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0화 (11/70)

10화

* * *

호텔 앞으로 검은색 세단이 매끄럽게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이 벌컥 열리더니 도윤이 뛰어나와서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느려, 배 비서.”

잘빠진 긴 다리를 뻗으며 말하는 세헌을 향해 도윤이 볼멘소리를 냈다.

“어련하시겠어. 누구처럼 난 다리가 길지 않다고.”

세헌이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진성 건설은.”

“약속 잡아놨어. 진경호 대표가 놀란 것 같긴 한데 뭐, 네가 좋다면야.”

도윤이 흘끗 세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 정말 진서하 씨가 결혼할 정도로 좋은 거야?”

도윤이 지금껏 친구로서, 비서로서 십여 년간 세헌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지금처럼 그가 매달리다시피 여자를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쎄.”

아리송한 대답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라니. 내가 보기에는 너, 진서하 씨한테 푹 빠진 거 같은데.”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야, 우세헌.”

자신을 부르는 도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세헌이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클래식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호텔 안, 세헌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호텔 바로 향했다.

바텐더 앞에 앉은 세헌이 제 옆에선 도윤을 향해 말했다.

“뭐 마실래.”

“난 운전해야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진심이냐고, 진서하 씨한테.”

도윤의 물음에 그가 바텐더를 향해 말했다.

“로열 살루트 32년산.”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의 앞에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크리스털 잔을 가득 채운 영롱한 갈색빛을 바라보며 세헌이 입을 열었다.

“진심이냐고 물었지.”

나직하게 흘러나온 그의 음성에 도윤의 눈이 반짝였다.

“계속 욕심이 생겨. 처음에는 이대로 계속 만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난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배가 되어 세헌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소유욕으로 짙게 물든 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진서하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 아니, 온전히 나만 봤으면 좋겠어.”

도윤의 입에 떡하고 벌어졌다. 냉혈한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천하의 우세헌이 사랑을 들먹이다니 도윤은 믿기지 않았다.

“단단히 빠졌구만.”

“그러게.”

“대체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멍청할 정도로 바보 같아서 그런가.”

도윤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멍청할 정도로 바보 같다니. 좋아하는 사람한테 할 말이냐.”

“맞는 말인데.”

“그래도…!”

“그래서 지켜 주고 싶은 거지.”

세헌이 잔을 들어서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오늘 저녁에 부모님 만난다고 했나.”

“응, 어머니 생신이라서 저녁 식사 같이하기로 했어.”

“퇴근해. 오늘 난 여기서 잘 거니까.”

“알겠어. 가기 전에 네 이름으로 스위트룸으로 예약해 놓을 테니까 다 마시고 올라가서 쉬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세헌이 입을 열었다.

“저녁 식사.”

“저녁 식사?”

“내 카드로 계산해. 생신 선물도 사도 좋고.”

“우세헌…….”

도윤은 수행비서였기에 세헌의 카드를 한 장 가지고 있었다. 그 카드를 쓰라는 말에 도윤은 감동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 비서, 퇴근해.”

그 감동을 매몰차게 거절하는 세헌을 보며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았습니다, 알았어. 퇴근하겠습니다.”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세헌의 시선이 다시금 바텐더로 향했다.

“한 잔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서하의 일로 세헌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표정도 숨기지 못하면서.”

제게 덤덤한 얼굴로 결혼하겠다고 하던 서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가 다시금 잔을 들었다.

서하의 마음이 자신에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챘다. 매번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그녀의 표정은 숨김이 없었으니까. 기대하게 됐다. 이대로 조금만 더 마음을 주고 지켜본다면 그녀가 완전히 제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 하고.

“그런데 그 예쁜 입술로 나 말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겠다니.”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괘씸했다. 집안에서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는 서하가.

“한 잔 더.”

바텐더에게 술잔을 내밀던 그 순간,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세헌 씨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앉는 다미를 보며 세헌의 눈매가 좁아졌다.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설마 세헌 씨도 혼자예요? 저도 혼자인데. 우리 운명인가 봐요.”

다미의 등 뒤로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무리들이 세헌을 보며 속닥거리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분명 친구들과 왔다가 세헌을 보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가식적인 얼굴로 운명 운운하는 꼴이라니. 세헌의 입에서 조소가 터져 나왔다.

“혼자 있고 싶은데.”

“에이, 나랑 있어요.”

잔뜩 파인 브이넥 사이로 가슴골을 내보이며 다미가 그를 향해 몸을 기댔다.

