요?”
그녀가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도윤을 바라봤다.
“네. 그쪽, 새엄마랑 이복 언니가 완전 악질이었거든요. 서하 씨 내버려 두고 빚쟁이들 몰려올까 봐 새벽 비행기로 해외로 도피했어요. 연락은 안 되는 상황이고요.”
“…하.”
눈을 뜨자마자 들은 드라마틱한 사실에 서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니,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아무 기억도 없는 탓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짧게 심호흡을 한 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저는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예요?”
“서하 씨, 강원도에 잠깐 내려가 있었거든요. 가족들 떠났다고 하니까 놀라서 본가로 간 것 같은데…. 본가에 빚쟁이들이 몰려 있었거든요.”
눈치를 보며 도윤이 말을 이었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저랑 세헌이가 도착했을 때, 서하 씨는 피 흘리고 쓰러져 있었어요. 바로 병원으로 옮겼는데 며칠 깨어나지 않다가 오늘 깨어난 거고요.”
“아…. 은인이었네요.”
“뭐….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저보다는 세헌이한테 고맙다고 해주세요. 세헌이가 마음고생 많이 했으니까.”
우세헌. 서하가 머릿속으로 세헌의 이름을 되뇌었다. 깨어난 후부터 모든 게 낯선 그녀였지만 오직 그의 이름만큼은 낯설지 않았다.
“긴밀한 사이라고 했나요…? 그…. 우세헌이라는 분이랑.”
“네. 뭐, 두 사람의 일이니 제가 자세하게는 설명 못 하지만.”
“감사해요.”
“뭘요. 이 자식은 올 때가 됐는데 왜 안 오는 거야.”
도윤이 휴대폰을 꺼내며 중얼거리던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우세헌! 왔어?”
한 톤 밝아진 도윤의 목소리에 서하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강인하고도 날카로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
‘저 사람이… 우세헌…….’
그의 뜨거운 시선이 올곧게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그 시선에 민망한 듯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왜 운 거지.”
그의 입술에서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상황을 설명해줬는데…. 그랬더니 울더라고…. 서하 씨, 여기는 아까 말했던 우세헌! 이라는 친구고…. 아무튼…! 이야기 나눠요. 세헌아, 그럼 난 가볼게. 필요하면 전화하고!”
벗어놓은 재킷을 챙겨 든 도윤이 서둘러 병실 밖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병실을 묵직하게 울리자 그녀가 멈칫하더니 세헌을 바라보았다.
“아…….”
머뭇거리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자 세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찮은 건가.”
서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요함과 의심이 섞인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정말 서하가 기억을 잃은 것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가만히 세헌을 올려다보자 세헌이 침대 앞에 있는 의자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내 의자에 앉은 그가 긴 다리를 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네.”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아?”
의심이 섞인 그의 질문에 괜히 억울했다. 긴밀한 사이였다면 자신을 잘 알 텐데 믿지 못하는 것처럼 묻는 그의 행동에 서운함이 몰려왔다.
이상했다. 기억에 없음에도 그의 말에 자신이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아무것도?”
“네…. 이름도, 나이도…. 아무것도요.”
세헌을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정말…. 저 버림받은 건가요? 가족들이 절 버리고 도망가서…. 제 옆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 건가요…?”
그의 판판했던 미간이 단숨에 좁아졌다.
“그럼 전 어떻게 되나요…?”
가만히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고 싶냐는 물음에 그녀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신세에다가 기억까지 잃었는데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서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도윤이 긴밀한 사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염치없는 거 알지만…. 도와주세요.”
두려웠다.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상황에서 서하에게는 세헌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질 않아요…. 그래서 무서워서 그래요…. 아까 계시던 분이 저랑 긴밀한 사이셨다고…….”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와 정말 긴밀했던 사이라면 기억을 잃은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서하는 생각했다.
“절 아신다면서요…. 그러니까 기억이 날 때까지만…….”
가만히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난 뭘 얻지?”
“아…….”
뭘 얻냐니. 도와주겠다는 말도 아닌 뭘 얻냐는 그의 말에 서하는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세헌이 말했다.
“이유 없는 적선은 하지 않는 주의라.”
그가 건조하게 내뱉은 말에 서하의 눈에 근심이 서렸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할게요…….”
세헌의 눈가가 일순간 커지더니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민망할 정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세헌이 단호한 얼굴로 목소리를 냈다.
“좋아. 오늘부터 내 집에서 생활해.”
세헌이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라는 말에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구해준 것도 모자라서 삼 일 내내 병실을 찾아온 그가 자신을 해코지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서하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물었다.
“정말로 내 집에서 생활하겠다고?”
“네.”
오히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막연한 두려움이 앞선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지금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의 마음이 변할라 서하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감사해요. 나중에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갚을 필요 없어.”
“…네?”
세헌의 두 눈이 조용히 그녀를 담았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서하의 마음이 일렁거렸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여 소리를 냈다.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