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TA 건설, 대표실.
적막한 분위기가 대표실을 무겁게 채우고 있었다. 냉랭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던 세헌이 입을 열었다.
“박 부장님.”
묵직한 중저음에 그의 앞에 서 있던 중년 남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네, 대표님!”
안경을 추켜올리며 세헌을 바라보는 박 부장의 얼굴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기획안, 직접 작성하신 거 맞습니까.”
“네?”
“지금 이 기획안, 박 부장이 직접 한 거냐고 물었습니다.”
“아, 그게…. 팀원들과 같이…….”
“제가 박 부장님을 시켰지, 박 부장님 팀원들에게 시켰습니까?”
그의 싸늘한 시선이 박 부장을 훑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일하기 귀찮으십니까? 은퇴라도 생각하시는 거라면 사직서 제출하시고요.”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장, 새로 기획안 만들어 오겠습니다.”
세헌이 손에 든 서류를 그대로 옆에 있는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팀원들에게 시키지 마세요. 자기가 맡은 일은 자신이 직접 하는 건 초등학생도 아는 사실입니다.”
“…네. 죄송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대표실을 나서는 박 부장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세헌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몇 시지.”
모니터를 응시하던 우준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폰으로 향했다. 분명 메시지를 보낸 건 오전이었다. 시침은 이미 퇴근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아직 답장이 없는 서하를 생각하자 그의 눈썹 끝이 추켜 섰다.
“정말 더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건가.”
그가 검지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이대로 서하와 멀어지게 될 생각을 하니 무서워졌다.
“우세헌이 무서워하는 것도 생기고.”
자조적인 실소를 터트리며 세헌이 고개를 젖혔다. 그가 아버지인 우 회장과 약속을 잡은 것은 주말이었다. 우 회장을 만나 자신이 TA 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슬슬 공개하자고 말할 참이었다.
그토록 자신의 집안을 숨겼던 세헌이 공개하려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진서하, 그녀를 숨 막히는 곳에서 자신의 품으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거지 같은 결혼을 하겠다는 소리나 하고.”
서하가 몰라줘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았다. 세헌이 그동안 어떤 식으로 핑계를 대며 서하를 만날 구실을 찾았는지, 그래서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내가 답이 없는 건가.”
바보같이 답답한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분명 제 책임이었기에 세헌은 그저 헛웃음만 터트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을 걸치고는 대표실의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있던 도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서 퇴근해.”
“응? 우세헌, 너 어디 가?”
도윤의 물음에 세헌이 짤막하게 답했다.
“말 안 듣는 신데렐라 만나러.”
* * *
창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고 짧은 시침은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7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세헌 씨…. 퇴근했겠지?”
세헌에게서 연락이 왔음에도 서하는 차마 답장을 하지 못했다. 괜히 답장했다가 잡았던 마음이 흔들리게 될까 봐서였다.
지잉-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서하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 위에 선명하게 뜬 이름에 그녀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온 신경이 집중된 귓가로 나직하게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었어.
그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감정들이 일렁거리며 올라왔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왜 전화는 받는 건데.
“그냥…. 하지 말라고 말하려고 받은 거예요.”
-거짓말 안 좋아하는데.
“…끊을게요. 앞으로는 다시 전화하지 마세요.”
-진서하.
뜨거운 숨소리와 함께 나직하게 불린 자신의 이름에 서하의 속눈썹이 가녀리게 떨렸다.
-나와. 지금 네 집 앞이야.
“안 나갈 거예요.”
-기다릴게.
서하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조금만 더 세헌의 목소리를 듣다가는 눌러놓은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우리 집 앞이라고 했지?”
창문 쪽으로 향한 그녀가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대문 앞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의 차가 보이자 서하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안 돼…….”
말은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의 발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한 감정은 그를 보지 않는 동안 확신이 되었다. 부정하려고 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하, 자신이 세헌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하지만 그 마음은 접어야 했다. 세헌은 서하에게 너무나도 과분한 존재였다.
서하가 마지막으로 용기를 냈다. 마음을 접는 대신 마지막으로 세헌의 얼굴을 보자고. 그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철컥, 끼익. 대문이 열리며 나는 쇳소리에 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서하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조수석 차 문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세헌을 향해 고정됐다.
“나왔네.”
어둠 속에서 세헌의 낮은 중저음이 잔잔하게 서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몸을 곧추세운 그가 천천히 서하를 향해 걸어왔다.
“어떻게 안 와. 눈에 아른거리는데.”
