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20화 (21/70)

20화

* * *

경호의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서하는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아주 긴 여정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했던 차는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한적한 시골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서하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향했다. 높은 담벼락에는 초록빛 넝쿨이 감싸고 있었고 노란색 대문은 새로 칠한 건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담벼락 위로 슬쩍 보이는 단독주택의 모습에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린 그녀의 앞에 운전기사가 짐을 내려놓았다.

“2주 뒤에 뵙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차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서하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서하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중년 여성이 반갑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서하 맞지?”

“아, 네. 맞아요.”

“기다리고 있었어. 나 누군지 기억 안 나지? 모르나? 유선이 이모야. 네 엄마 중고등학교 동창이지.”

서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엄마 친구분이세요?”

“그래. 반가워. 나는 유선이 이모라고 부르면 돼. 엄마랑 똑 닮았네. 예쁘게 컸어.”

유선이 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진 대표님 부탁받아서 이 집 관리하고 있었거든. 이번에 인테리어랑 보수까지 싹 해놔서 별장으로 쓰기에 좋을 거야.”

유선이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더니 노란색 대문을 열었다.

“이거는 대문 열쇠야. 바로 근처에 우리 집 있고 다들 동네 사람들이라 위험한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여자 혼자 있으니 항상 문단속 잘해야 해.”

“네.”

끼익. 대문을 열자 아담하면서도 탁 트인 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 서하를 보며 유선이 웃음을 터트렸다.

“예쁘지? 너 온다고 신경 많이 썼어. 아, 할머니가 일구시던 텃밭은 놔뒀어. 상추, 고추, 깻잎….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따먹어. 저쪽에는 사과나무랑 감나무도 있고.”

나란히 마당을 가로지른 두 사람이 현대식으로 지어진 한옥 앞에 섰다. 탁 트인 대청마루가 정겨워 보였다.

“진짜 옛날 집 같아요.”

서하의 말에 유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오래된 한옥이었는데 네 엄마 살아있을 때, 현대식으로 한 번 싹 수리했거든. 근데 이번에 너 온다고 한 번 더 손봤어. 불편하지 않을 거야.”

“감사해요.”

“감사하긴, 네 엄마 친구로서 이 정도는 당연하지.”

유선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네 엄마가 너 가졌을 때 얼마나 행복해했는데. 입덧이 너무 심해서 여기에 내려와 있었거든? 친정 음식 먹으면 입덧이 덜 해질까 봐. 그런데 와서도 아무것도 못 먹는데도 너 가진 게 좋다고 매일 떠들어댔어.”

회상을 하는 듯 추억의 잠긴 얼굴로 유선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딸, 안아보지도 못하고.”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던 유선이 서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잘 커 줘서 내가 다 고맙네. 고생했어, 서하야.”

고생했다는 말에 서하의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던 것을 유선이 알아준 것 같아서 시큰해진 그녀의 눈이 이내 뿌옇게 흐려졌다.

“아니에요…….”

눈물을 참아내려는 듯 서하가 말을 돌렸다.

“아, 안으로 들어가 봐도 돼요?”

“그럼. 이제는 네 집인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하가 문을 열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안쪽의 모습은 전통적인 한옥의 모습을 한 겉과 다르게 세련된 현대식이었다.

“예쁘지?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천천히 둘러봐. 아 참! 장도 다 봐서 냉장고랑 부엌에 채워놨으니까 혹시 모자라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 냉장고에 내 번호 적어놔서 붙여놨어.”

“네!”

“천천히 구경해. 나는 이만 가볼게,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참, 우리 집은 바로 옆에 있는 초록색 대문이니까 매일 놀러 와도 상관없어.”

생긋 웃어 보이고는 유선이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그녀가 천천히 집안을 훑었다.

모든 것이 새것으로 꾸며졌지만, 집 안 곳곳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와…. 엄마가 썼던 거겠지?”

그녀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짐 정리해야겠다.”

거실에 캐리어를 펼쳐놓은 그녀가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옷가지들을 정리하던 그녀가 네모반듯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조심스럽게 연 상자에는 굽이 부러진 새하얀 구두가 들어있었다.

“외할머니가 주신 구두인데…….”

자신과 엄마의 발사이즈가 똑같다며 좋아하시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서하가 애틋하게 구두를 매만졌다. 그녀가 부러진 구두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마치 맞춘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구두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진작 꺼내 신어볼걸.”

