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2화 (13/70)

12화

* * *

설영을 보자마자 싸늘하게 굳어버린 세헌의 얼굴은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우세헌 씨. 반갑습니다.”

“진 대표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앉으세요.”

경호가 맞은편 소파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세헌이 소파에 앉는 모습을 관찰하듯 지켜보던 경호가 입을 열었다.

“우 대표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 많이 놀랐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거만하리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는 세헌을 보며 경호가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우리 서하와 친분이 있다고 들었는데…. 오늘 우 대표와 제가 만나는 걸 서하도 알고 있습니까?”

“모를 겁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세헌의 말에 경호가 뭔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누그러진 분위기에 설영이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경호를 바라보았다.

“경호 씨? 중요한 건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설영의 눈치에 경호가 헛기침하며 목을 다듬었다.

“흠, 흠. 비서에게 들은 바로는 우리 서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략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헌의 차분한 목소리에 경호가 귀를 기울였다.

“마음을 준 사람이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과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을까요.”

“그 말은…. 우 대표가 우리 서하를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네. 천천히 다가간 만큼 마음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소리에 조급해졌습니다.”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에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자고 한 것은 서하의 결혼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진중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경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 결혼은 내가 강요한 게 아닙니다. 서하가 선택한 일입니다.”

세헌의 시선이 설영에게 향했다.

“진짜 원해서 그 결혼을 선택한 건지 의문이군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헌을 향해 설영은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금 우리 서하가 누가 시켜서 결혼을 한다는 말인가요?!”

“글쎄요. 그건 그동안 서하를 지켜본 가족들이라면 더 잘 아실 거로 생각합니다.”

설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작 신생 건설사 대표주제에 자신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가 설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봐요, 우 대표. 우 대표가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이 바닥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요?”

눈동자를 굴리며 설영이 핏대를 세웠다.

“우리 서하가 결혼하려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요? 수도 투자증권 회장님 손자예요. 외모, 직업, 집안, 어느 거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 서하를 만나준다는데, 이건 영광이지.”

영광이라니. 하마터면 세헌은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수도 투자증권. 탐욕스러운 설영이 혹할 만했다. 하지만 수도 투자증권이 잘났다고 하더라도 TA 그룹과 비교하면 새 발의 피였다.

“뭐, 우 대표가 서하한테 좋은 감정 품은 건 알겠는데 미안하지만, 그쪽이랑 우리랑은 급이 좀 다르지 않나?”

“당신…!”

경호가 말렸지만 설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요. 당신이 제대로 말 못 하니까 내가 말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우 대표, 결혼이라는 건 집안과 집안끼리의 만남이에요.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지. 안 그래요?”

설영의 입술 사이로 비웃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신생 건설사 주제에 말이지.”

“당신, 말 가려서 안 해?”

“뭘 가려서 해요. 어차피 해야 할 말인데요. 그래야 우 대표도 정신 차릴 거 아니에요? 우리 서하가 좋은 곳으로 시집가야 제 마음이 편하죠.”

세헌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보다 서하를 생각하는 척 말하는 설영의 모습이 더 거슬렸다.

“우 대표,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세상 이치가 원래 그런 거니까. 우리 서하는 이미 맞선이 정해졌고, 두 사람 이야기가 잘 끝나면 결혼시킬 거예요. 그러니 빨리 마음 접도록 해요.”

이야기가 조금 수월하게 진행된다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으려고 했던 세헌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자신이 TA 그룹가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될 테니까.

하지만 파렴치한 설영의 행태를 보며 세헌은 터놓으려던 마음을 바꿨다. 자신이 직접 말하는 게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설영이 알게 하면 어떨까 하고.

그렇게 사실을 알았을 때, 집안 운운하던 설영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했다.

세헌의 시선이 설영이 아닌 경호에게 향했다.

“진 대표님도 집안이 중요하신 겁니까?”

설영을 흘끗 보고는 경호가 답했다.

“다른 것보다야 서하의 마음이 중요하겠죠.”

“당신!”

세헌이 입가를 매끈하게 휘었다.

“알겠습니다. 서하의 선택이 중요하겠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덩달아 경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원하는 답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시간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세헌이 시선을 내려 설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에 좋은 소식으로 만나 뵀으면 좋겠군요.”

“조심히 가세요, 우 대표.”