“진성 건설 대표님이 보시면 놀라시겠는데.”

“네?”

“가슴까지 보이면서 남자한테 달라붙는 꼴을 보면.”

순식간에 낯빛이 싸늘해진 다미의 입술이 치욕으로 덜덜 떨렸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남자는 없었기에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술맛이 떨어졌군.”

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돌아서는 그를 향해 다미가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세헌 씨, 지금 실수하는 거예요.”

“실수?”

“네, 나 진성 건설 대표 딸이에요. 세헌 씨, 앞으로 건설사로 잘나가려면 나한테 잘 보여야 하지 않아요? 건설업계에서 진성 알아주는데.”

붉은 입술을 잘근 물며 말하는 다미를 건조하게 바라보며 세헌이 말했다.

“상대를 잘못짚었는데.”

“…네?”

“잘 보이려면 그쪽이 아니라 진경호 대표님에게 잘 보여야지. 안 그런가.”

그 말을 매몰차게 돌아서는 세헌을 다미는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 *

“이번 주 토요일이요? 당연히 괜찮죠, 호호.”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설영이 말을 이었다.

“네, 그럼 제 딸에게 전해놓을게요.”

통화를 마친 설영이 믿기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수도 투자증권이랑 사돈 맺을 수가 있다는 말이야?”

경호에게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수도 투자증권 쪽에서 거절하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던 설영이었다.

“그쪽에서 승낙했으니 서하만 잘하면 결혼은 문제없겠네.”

눈엣가시였던 서하를 집안에서 치워 버릴 수 있는 데다가 든든한 사돈까지 얻을 기회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설영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인물이며 집안, 스펙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는 도민의 짝이 될 사람이 서하라는 것이 배가 아팠다.

“그 계집애한테는 너무 과분한데…. 우리 다미 짝이었으면 얼마나 좋아.”

못마땅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 정도 집안인데 시집살이는 있겠지. 우리 다미는 즐길 만큼 즐기다가 시집살이 없는 곳으로 시집보내야지.”

흥얼거리며 방으로 향한 설영이 안방 문을 열었다.

“여보, 연락 왔어요. 이번 주 토요일에 양도민 씨랑 서하, 만나는 걸로.”

“벌써? 너무 이른 거 아니야?”

“뭐가 일러요. 질질 끄는 것보다야 낫지.”

경호가 보던 신문을 접어서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분명 조건이 좋은 상대임에도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서하가 진심으로 결혼을 원하는 건지, 물어볼 수 있음에도 물어보지 못한 자신이 한심스러우면서도 경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서하한테 미리 말하고 약속을 잡는 게…….”

“당신도 참! 이런 건 나한테 전적으로 맡긴다면서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해요. 나중에 고맙다는 소리나 하지 말고.”

잠시 닫혔던 경호의 입술이 다시금 열렸다.

“TA 건설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TA 건설? 그 신생 건설사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 우세헌 대표가 있는 곳.”

“무슨 대표예요, 고작 신생 주제에.”

비아냥거리며 웃음을 터트린 설영이 말했다.

“거기서 왜요?”

“날 만나러 회사로 찾아오겠다더라고.”

“갑자기요?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오나? 그런 거 받아주면 끝도 없으니까 초장에 딱 거절해요.”

경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다른 일로.”

“다른 일?”

“그래. 우리 서하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날카롭게 올라간 설영의 눈매가 더욱 뾰족하게 섰다.

“뭐라고요? 당신, 뭐라고 했어요?!”

“우선 오라고 했지. 이야기는 들어봐야…….”

“무슨 이야기를 들어요!!”

까랑까랑한 설영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지금 수도 투자증권이랑 사돈 맺게 생겼는데 그깟 신생 건설사가 뭐라고. 당신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래도 서하랑 안면이 있는 사이 같은데.”

“무슨 안면이에요! 당신 정말…!”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로 설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 온다는데요?”

“내일 오후 한 시쯤에.”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경호가 세헌을 독대했다가는 휘둘릴 수도 있었다. 싹은 확실하게 자르는 게 좋을 테니까. 설영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럼, 그때 회사로 갈 테니 나도 같이 만나요.”

“당신이 우세헌을 만난다고?”

“네.”

설영이 눈매를 휘어 접으며 교태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 참, 우리 그날 점심 같이 먹을까요?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것처럼.”

“그래.”

“늦지 않게 갈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경호를 보며 설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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