미리 꺼내서 신었더라면 다미가 망가트리지도 않았을 거라며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뱉던 서하는 구두를 벗어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괜찮아. 여기는 아무도 없어.”

그토록 애정을 갈구하고,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바라며 살아왔던 서하였지만 오늘따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괴롭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공간.

그녀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잘 지내보자, 2주 동안.”

* * *

뻐근하게 아파져 오는 눈두덩이에 세헌이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는 미간을 문질렀다. 며칠 내내 자신의 회사 운영은 물론이고 진성 건설의 비리까지 파헤치느라 그는 지칠 때로 지친 상태였다.

“후.”

잠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매달리는 그를 향해 도윤이 적당히 하라며 말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서하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뭐라도 해야 했으니까.

타이밍 좋게 대표실의 문에서 둔탁하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도윤이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헌아…….”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는 도윤을 향해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게…. 진서하 씨 있잖아.”

서하의 이름에 세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진서하가 왜.”

“지금 강원도에 있다는데?”

강원도라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거긴 왜.”

“자세한 건 모르겠고 붙여놓은 사람 말로는 친인척? 집인 것 같다고 하고…. 혼자 있다고 하던데?”

“혼자 있다고?”

“응.”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입을 열었다.

“어디야.”

“어?”

“어디냐고. 주소.”

그 말에 도윤이 휴대폰을 꺼내 들고는 중얼거렸다.

“강원도 횡성 갑천면… 병지방리…….”

“내 휴대폰으로 보내놔.”

정장 재킷을 집어 들고 차 키를 챙기는 세헌을 향해 도윤이 말했다.

“야, 설마 너 지금 강원도 내려가려고?!”

“응.”

“잠깐! 이따 오후에 회의 있는 거 몰라?”

“따로 보고해.”

“야, 우세헌!”

대표실을 박차고 나가던 그가 멈칫하며 다시금 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아봐.”

“어? 뭘?”

“진서하가 왜 강원도로 내려간 건지.”

“알겠어, 야, 야! 우세헌! 진짜 가냐…? 아오, 내가 또 회의에 대신 들어가야 하잖아.”

도윤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세헌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편, 주차장으로 바로 향한 세헌은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왜 혼자 거기 가 있는 거야.”

다른 곳도 아닌 강원도 시골에 혼자 내려가 있다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거칠게 액셀을 밟는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혹여 서하가 무서움에 떨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됐다.

“제길.”

액셀 위에 올려진 발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기다려.”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핸들을 잡은 세헌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흘렀다.

세헌은 휴게소 한 번 들르지 않고 한참을 달렸다. 서하를 생각하면 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서하가 집에서부터 도착지까지 서너 시간이 걸렸다면 세헌은 고작 두 시간 만에 그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온 안내음에 그의 시선이 차창 너머로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집 한 채가 보였다. 파릇한 넝쿨이 감싼 담벼락과 노란색 대문, 그리고 담벼락 위로 빼꼼 보이는 기와가 아담하면서도 예뻤다.

“저기인가.”

세헌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던 찰나 노란색 대문이 열렸다.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얼굴에 그가 숨을 죽였다.

그녀였다, 진서하. 그릇을 들고나온 그녀가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뭐 하는 거지.”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서하가 그릇을 내려놓고는 무언가를 부르는 듯하더니 어디선가 노란색 고양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녀가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나자 고양이가 경계하는 듯 천천히 다가와서 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밥을 주는 건가.”

서하가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세헌의 입가도 부드럽게 휘었다.

“귀엽긴.”

고양이가 밥 먹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그 모습에 세헌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나 자신을 알아보지는 않을까 하고. 만약 알아본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서하의 고개가 순식간에 휙 돌려졌다.

“이모!”

반가운 얼굴로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는 서하를 따라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세헌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년 여성. 중년 여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서하가 그녀를 데리고 대문 안으로 향했다.

“억지로 온 건 아닌 것 같네.”

행복하게 미소를 짓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세헌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하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얼굴을 보았다는 것에 그는 만족했다.

“그래. 그렇게 기다리고 있어.”

서하가 사라진 대문을 바라보며 세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세헌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뜨지 못한 채 차 안에서 그녀가 사라진 대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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