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띠링. 어스름한 새벽녘, 서하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났다. 연락 올 곳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늦은 오후가 돼서야 메시지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네 아버지 회사가 넘어갔다. 그래서 네 아버지랑 나랑 다미는 오늘 새벽 비행기로 떠난다. 언제 올지는 모르겠고, 그 나이 정도면 혼자 잘 살 수 있겠지? 그럼 잘 살고 있으렴.]
메시지를 몇 번을 확인하고 나서야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설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디 제가 본 메시지가 거짓이기를 바라면서.
-이 번호는 당분간 착신이 금지된….
다미와 경호의 휴대폰으로도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설영과 똑같은 기계음이 반복될 뿐이었다.
“하…….”
그제야 확실해졌다. 가족들이 자신을 버리고 해외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부정했다.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날 리가 없다며.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서하가 정신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머릿속은 점차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쉽게 버려질 수 있는데 그동안 자신이 너무 붙잡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끈을.
짐을 싸고 택시를 부른 그녀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캄캄한 밤이 돼서야 집 앞에 도착한 서하는 서둘러 짐을 챙겨 택시에서 내렸다.
오늘따라 고요하면서도 정적만이 흐르는 집을 바라보던 그녀가 천천히 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집안에서 들려왔다.
“홍설영, 이 여자!! 가만 안 두겠어!”
“하루아침에 이렇게 사라지다니…!”
그 소리에 홀린 듯 집안으로 들어선 서하는 믿기 힘든 광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미 한차례 폭풍우가 지나간 듯 난장판이 된 집안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멍하게 서 있는 서하를 발견한 한 중년 여성이 외쳤다.
“너…! 이 집 딸 맞지?!”
중년 여인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서하에게로 향했다.
“맞네! 그 철없다던 막내딸!”
단숨에 서하의 멱살을 잡은 여인이 소리쳤다.
“그 여자 어디 갔어! 홍설영. 너 알고 있지? 어디 있는지?”
“전, 전 아무것도…….”
“뭘 아무것도 모른다야! 내 돈 내놓으라고!”
“아윽, 놓고 말하세요. 저도 지금 와서 아무것도…….”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이 중년 여인을 말리며 말했다.
“신 사장님, 우선 놓고 말해요! 말할 기회는 줘야지.”
그 말에 서하의 멱살을 잡았던 것을 거칠게 놓으며 중년 여인이 입을 열었다.
“말해봐! 이 집 식구들 어디로 도망간 건지!!”
서하가 목을 매만지며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정말…. 전 모르는 일이에요. 저도 이야기 듣고 놀라서 온 거예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럼 홍설영이나 진 대표한테 이야기 들었겠지!”
“저는 떠난다는 메시지만 받았을 뿐이에요.”
“메시지? 봐봐!”
흥분한 중년 여인이 서하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뭘 잠깐만이야! 당장 휴대폰 내놓지 못해?!”
날카로운 여인의 외침에 서하가 눈가를 찡그리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딜 도망가!”
눈알에 핏줄이 서도록 흥분한 여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서하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그 탓에 서하의 몸이 휘청거리다 이내 중심을 잃었다.
“아…!”
뒤로 넘어가던 서하의 머리가 소파 옆으로 놓인 협탁에 부딪히는가 싶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한 번 더 튕겨졌다. 쓰러진 그녀의 관자놀이로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피…. 피가 나잖아?!”
“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과 웅성거림이 섞여서는 서하의 귓가에 왕왕 울렸다. 공황상태인 사람들과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그녀는 편안해져만 갔다.
‘하. 난 왜 마지막까지 이럴까.’
흐릿해져 가는 천장을 보며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이던 그녀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 * *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 가득 초조함이 흘렀다.
“별일 없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도윤의 말에 그가 날카롭게 말을 내뱉었다.
“없어야지.”
서하가 강원도에서 진성 건설 본가로 출발했으며, 그 본가에는 설영에게 돈을 빌려준 빚쟁이들이 몰려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차에 탄 그였다.
