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9화 (20/70)

19화

* * *

울릴 리 없는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혹시나 세헌이 아닐까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든 서하는 액정에 뜬 발신자를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빠…?”

경호가 그녀에게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여보세요.”

-서하냐.

“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경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이 점심 한 끼 하자꾸나.

갑작스러운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서하에게 경호가 말을 이었다.

-엄마나 언니한테는 말하지 말고, 혼자 조용히 나오거라. 기사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다.

“아, 네.”

혼자 조용히 나오라니. 뚝 끊긴 통화에도 의아함을 감출 수 없던 서하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호가 무슨 말을 할지 두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들뜬 서하였다.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이었다. 경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그녀가 방문을 나섰다. 혹여 나가는 길에 설영이나 다미를 마주치지는 않을까, 어딜 가냐고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걱정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밖에 나가고 없었다.

대문을 나서자 검은색 세단에서 경호의 운전기사가 인사를 건넸다.

“타시면 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얼른 뒷자리에 올라탔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녀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따스한 햇살이 차창 안쪽까지 내리비쳤다. 그 따스함에 서하가 조금 더 느끼려는 듯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멈춰 섰다. 스르륵 눈을 뜬 서하를 향해 기사가 말했다.

“식당 안쪽에서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님을 향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는 차에서 내린 서하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관의 중식당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서하가 초등학교 입학식 때, 경호와 단둘이 왔었던 식당이었다.

“기억하고 계시는 건가?”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서하가 식당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유난히 힘찬 그녀의 발걸음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가벼웠다.

“예약하셨나요?”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직원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일행이 있어요. 먼저 와 계신다고 들었는데.”

“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서하를 데리고 식당 안쪽 깊게 자리 잡은 방으로 향했다.

“들어가세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자리에 앉아 있는 경호의 모습이 보였다.

“어서 와라.”

반갑게 저를 맞이하는 경호를 보며 서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빠.”

“그래, 어서 앉거라.”

그녀가 자리에 앉자마자 경호는 직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점심 코스로 시켰는데 괜찮으냐.”

“네, 좋아요.”

찰나의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민망하고도 어색한 분위기에 서하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상견례가 2주일 뒤라고 들었는데…….”

정적을 깬 경호의 말에 서하가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결혼식은 석 달 뒤라고?”

“네.”

이번엔 경호가 찻잔을 들었다. 목을 축인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너무 빠르진 않고?”

걱정이 묻어나는 말에 서하의 입가가 희미하게 휘었다.

“괜찮아요.”

“혹시나, 혹시나 말이다.”

뜸을 들이던 경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집안을 위해서 억지로 결혼하는 거라든가, 만약 그런 거라면 안 해도 된다.”

“아빠…….”

“급하지도 않은데 그리 급하게 할 필요 없어.”

경호의 표정이 단호했다.

“네가 원하는 결혼이라면…. 하는 거지만 말이다.”

서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결혼은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고. 설영과 다미가 강제로 시킨 것뿐이라고.

그녀가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자신만 참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이 상황이 답답하다 할 수 있겠지만 설영과 다미의 지속된 가스라이팅이 서하를 완전 바보로 만들었다.

괜히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도 않다고, 그저 수긍하기만 하면 편해질 거라는 서하의 생각 또한 모두 설영과 다미의 학대로 비롯된 것임을 안타깝게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괜찮아요.”

경호가 잠시 서하를 바라보더니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네가 괜찮다면 다행이구나.”

테이블 위로 식사가 놓이기 시작했다. 잔뜩 차려진 상 위를 바라보는 서하를 향해 경호가 말했다.

“먹자.”

식사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앞에 있는 음식을 비워나갔다. 빈 접시들이 하나둘 생기고 두 사람 다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쯤, 직원이 들어와 테이블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깨끗해진 상 위로 후식이 놓였다. 과일 몇 조각이 담긴 접시가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놓였다. 서하가 포크를 들려는 찰나 경호가 자신의 옆에 두었던 서류 봉투를 꺼내 들었다.

“받아라.”

경호가 서류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 쪽으로 쓱 밀었다.

“이게…. 뭐예요?”

“장모님, 그러니까 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집이다. 네 친엄마도 거기서 살았었고.”

외할머니의 집이라니. 게다가 친엄마도 살았다는 말에 서하가 놀란 눈으로 서류 봉투를 바라봤다.

“처분하려다가 혹시나 몰라서 몰래 가지고 있었어. 엄마나 언니는 모를 거다.”

그녀의 작게 떨리는 손이 봉투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자 등기권리증이라고 적힌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경호가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건 네 엄마나 언니 허락을 받지 않아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널 주려고 남긴 거라고 하면 되니…. 받거라.”

“…아빠.”

서하가 가만히 경호를 바라보았다. 뜻밖의 선물에 크게 감동한 그녀였지만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들을 모두 없었던 일로 하기에는 상처 받은 기억들이 너무 컸다.

경호는 철저하게 집안에서 방관자였으니까.

‘왜 이제야….’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는 건지.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가 다시 시선을 등기권리증으로 옮겼다.

“관리하는 사람보고 깨끗하게 수리해놓으라고 했다. 언제든 내려가서 쉬어도 좋아.”

“…언제든요?”

“그래, 언제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하가 입을 열었다.

“내일.”

“내일?”

어차피 상견례까지 2주가 남은 시점이었다. 그동안 집에 있어봤자 설영과 다미에게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이 상황에서 친엄마와 외할머니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이라니. 서하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즉흥적으로 입이 움직였다.

“내일 가볼래요.”

“그렇게 갑자기…….”

“상견례하기 전에 조용한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경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가 아주 어렸을 때를 빼고는 경호가 그녀에게 뭔가를 해준 것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설영에게 그녀를 맡겨놓고 자신은 일에만 집중했다.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점차 흘러가고 밝았던 서하의 모습이 점차 어두워질 때도 경호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설영의 등쌀을 피하고 싶었고 가정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경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하에게 아버지 노릇을 하고 싶었다.

“그래, 네가 편하고 싶은 대로 해.”

“고마워요, 아빠.”

서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미소를 본 경호도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식사 자리는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서하는 지난밤에 싸놓은 캐리어를 꺼냈다. 며칠만 자고 올 생각으로 짐을 쌌지만, 이것저것 넣다 보니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랐다.

“후.”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현관으로 옮기는 서하를 보며 설영과 다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상견례가 고작 2주밖에 안 남았는데. 당신, 무슨 생각으로 허락한 거예요?”

앙칼지게 묻는 설영을 향해 경호가 답했다.

“차라리 지금 가서 쉬고 오면 좋지. 상견례 끝나면 결혼 준비로 바쁠 것 아니야.”

“그래도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설영이 경호를 흘기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나한테 미리 상의하고 정해요! 알겠어요?”

“…알겠어.”

여전히 분이 안 풀리는 건지 입을 악다문 얼굴로 설영이 고개를 돌렸다. 서하를 향해 다가간 설영이 그녀만 들릴 수 있도록 속삭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얌전히 있다가 올라오렴.”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잘 다녀오렴.”

“…네.”

그 말을 끝으로 서하가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설영과 다미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붙어있으려고 한 집이었다. 혹시나 자신을 집에서 내쫓지는 않을까 불안감에 살았던 서하였다.

하지만 지금,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그동안 불안감에 시달리며 집에 집착했던 것과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편안했다.

“2주…….”

상견례까지 남은 시간은 딱 2주였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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