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4화 (15/70)

14화

* * *

설영의 성화에 약속 시간보다 맞선 장소에 일찍 도착한 서하가 카페 안을 훑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호텔 라운지 카페는 조용하면서도 적막했다. 고작 몇 명의 사람들만 자리를 채운 카페 안을 둘러보던 서하는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시고 계시겠지.”

평소 자신의 모습과는 정반대인 타이트한 원피스부터 짙은 화장, 그리고 처음 온 장소에서 맞선까지. 온통 낯선 것들로 긴장할 법한데 서하는 체념한 듯 건조한 얼굴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상처 받았을까, 세헌 씨…….”

이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세헌이 떠올랐다. 며칠 전 그에게 잔뜩 쏟아부었던 독설을 떠올리자 무표정했던 서하의 얼굴에 슬픔이 서렸다.

상처 받았을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싫어하게 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세헌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길 바랐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미워한다면 그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테니까.

“진서하 씨?”

세헌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서하의 고개가 들린 건 그때였다.

“서하 씨 맞죠?”

첫눈에 호감이 갈 정도로 훈훈한 생김새를 가진 남자,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함이 공존하는 얼굴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네, 맞아요. 혹시…….”

“오늘 만나 뵙기로 한 양도민입니다. 반가워요.”

도민이 생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한눈에 알아봤어요. 사진이랑 똑같으시네요.”

서하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를 마친 도민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물론이고 지인이나 학교,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알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보고 확인했다.

“한국 대학교 출신이시더라고요. 저도 한국 대학교 출신인데. 서하 씨처럼 예쁘신 분을 제가 못 봤다니.”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고 지인과 동기들에게 서하를 수소문했던 도민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학교 내에서 자발적인 아웃사이더였다는 것을.

친한 친구도, 선후배도 없었다. 서하를 기억하는 소수의 사람은 한결같이 그녀가 유령 같았다고 했다.

“서하 씨는 저 본 적 없어요? 저 과 대표로 하고 나름 유명했는데. 아, 과가 달라서 모르나?”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하는 편이라서.”

“죄송할 것까지야. 그럴 수도 있죠.”

사진만 보았을 때는 활발하고 철없는 부잣집 막내딸 같은 이미지였다.

그녀가 별다른 직업 없이 놀며 쇼핑만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도민은 대충 구식만 맞춰주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는 여자라면 오히려 다루기 편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본 서하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잔뜩 경계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키는 느낌은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정반대였다.

서하의 외모 또한 도민의 마음을 흔들었다. 큰 눈과 중단발은 그녀의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도민이 가볍게 입술을 휘며 말했다.

“이미 저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소개할게요. 양도민이고 서른두 살입니다. 서하 씨랑은 네 살 차이네요. 호칭은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오빠도 좋고, 도민 씨도 좋고.”

몰아치듯 말하는 도민이 부담스러웠지만 서하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도민 씨라고…. 부를게요.”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본론이라는 말에 서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론이라면…….”

“네. 진서하 씨와 제 결혼에 관해서 말이죠.”

“아…….”

도민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는 진서하 씨와 결혼할 생각이에요.”

고작 통성명만 했을 뿐인데 결혼할 생각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서하의 얼굴을 보며 도민이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결혼은 해야 하잖아요.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시간 버리는 것보다야 조건만 맞으면 바로 정하는 게 낫죠.”

설영이 원하는 대로 되었다는 안도감도 잠시 미묘한 이질감이 서하의 마음을 껄끄럽게 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서하 씨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나 보네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보자마자 결혼할 생각이라고 말씀하시니까 조금 당황스러워서요.”

이해한다는 듯 도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서하 씨네 집안에서도 저랑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서하는 이제야 도민에게서 느꼈던 미묘한 이질감이 뭔지 감이 잡혔다.

“사랑 타령이야 어리고 없는 사람들이 하는 거고, 저희 정도면 조건에 맞춰서 결혼해야죠. 그래서 서하 씨도 여기에 나온 거잖아요?”

차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정략결혼을 하겠다고 나온 것은 서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우민이 가볍게 입술을 휘며 말을 이었다.

“서하 씨도 이 결혼에 동의하는 거죠?”