이렇게나 초조한 적은 없었다. 서늘한 기운이 그의 목을 옥죄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에게 모진 말을 하고 떠났을 때도, 다른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도 이렇게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진성 건설은 어차피 세헌이 인수 중이었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집안에서도 그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혼자만 두고 떠났다고 했지.”
싸늘하게 내려앉은 음성에 운전석에서 룸미러로 그를 흘끗 보던 도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급했나 봐. 어제 새벽 비행기로 말레이시아로 출국했더라고. 새엄마랑 이복 언니는 그렇다고 쳐도 진 대표는 어떻게 친딸을 버리고 갈 수 있냐.”
“그 여자가 꾸몄겠지. 진 대표가 버리고 갈 사람은 아니야.”
“그래도! 홍설영, 그 여자는 정말 최악이네.”
그녀가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기야 집안에서는 그녀를 이용하려고만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자 더 걱정됐다. 혹시나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나쁜 마음이라도 먹은 건 아닐까 하고.
어차피 비리로 공중분해 될 진성 건설이었고 그 시간을 그가 조금 앞당긴 것뿐이지만 이 때문에 그녀가 망가질까 봐 두렵기도 했다.
“도착할 때 됐지.”
그의 물음에 도윤이 내비게이션에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응, 3분 남았어. 3분.”
3분. 고작 3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나 길 줄이야. 세헌이 목을 옥죄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 끌어 내렸다.
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그가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부디 제가 걱정하는 일이 없기를 되뇌며 그의 구두가 거침없이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정원을 가로질러 그녀의 집 안에 도착할 무렵, 이상할 정도로 활짝 열린 현관 사이로 중년의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119 불렀으니 전 가볼게요, 난 모르는 일이니!!”
“신 사장이 책임져야지! 신 사장이 밀었잖아!”
“몰라! 몰라! 나도 피해자라고!!”
사색이 된 얼굴로 서둘러 뛰쳐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상함을 느낀 그가 빠르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를 흘리며 쓰려져 있는 그녀였다.
“진서하!”
고저 없던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은음을 냈다. 단숨에 그녀를 품에 끌어안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진서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음에도 그녀의 닫힌 눈꺼풀은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녀리게 흩어지는 그녀의 숨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았다. 그가 서둘러 그녀의 상처 난 곳을 살폈다. 관자놀이부터 두피 안쪽까지 찢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볼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손수건을 꺼내서는 상처를 지혈하며 서하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수많은 감정을 최대한 눌러 내리며 그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중년 여인이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내가 한 짓이 아니라…! 신 사장이 돈 내놓으라고 실랑이하다가…!”
언제 알았는지 득달같이 달려온 빚쟁이들이었다. 여인의 말에 언제 뒤따라온 것인지 그의 뒤에 서 있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아니, 사람이 다쳤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119 불렀잖아요!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머리 살짝 부딪힌 거라 피만 나고 기절한 거지…. 별거 아닐…….”
선득한 눈빛이 중년 여인에게로 향했다.
“피가 나는 게 별거 아니라고?”
위압감이 서린 그의 목소리에 중년 여인이 뒷걸음질 쳤다.
“내 잘못 아니라니까! 떼인 돈도 억울해 죽겠는데…!”
“잠깐만요! 상황 설명은 제대로 해주고 가셔야죠!”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중년 여인을 도윤이 막아섰다.
“무슨 상황! 아니 홍설영이가 우리 돈 들고 날랐는데!”
“사람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몰라! 다 홍설영 때문이야!”
“지금 그게 말이라고…!”
세헌이 흥분한 도윤을 불러세웠다.
“배도윤. 119 언제 오나 확인해봐. 아니,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겠어.”
“… 후, 알았어.”
그가 서하를 안아 들기 무섭게 여인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너무하네, 진짜. 사람이 쓰러졌는데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도윤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던 찰나 집 밖에서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세헌은 서하를 안아 들고 밖으로 향했다.
부디 아무 일이 없길 바라며 구급차로 향하는 그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