하늘을 물들였던 선연한 노을은 이미 지고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마주한 두 사람의 몸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래서 기다린다고 했잖아.”
“안 나오면 어떡하려고 했어요.”
“나왔잖아.”
두 사람의 거리가 서로의 그림자만큼 가까워졌을 때, 서하가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예의상 나온 거예요. 이게 마지막일 거고요. 나온 김에 확실히 말할게요.”
마지막이라는 말에 세헌의 미간이 엷게 주름이 졌다.
“마지막이란 말 함부로 쓰는 거 아닌데.”
“…마지막이에요.”
“진서하.”
“나 맞선 보기로 했어요. 세헌 씨도 알죠? 수도 투자증권이라고 엄청 유명한 곳이에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서하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세헌 씨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알죠? 외모, 집안, 학벌 어느 거 하나 빠지지 않는, 우리 집안에 딱 알맞은 사람이에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줘서 마음을 접게 하려고 서하는 설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신생 건설사 대표랑은 비교가 되질 않죠. 저 그 사람이랑 잘해볼 거예요. 그러니까…. 더는 귀찮게 하지 말아주세요.”
잔인한 말이 세헌의 마음을 짓이겼다. 비수처럼 꽂힌 그 말에 잠시 숨을 고르던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 여자랑 똑같이 말을 하네.”
서하의 두 눈동자가 엷게 흔들렸다. 그가 말하는 그 여자라면 설영을 말하는 것일 테니까.
“왜, 그 여자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켰어?”
“세헌 씨.”
“서하야.”
달콤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하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나쁜 말을 하는데도 내 눈에는 왜 예뻐 보일까.”
“세헌 씨, 제발…….”
“밀어내지만 마. 네 진심 아닌 거 아니까.”
“진심…. 이에요!”
서하가 소리쳤다.
“나, 세헌 씨 그만 보고 싶어요. 시키는 대로 결혼해서 집안에서 인정도 받고 싶고요. 지금 내 계획을 세헌 씨가 방해하는 거라고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술이 제멋대로 쏟아냈다.
“그러니까 그만 내 앞에서 사라져줘요. 세헌 씨가 없는 게 나한테는 행복해질 기회라고요. 더는….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마요.”
서하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세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 소리치는 서하를 보며 더 는 제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동화 속 인어공주처럼 가녀린 그녀가 물거품이 되어버릴까 봐 겁이 났다. 그만큼 세헌에게 서하는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약한 존재였다.
더는 그녀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 그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잘 가요, 세헌 씨.”
서하가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기다려줘.”
세헌의 말에 그녀가 멈칫하며 멈춰 섰다.
“제대로, 네 앞에 설 테니까.”
그의 곧은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서하가 거부할수록 맹목적으로 돌진해 왔다. 그러기에 피해야 했다. 안 그러면 그 마음에 휩쓸릴 테니까.
서하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세헌은 멀어져만 가는 그녀를 더는 잡을 수가 없었다.
쾅 소리를 내며 대문이 닫혔다. 세헌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서서 서하가 사라진 대문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는 행복, 찾아줄 거야.”
진정으로 서하가 원하는 행복을 자신이 주겠다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세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 *
며칠 뒤. 아침 일찍부터 서하가 향한 곳은 유명 메이크업 숍이었다. 조용한 프라이빗 룸으로 서하를 데려간 원장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 됐습니다.”
서하의 뒤에서 잡지를 보고 있던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어요, 원장님.”
“별말씀을요. 그럼, 옷 갈아입도록 자리 비켜드릴게요.”
원장이 자리를 뜨자 설영의 날 선 시선이 서하에게 꽂혔다.
다미가 이목구비가 화려한 정통적인 미인상이라면 서하는 귀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이미지였다. 그런 서하를 화장을 시켜 놓으니 예쁜 것은 물론 사랑스러움이 배가 됐다. 오히려 다미보다 매력이 철철 넘쳤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는 않지만 뭐, 봐줄 만하네.”
조용히 시선을 내리는 서하를 못마땅한 시선으로 훑으며 설영이 말을 이었다.
“오늘 중요한 날인 거 알지? 네 아버지랑 집안의 명예가 달렸어. 실수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알겠니?”
협박조로 을러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사나웠다.
“…네.”
“갈아입고 나와. 입고 환급할 거니까 깨끗하게 입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제 앞에 설영이 던지듯 내려놓은 종이백을 들어 올리며 서하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오고야 말았다. 수도 투자증권 손자와 서하가 맞선을 보는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