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서하가 강원도로 내려간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녀가 강원도로 내려간 뒤, 설영은 하루하루 즐거웠다. 하지만 다미는 눈엣가시였던 서하가 없어진 건 좋았지만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어진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듯했다.
“걔 언제 올라온대?”
다미의 물음에 흥얼거리던 설영이 답했다.
“왜? 없으니까 좋기만 한데.”
“그 계집애 없으니까 심부름을 시킬 사람이 없잖아.”
“곧 올 거야. 다음 주에 상견례잖니.”
“그러니까 더 필요하지. 상견례 때 입을 옷이랑 가방, 신발 다 사야 하는데.”
“언제까지 걔한테 맡길 수는 없으니 이제는 다미, 네가 사. 엄마가 같이 가서 골라 줄게.”
그 말에 다미가 입을 샐쭉했다.
“엄마랑 가면 내가 짐을 들어야 하잖아. 나 짐 드는 거 질색인데.”
“어머, 우리 딸이 짐을 왜 들어. 아빠 회사 비서나 운전기사 데리고 가면 돼.”
“정말?”
“그럼. 아니, 이참에 내가 비서 한 명 얻어야겠네. 어차피 회사에 이사로 등록되어 있으니.”
경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설영이 휴대폰을 들었다.
“좋다! 앞으로 엄마 비서 다 시키면 되니까. 걔 시집가 버리면 누구 시키나 고민했었는데!”
“그래. 네 아버지한테…….”
때마침 설영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액정을 쓸어 통화 버튼을 누른 설영이 귓가로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당신? 마침 나도 당신한테 전화하려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던 설영의 낯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뭐, 뭐라고요?! 기다려요, 당장 내가 회사로 갈 테니까!”
전화를 끊은 설영의 손이 덜덜 떨렸다. 갑자기 달라진 설영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다미가 물었다.
“왜, 엄마.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어서 빨리 회사로 가봐야겠다.”
“회사? 왜?!”
다미의 물음에 답도 하지 않고는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시가 다급했다. 서둘러 겉옷과 가방을 챙기던 설영이 다미를 향해 말했다.
“택시, 택시 좀 불러!”
다급한 설영의 목소리에 덩달아 다미까지 급해졌다.
“알았어!”
안절부절못하며 현관으로 향하는 설영을 뒤쫓으며 다미가 말했다.
“엄마, 내가 같이 갈까?”
“아니야. 여기 있어. 엄마 다녀올게.”
“엄마, 무슨 일…!”
쾅 소리를 내며 닫힌 현관을 보며 다미가 인상을 구겼다.
“뭔데 저러는 거야, 정말. 아 몰라, 쇼핑 목록이나 짜야지.”
자신은 관계없는 일이라는 듯 돌아서는 다미의 얼굴은 언제 심각했냐는 듯 웃음이 가득했다.
한편, 밖으로 나온 설영은 대문 앞에 서 있는 택시에 바로 올라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던 설영은 조금 전 경호와 통화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조사가 나왔다고 했다. 입찰할 때 금품 제공을 한 것과 업체들한테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면서.
“왜, 왜. 절대 들킬 리가 없는데.”
창백한 표정으로 초조하게 시간 가는 것을 바라보던 설영이 택시 기사를 향해 외쳤다.
“빨리 좀 가주세요, 급해요!”
“빨리 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빨리 가면 사고 나요.”
“사고 나든 말든, 지금 내가 급하다니까?”
설영의 말에 택시 기사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액셀을 밟았다. 이미 빠른 택시의 속도에 점차 가속도가 붙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진성 건설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이것 봐,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으면서! 자, 받아요! 잔돈은 필요 없어요, 쯧.”
기사를 향해 돈을 집어 던지듯 낸 설영이 서둘러 택시에서 내렸다. 뛰어가듯 발걸음을 옮기던 설영이 멈칫하며 제자리에 섰다.
“아무리 급해도 사람이 품위는 지켜야지.”
옷매무새를 툭툭 털며 그녀가 천천히 진성 건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사님 오셨습니까!”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직원들을 향해 설영이 품위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고는 있었지만 설영의 마음은 급했다.
‘빨리 일들이나 하지, 뭔 인사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거야.’
속으로 혀를 차던 설영을 누군가 불렀다.
“사모님!”
경호의 비서였다. 그가 설영을 발견하고는 뛰어오더니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올라가시죠.”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 비서를 향해 설영이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아유, 이이는. 내가 보고 싶은 걸 이렇게 티를 낸다니까.”
그 말에 비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직원들은 호응을 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들 해요.”
설영이 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비서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알아요.”
“대표님께서 크게 충격받으셨습니다. 왜, 사모님께서 그런 일을 벌이신 건지…….”
“비서가 말이 많네.”
설영이 고개를 들어 비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런 건 윗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거지 아랫사람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아니에요. 비서면 비서답게, 선 지켜야지?”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는 설영을 보며 비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설영이 대표실 문을 열자마자 경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대체…!”
