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7화 (18/70)

17화

* * *

마주친 두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더니 이내 진득하게 서로를 향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눈만 보고 있을 뿐인데 두 사람 다 애처로운 마음이 흘러넘쳤다.

“서하 씨?”

자신을 부르는 도민의 목소리에 서하가 그제야 세헌에게 고정했던 시선을 움직였다.

“네? 네?”

“어딜 그렇게 봐요?”

“아니, 그냥…….”

도민이 그녀가 시선을 고정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세헌을 보곤 서하를 향해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려던 서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그래요? 그럼 갈까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네.”

자신을 직시하는 세헌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한 걸음씩 발을 뗄 때마다 숨이 막히는 긴장감이 서하를 에워쌌다.

혹시나 그가 자신을 잡지는 않을까,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할까.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그 생각이 무색하게 그는 서하를 잡지 않았다.

왜 하필 백화점에 와서 그를 마주친 것인지.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져 왔다. 흔들리던 그의 시선을 떠올리며 서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점차 멀어져만 가는 서하의 뒷모습을 보며 세헌은 이를 악물었다.

“…세헌아.”

도윤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세헌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기분일까. 정략결혼 상대로 보이는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서하를 다시금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들끓었다.

일부러 백화점은 피했던 세헌이었다. 혹시나 갔다가 서하를 만나게 된다면 그대로 납치해서 제 옆에 묶어둘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하필 건설사 미팅이 잡힌 오늘, 미팅 잡힌 장소가 백화점 맨 위층에 위치한 한정식집이었다. 바로 서하와 도민이 나란히 함께 나온 그 한정식집.

“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세헌이 고통을 참는 듯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한참을 서하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보름 만에 보는 그녀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제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물론, 서하의 옆에 있는 남자는 세헌의 신경을 거슬리다 못해 속을 비틀어놓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곧 되찾으러 갈 것이었다, 그녀를. 그러기 위해서는 세헌은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했다.

“가자.”

냉정함을 찾은 그가 발걸음을 움직였다.

“야, 야. 괜찮은 거야?”

도윤의 물음에 세헌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서하와 도민이 나왔던 한정식집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세헌이 한정식집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그를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미닫이문이 열렸다. 도민과 서하가 머물렀던 곳보다 조금 더 큰 룸에 혼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세헌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우 대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대표님.”

두 사람이 가볍게 악수를 하고는 마주 보고 앉았다.

“갑작스럽게 미팅 요청을 드렸는데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소도 급하게 잡느라 이런 곳으로 했는데 괜찮으실지…….”

눈치 보며 말하는 김 대표를 향해 세헌이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희 회사와 가까워서 오기 편했습니다.”

“다행입니다.”

김 대표가 급하게 식사 자리를 마련한 이유를 세헌은 잘 알고 있었다.

“TA 그룹 연구소 센터 공사 수주건, 우 대표님이 우리 진화 건설을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야 함께하게 되어 너무 감사하지만 궁금했습니다. TA 건설 단독으로 진행하려던 것을 왜 저희랑 공동으로 하려고 하신 건지.”

세헌의 입가가 희미하게 휘었다. 김 대표의 말처럼 단독으로도 충분히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공동으로 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진화 건설이 건설업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TA 건설은 신생이니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되어 공동진행을 부탁드렸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그랬다. 진화 건설은 서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진성 건설과 함께 역사가 긴 건설사였으며 그만큼 업계에서 입김이 세기도 했다. 세헌은 그걸 노렸다.

“그래도…. TA 그룹에서 단독으로 진행하자고 하셨을 텐데…. 공동으로 바꾸신다고 하셨을 때 반대가 심했을 것 같습니다.”

“글쎄요.”

세헌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 회장님께서는 제 의견에 항상 따라 주셔서.”

그 말에 김 대표가 놀란 듯 물었다.

“우 회장님과 독대까지 하십니까?! 실례지만…. 그 소문이 사실입니까? 우 대표님과 TA 그룹 우 회장님이 친인척이라는 소문이…….”

“친인척?”

“TA 그룹은 TA 건설과 상관없다고 했지만…. TA 건설이 생긴 후부터 TA 그룹 모든 건설 수주는 모두 도맡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 대표님과 우 회장님이 성도 같고…. 저희 건설사 대표들은 우 대표님이 TA 그룹 우 회장님의 먼 친척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세헌이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김 대표가 두 눈을 끔뻑이며 놀란 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먼 친척이…….”