* * *

뜨거운 열기와 함께 커다란 음악 소리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스테이지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고 다미는 그 모습을 2층에서 내려다보며 술을 마셔댔다.

“서다미, 너 아직도 그 남자한테 관심 있는 거야?”

답답하다며 잠시 밖에 다녀온 친구의 말에 다미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 누구?”

“그때, 호텔 바에서 봤던 잘생긴 남자.”

“아, 맞아. 우세헌.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지. 성격도 더럽고. 그래도 이상하게 가지고 싶다니까?”

깔깔거리며 웃는 다미를 향해 친구가 말했다.

“그 남자, 지금 라운지바 가던데?”

풀려있던 다미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뭐? 정말이야?”

“응. 들어오는데 비서한테 라운지바 간다고 하는 거 들었어.”

“맨 위층에 있는 라운지 바 맞지? 확실하지?”

“그렇다니까.”

술잔을 내려놓은 다미가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나 먼저 갈게. 계산하고 갈 테니까 재밌게 놀아.”

“뭐? 야, 서다미!”

친구들의 부름에도 다미는 서둘러 클럽 안을 빠져나왔다.

라운지바에 가기 전, 파우더룸에 들린 다미가 가방에서 향수를 꺼내 들었다.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를 가리기 위해 잔뜩 향수를 뿌리고는 이번에는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저번에 같이 술 먹자고 했을 때는 안 넘어오던데.”

살굿빛 립스틱을 여러 번 입술 위로 덧칠한 다미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살폈다.

“그냥 취한 척하고 들이댈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니까. 뭐, 우세헌도 어쩔 수 없이 나한테 넘어오겠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던 다미가 만족한 듯 가방을 챙겼다. 파우더룸에서 나온 다미는 서둘러 라운지바가 있는 호텔 맨 위층으로 향했다.

라운지바에 도착한 다미는 한눈에 세헌을 찾을 수 있었다. 길쭉하고도 다부진 몸매는 정장을 입어도 태가 났으며 시원한 이목구비는 슬쩍 보이는 옆모습에서조차 입체적이었다.

하이힐 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세헌을 향했다. 이내 그 소리는 정확하게 그의 앞에서 멈췄다.

“또 만나네요, 세헌 씨.”

온종일 서하를 떠올린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조금이나마 비울 겸 술을 마시러 왔던 세헌이었다. 평소 자주 가는 바도 있었지만, 일부러 평소 오지 않는 조용한 곳을 찾아 이 라운지바에 온 것이었고.

술을 한두 잔 마시고 조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쉬려던 찰나 자신의 앞에선 다미를 보자 세헌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나 안 반가워요?”

애교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미가 세헌의 옆에 앉았다.

“앉으라고 한 적 없는데.”

“그래서 미리 앉았잖아요?”

소모적인 말싸움은 하기 싫었기에 다미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세헌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서하, 오늘 맞선 보러 간 거 알아요?”

맞선 보는 날이 오늘이었다니. 세헌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아까 엄마한테 들었는데 이야기가 잘됐나 봐요. 그쪽에서 결혼하겠다고 연락 왔다더라고요. 너무 잘되지 않았어요?”

그의 싸늘한 시선이 신이 난 듯 말하는 다미를 향했다.

“뭐가 잘됐다는 거지?”

“잘됐죠. 서하 수준으로 못 만날 남자잖아요. 상대가 무려 수도 투자증권 손자라는데. 듣기로는 차기 후계자라고 하던데요?”

다미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들었어요. 세헌 씨가 진서하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걘 어차피 결혼할 테니까 차라리 나랑 만나보는 거 어때요? 진서하보다야 내가 세헌 씨한테 더 매력적인 상대일 텐데.”

자화자찬하는 다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래. 네가 진서하보다 낫다고.”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세헌 씨, 나랑…….”

“진다미라고 했나.”

“네? 네, 맞아요. 내 이름.”

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뭐라고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다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세헌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봐요. 내가 잘못 들은 거죠?”

“두 번 말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그가 조소 섞인 실소를 터트렸다.

“사람이면 한 번 말했을 때 알아먹어야지. 짐승도 아니고.”

싸늘하게 자신의 옆을 스쳐 지나가는 세헌을 다미는 차마 잡질 못했다. 그의 말과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기 때문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