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 * *
도민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서하는 그대로 방에 틀어박혔다.
“세헌 씨…. 충격받은 얼굴이었지.”
아직도 생생했다. 제 자리 멈춰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세헌의 모습이. 짧은 찰나였음에도 그와 눈을 마주했을 때, 서하는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찰나 그녀는 시간이 멈추길 기도했다. 조금만 더 자신의 두 눈에 그를 담고 싶었다.
“하.”
아직도 그녀의 마음은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가슴이 아플 리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오랜만에 그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하가 애써 씁쓸한 마음을 달려던 찰나 그녀의 방문이 열렸다.
“야, 내려와.”
제 할 말만 하고 휙 사라지는 다미의 뒷모습을 보며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에 홀린 듯 서하가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와 정갈한 반찬들이 놓였다. 평소라면 서하의 자리는 없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다미의 옆에 그녀의 수저가 놓여 있었다.
보기에는 진수성찬이 펼쳐진 행복한 가족 식사로 보였겠지만 서하는 식탁에 앉기 전부터 숨이 턱턱 막혔다.
“앉아라.”
경호의 말에 서하는 쭈뼛거리며 다미의 옆에 앉았다.
“오랜만에 우리 가족들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것 같네요.”
설영이 억지로 눈웃음을 치며 서하에게 말을 걸었다.
“서하야, 아무리 같이 먹기 싫어도 저녁은 되도록 같이 먹자. 가족끼리 얼마나 좋니?”
가증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챙겨주는 척하는 설영의 모습에 서하는 속이 울렁거렸다.
먼저 얼굴 보기 싫다며 저녁은 따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은 설영이었다. 그 때문에 중‧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은 매번 핑계를 대며 저녁 식사 자리에서 빠졌다. 밖에서 사 온 샌드위치나 간식들로 저녁을 대신하며 부엌에서 풍겨오는 따스한 집밥 냄새에 눈물을 적신 적도 많았다.
서하가 대답 없이 조용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설영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말한다는 게 깜빡했네.”
설영이 생글거리며 경호를 향해 말했다.
“수도 투자증권 쪽에서 연락 왔어요. 2주 뒤에 상견례를 하자고 하네요? 그쪽, 손자가 서하가 단단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상견례라는 단어에 하마터면 서하는 젓가락을 놓칠 뻔했다. 2주 뒤에 상견례를 잡다니 빨라도 너무 빨랐다.
“상견례를 벌써?”
경호의 말에 설영이 소리를 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벌써라뇨. 질질 끌 필요가 뭐가 있어요? 서로 좋으면 그만인 거지. 안 그러니, 서하야?”
밥그릇에 고정되어있던 서하의 시선이 들리자 이번엔 경호가 입을 열었다.
“만나 보니까 좋은 사람인 것 같으냐?”
무뚝뚝하게 물어오는 경호를 보며 서하가 작게 답했다.
“괜찮은 사람이에요.”
“결혼하려는 사람인데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좋아야지.”
“…좋아요.”
“결혼할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인 거야?”
“이이가 정말!”
평소와 달리 꼬치꼬치 캐묻는 경호의 말을 자르며 설영이 말을 이었다.
“서하가 좋다잖아요. 왜 자꾸 물어요, 애 곤란하게!”
설영의 등쌀에 경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용히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하는 경호를 보며 서하 또한 입을 닫았다.
“상견례는 2주 뒤에 하고 결혼은 석 달 뒤로 했으면 좋겠다는데, 서하 생각은 어떻니? 혹시 더 빨리하고 싶은 건 아니니?”
속내가 빤히 보이는 설영의 물음에 서하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식탁 밑에서 다미가 그녀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아…….”
새침한 얼굴로 서하를 흘기며 다미가 말했다.
“서하야, 엄마가 물어보잖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설마, 수도 투자증권 손자 생각하는 거야? 벌써 그렇게 좋아하는 티 내면 언니는 서운하다?”
“아이고, 다미 질투하는 거니? 서하 뺏기는 거 같아서?”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당연하지.”
“서하 결혼하기 전까지 시간 많이 보내 보렴. 결혼하면 딸은 출가외인이라잖니. 이제 그쪽 사람으로 서하도 바쁠 텐데.”