“아니요. 먼 친척이 아니라,”

마른침을 삼키며 저를 바라보는 김 대표를 향해 세헌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우, 우 회장님이 우 대표님의 아버님이라는 말씀이십니까?!”

“네. 자연스럽게 알려지길 원해서 말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크게 놀란 것인지 김 대표는 물을 연거푸 벌컥벌컥 마셔댔다.

“몰랐습니다. 아, 아버님이실 줄은…….”

“달라질 건 없습니다. 저희 TA 건설은 TA 그룹 산하 기업이 아닌 독자적인 기업이니까요. 건설사 대표님들은 저희가 TA 그룹의 수주를 독점한다고 생각하시지만, 저희가 당연하게 독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번 수주를 따내기 위해 입찰할 때 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김 대표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세헌에게 들리는 듯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국내 최고의 기업, TA 그룹의 회장님의 외동아들이 김 대표의 앞에 있었으니까. 게다가 세헌이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잘 보여야 했다.

“우 회장님은 좋으시겠습니다. 이렇게 든든하고 멋있는 우 대표님 같은 아드님을 두어서, 하하. 진즉에 알아봤습니다. 젊은 나이에 건설업 대표로 성공하기가 쉽지는 않죠.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 같습니다.”

온갖 아부 섞인 말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김 대표를 보며 세헌은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꼴이 보기 싫어서 그동안 숨긴 것이었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우 대표님이 우 회장님 아드님이라는 것을 다른 대표들이 알아도 괜찮을지…….”

“괜찮습니다.”

오히려 세헌은 김 대표가 소문 내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진성 건설까지 소문나서 설영의 귀에도 들어갈 테니까.

“하하, 알겠습니다.”

김 대표가 어색하게 웃던 순간, 어디선가 요란하게 벨 소리가 울렸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진동으로 해놓질 않아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든 김 대표가 발신자를 보더니 멈칫했다.

“급하신 거면 받아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김 대표가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으려던 찰나 다시금 벨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급한 일일 수도 있으니 받아보세요.”

“아…. 그러면 잠시만 받겠습니다.”

몸을 구부정하게 돌린 채 김 대표가 휴대폰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아니면…. 뭐? 또? 그 여자, 정말 독하네. 알겠어. 이따가 다시 이야기해.”

전화를 끊은 김 대표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무슨 일 생기신 겁니까.”

세헌의 물음에 김 대표가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이게 흉보는 것 같아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우 대표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뭡니까.”

“그…. 진성 건설 말입니다.”

진성 건설이라는 말에 세헌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진성 건설, 진 대표 부인이 입찰할 때마다 그렇게 뇌물을 뿌리고 다녀서요. 한두 번도 아니고…. 진 대표는 워낙 사람이 착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 여자한테 휘둘리는지라 저희 쪽에서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진 대표 부인이 뇌물을 뿌린단 말씀이십니까?”

“네. 뇌물 주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진성 건설이 아파트 지을 때는 그 여자가 업자들한테 돈을 받기도 해요. 써주겠다면서.”

“하.”

들으면 들을수록 세헌은 기가 막혔다. 뇌물을 주는 것도 모자라서 받기까지 한다니.

“직함도 없을 텐데 그게 가능한 겁니까?”

세헌의 물음에 김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직함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사라는 직함을 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로만 이사지 정작 회사에서 일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진 대표만 불쌍합니다.”

“다른 건설사들은 알고 있습니까?”

“몇몇 건설사들은 알고 있으나 진성 건설이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진 대표가 착하니까 그냥 덮어주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못 참을 것 같네요. 그 여자가 워낙 들쑤시고 다니니…….”

오늘 그가 김 대표를 만난 것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퍼트리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세헌은 운이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확신했다.

“저…. 우 대표님, 오늘 말씀드린 것은 비밀로…….”

“걱정하지 마세요.”

잠시 후, 김 대표와 식사 자리를 끝낸 세헌이 한정식집에서 걸어 나왔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한정식집 맞은편 카페에서 세헌을 기다리고 있던 도윤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못된 새어머니 역할만 하는 줄 알았는데 더 못된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응? 무슨 소리야? 못된 짓?”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도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의 새카만 눈은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배도윤.”

“응, 왜.”

그가 나직하게 말을 내뱉었다.

“알아봐. 진성 건설, 크게 터질 게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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