“내가 뭐요! 회사 잘되라고 한 것뿐인데.”
“뭐…? 회사 잘되라고? 돈을 그렇게 받아먹고 그런 말이 나와? 게다가 회삿돈을 맘대로 써? 그거 범죄인 거 당신 알고서 한 거야?”
설영이 놀란 듯 목소리를 냈다.
“어머! 우리 회삿돈을 우리가 쓰는데 무슨 범죄예요?”
상식 밖의 대답에 경호가 기가 막힌 듯 숨을 터트렸다.
“하…….”
“그 돈 내가 쓰려고 했나? 회사 잘되라고 돈 좀 받고, 주고 한 거로!”
“그게… 범죄라고!”
비틀거리던 경호가 털썩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지금 얼마나 심각한 줄 알아…? 입찰 금품 제공에다가 업체들한테 돈 받았다는 거 내일이면 뉴스로 쫙 나올 거야. 진성 건설 비리 저질렀다고, 수사도 들어오겠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며 경호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려 들 거고 회사는 부도나겠지.”
“뭐, 뭐라고요? 부도…? 회사가 부도가 난다고요?!”
“그래. 아니지, 지금도 부도 위기지. 업계에는 소문이 나기 시작한 건지 투자자들한테서 지금 전화가 빗발치고 있으니…….”
아까부터 경호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하며 전화가 끊이질 않던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아니! 우리 회사가 이렇게 큰데! 이렇게 쉽게 부도가 난다고요? 고작 돈 좀 주고받았다는 걸로?!”
고작 돈 좀 주고받았다니. 경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돈을 주고받았다니! 당신이 한 짓은 횡령이고 배임이야. 아무리 탄탄한 회사라도 무너트릴 수 있는 범죄라고!”
망연자실한 얼굴로 경호가 말했다.
“곧 경찰들이 들이닥칠 거야.”
설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아니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횡령이니 배임이니…. 그런 건.”
설영의 머릿속에 갑자기 기업 대표들이나 회장들이 횡령을 했다느니, 배임을 했다느니 하면서 징역을 선고받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아니, 나는 회사가 잘되라고…….”
“당신…. 회삿돈도 가져갔다며. 비서한테 알아보니 10억 가까이 되는 거 같은데. 그 돈 다 어디다 쓴 거야. 다 입찰할 때 준 건 아닐 거 아니야.”
“그게…. 나도 좀 쓰고… 다미도 좀 주고…….”
“뭐라고?!”
경호의 호통에 깜짝 놀란 설영이 말했다.
“얼마 안 썼어요! 우리는! 다 입찰할 때 쓴 거지!”
가망이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는 경호를 향해 설영이 다가섰다.
“여보, 나 감방 가는 거예요? 이럴 수는 없어요. 나는 다 우리 진성 건설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요.”
“지금 그게 중요해? 벌은 받더라도 지금 회사가 부도나면 날 믿고 함께해준 직원들은 어쩔 거야. 그 가족들은 또 어떻고…….”
자책감에 울먹이는 경호를 보며 설영이 앙칼지게 외쳤다.
“지금! 직원들 걱정할 때에요?! 우리가 죽겠는데?”
“…뭐?”
“이대로 나 감방 가기 싫다고요! 그래, 그래요! TV에서 보니까 도피하던데. 우리 잠시 해외로 도피해 있어요.”
“…하. 당신 그게 할 말이야?”
“그럼 어쩔 거예요?! 나 징역 살게 내버려 둘 거예요? 그럼 우리 다미는요!”
“다미?”
“서하도 마찬가지예요! 이제 결혼하려는 애인데 엄마가 징역 살면 좋겠어요?! 알잖아요, 서하. 애정 결핍 심한 거.”
경호의 눈동자가 엷게 흔들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설영이 말을 쏟아냈다.
“서하가 나한테 얼마나 의지하는지 모르죠? 서하가 병적으로 사람들과 같이 있으려고 하는 것도 나랑 살고 나서 나아진 거잖아요!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서하가 가만히 있겠어요?!”
굳게 닫혀 있던 경호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도…. 떠날 수는 없어. 회사를 지키고 벌은 받아야지…….”
죄를 지은 것은 벌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회사가 무너진다면 그 많은 직원들은 한순간에 직장을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될 테니까. 어쩌면 대표로서 경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막막했다. 이미 투자자들은 돈을 회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고 동종업계에는 소문이 났다. 생사의 기로에 선 상황이었다.
경호가 절망감에 휩싸여있을 때, 다시금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분명 투자자들의 전화일 것이 분명하기에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반사적으로 경호의 시선이 휴대폰으로 향했다.
투자자들이 아니었다. 액정 위에 뜬 이름에 경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뭔가에 홀린 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아든 경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나긋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진 대표님. 상황이 상황이라 못 받으실 줄 알았습니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남자. 경호에게 전화를 건 남자는 다름 아닌 세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