가식적인 두 사람의 대화에 서하가 질릴 무렵,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설영이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 기억나요? 내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서하 삐쩍 말라서…. 사랑도 못 받아서는 그렇게 저랑 다미 옆에 붙어있던 거?”
설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호가 말했다.
“그랬지.”
“그렇게 어린아이였던 서하가 벌써 결혼이라니. 제 마음이 뭉클하는 거 있죠?”
설영의 말에 다미가 덩달아 애틋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 서하 결혼할 때까지 우리가 더 잘해주면 되니까 그러지 마. 서하도 원해서 가는 거고, 좋은 데로 시집가는 건데.”
“자식 결혼할 때 더 잘해줄 거라는 생각이 든다더니…. 내가 그러네. 우리 서하, 가서 잘 살 건데…….”
뻔뻔하게 자신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우는 시늉을 하는 설명의 모습에 서하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그냥 드라마가 아닌 막장 드라마. 만약 연기 대상을 줘야 한다면 제 앞에 앉은 설영에게 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다미는 최우수연기상이었고.
서하가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미 콱 막힌 속에 억지로 더 먹었다가는 크게 체해서 고생할 것이 뻔했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하를 향해 다미와 설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머, 벌써 다 먹었니? 왜, 좀 더 먹지 않고.”
“그래.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드세요.”
그 자리를 도망치듯 서하가 계단을 올랐다. 제 방문을 열었을 때, 아래층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따스한 집밥을 먹었음에도 속이 허했다. 채워질 수 없는 허함이었다.
* * *
며칠 뒤.
모두가 퇴근한 시각, TA 건설 대표실의 불은 환하게 밝혀있었고 [TA 건설 대표 우세헌] 이라고 적힌 명패 뒤로 서류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평소 깔끔한 성격의 세헌의 책상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서류 하나를 훑어보던 세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끝이 없네.”
며칠 내내 세헌은 진성 건설의 비리를 찾는 데 정신을 몰두했다. 물론, 그 때문에 도윤도 덩달아 매일 야근해야 해서 힘들어했지만.
벌컥. 조금 전 통화를 하고 오겠다던 도윤이 대표실의 문을 열며 말했다.
“와, 살짝 파봤을 뿐인데 고구마처럼 줄줄 딸려 나오네. 본격적으로 파면 얼마나 나올지 궁금할 정도야.”
“왜.”
도윤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유명하더라고, 홍설영 씨. 진성이랑 같이 일한 업체들 살짝 찔러봤더니 그냥 술술 말하던데? 다들 쌓여있는 게 많더라고.”
“업체들한테 돈 받은 정황은 확실하네.”
“응. 그 여자가 돈 받고 다닌 거 진 대표님은 모르겠지? 하긴, 그 여자랑 이복 언니가 진서하 씨 괴롭히는 것도 모르는 것 같던데….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으시다.”
혀를 내두르며 도윤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모은 자료만 가지고도 진성 건설 흔들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세헌이 느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도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직이야.”
“아직이라고?”
“흔들리는 걸로는 만족 못 하지.”
도윤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너… 설마…!”
“홍설영, 그 여자.”
그의 입술이 매끈하게 휘었다.
“죗값 받게 해야지. 나한테서 진서하를 앗아갔으니까.”
“…단단히 미쳤네. 진서하 씨한테.”
“더 미칠 생각인데.”
괜스레 무서워진 도윤이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야?”
“글쎄.”
고민이었다. 단순히 진성 건설을 흔들리게 해서 겁을 줄지, 아니면 정말로 진성 건설을 흔들리게 한 다음 제 발밑으로 둘지.
진 대표의 잘못은 없었지만 그렇게 해야 서하를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 여자를 무너트리는 게 좋을까.”
돈 받은 정황도 뚜렷하니 설영에게 증거를 들이밀며 협박해도 좋을 것 같았다. 더는 서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단단히 못을 박아놓고 왕자님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그녀를 빼내 와도 좋을 것 같았다.
“야, 우세헌.”
도윤이 걱정스럽다는 듯 세헌을 불렀지만 그는 건조하게 말했다.
“넌 시키는 일만 해.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세헌이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빛에 반사된 창문으로 보이는 그의 시선이 무서울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