그가 가볍게 묵례하고는 돌아섰다. 대표실을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며 도윤이 다가왔다.

“이야기 잘 끝난 거야? 바로 승낙하시지?”

세헌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아니? 아니라고? 왜?!”

“방해물이 있었네.”

“방해물?”

설영이 있을 줄이야. 오늘 보아하니 경호도 설영의 말에는 꿈쩍 못 하는 것 같았다. 입김이 센 새어머니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아버지의 조합이라니.

“진서하가 왜 집안에서 그런 취급을 당하는 줄 알겠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세헌을 보며 도윤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그래?”

도윤의 말이 세헌에게 들릴 리 만무했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그를 도윤이 뒤쫓았다.

“야, 우세헌!”

집안이 중요하다면야 맞춰주면 될 것이었다.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세헌이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만나 뵈어야겠어.”

* * *

화려하고 커다란 식탁, 그 위로 보기에도 맛있는 음식들이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다. 딱 보기에는 행복한 저녁 식사 자리였지만 서하는 답답하다 못해 숨이 탁탁 막혔다.

“아버지는?”

다미의 물음에 설영이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거래처 분들이랑 저녁 드신다고 했어. 아 참, 내가 말했니? 오늘 우 대표, 아니지. 고작 신생 주제에 무슨 대표니. 우세헌이 회사에 찾아왔었다고.”

바닥으로 향해 있던 서하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세헌이 회사에 찾아왔었다니.

“그게 오늘이었어?”

다미의 물음에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왔더라고.”

“우세헌이 뭐라는데?”

“뭐라긴, 주제도 모르고 설치지.”

조롱하듯 말하는 설영의 시선이 서하에게로 향했다.

“하는 짓이 거슬리는 게 딱 누구랑 똑같더라니까?”

“아, 엄마! 얘랑 우세헌이랑 비교하지 말라니까.”

“비교할 수밖에 없지. 결혼시키려는 남자가 수도 투자증권 손자라니까 찍소리도 못 하더라. 자기가 딸리는 건 알긴 아는 건지.”

설영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하니까 바로 꼬랑지 내리고 도망가더라니까? 얼굴만 반반하면 뭐 하니? 수준 낮아서, 쯧.”

“진짜야? 우세헌이 꼬랑지를 내렸다고?”

“그래. 아무튼, 딱 거절했더니 알겠다고 하고 가더라고. 잘됐지.”

비웃음이 가득한 설영의 시선이 서하에게 향했다.

“죽은 네 엄마도 그랬니? 결혼하려고 맞선 날짜 잡아놓고 다른 남자가 회사 찾아오게 하다니. 내가 남사스러워서 정말. 얌전한 척은 다 하면서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무리 그래도…. 친엄마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주세요.”

“하, 그래도 친엄마라고 기분은 나쁜가 봐?”

고개를 떨군 서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설영이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처신 똑바로 해. 알겠어?”

차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억지로라도 대답해야 했다. 꾹 다물었던 입술에 힘을 풀며 서하가 답했다.

“…네.”

다미가 입술을 비죽이며 입을 열었다.

“대답만 잘하지, 아주. 그래도 다행이네. 곧 있으면 집에서 얘 안 봐도 될 거 아니야.”

“그래. 그러니까 우리 딸, 그동안이라도 아버지 눈치 보면서 잘해.”

“걱정 마, 엄마.”

살가운 모녀 사이에 서하의 존재는 혹이나 다름없었다. 당장이라도 떼어내서 버려야 할 혹.

충분히 상처 받을 상황이었지만 너무나도 익숙해진 상황에 서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세헌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눈부신 그가 설영에게 자신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서하는 가슴이 아팠다.

자신과 다른 존재였다. 세헌은.

그가 자신의 옆에 있음으로써 피해받는 것을 원치 않는 서하였다. 자신과 같은 취급을 받는 것도 싫었다. 그러자 세헌을 위해서 그녀가 해야 할 행동이 명확해졌다.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서하가 말했다.

“먼저 올라가 볼게요.”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두 사람을 등지며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설영과 다미가 분명 자신을 욕할 것이 분명했지만 세헌만큼은 욕하지 않길 바라면서 서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세헌 씨와 다시는 엮이면 안 돼.”

더는 그가 흠집 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게 서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