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9화 (10/70)

9화

* * *

서하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운전을 하는 세헌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답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차라리 서하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집안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달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해줄 수 있는 세헌이었다.

서하가 집안에서 인격적으로 무시당하면서도 가족에 집착하는 것은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것이라서 그렇다며 이해하려고도 했지만, 세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 결혼을 하겠다니.’

핸들을 잡은 세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싶은 상대, 서하는 그 이상의 존재였다.

‘평생 옆에 두고 싶을 존재지.’

처음에는 단순히 호기심이었다. 계모와 이복 언니에게 구박을 받는 신데렐라. 그의 흥미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구박을 받으면서도 계모와 이복 언니에게 매달리는 그녀의 마음이 가지고 싶었다. 바보스럽지만 한결같이 매달리는 상대가 계모와 이복 언니가 아닌 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유욕. 그녀의 바보스러울 정도의 한결같음이 그의 소유욕을 깨운 것이었다.

‘정말 변태스럽군.’

짙은 소유욕으로 번진 마음은 이미 맹목적으로 그녀를 향해 있었다.

세헌의 차가 천천히 그녀의 집 앞에 멈춰 섰다. 달칵 소리를 내며 안전띠를 푼 그가 서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서하.”

맑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세헌이 입을 열었다.

“정략결혼, 할 거지.”

“…네.”

“집안에서 정해주는 상대면 누구든 상관없고?”

대답 대신 서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딱 잘라 답하는 세헌을 보며 서하는 이기적이게도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선을 그어놓고 정작 세헌이 선을 긋자 왜 아쉬워하는 건지. 혼란스러운 서하의 얼굴을 보며 그가 건조하게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 봐.”

“아, 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세헌에게 인사를 하고는 차에서 내린 서하는 쉽사리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우뚝 멈춰서서 자신의 차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세헌이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투명할 정도로 빤히 보이는 그녀의 속내가 세헌의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세헌이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서운함이 가득했던 서하의 표정이 일순간 밝아졌다.

“네.”

세헌의 차가 움직이고 나서야 서하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우연히 발코니로 나왔다가 세헌의 차에서 내리는 서하를 발견한 다미의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진서하… 저 계집애가.”

충분히 경고했음에도 서하는 계속해서 세헌을 만나는 듯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 번진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마치 서하를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한 그 눈동자는 한참을 세헌의 차가 멈춰 있던 곳에서 떠나지 못했다.

* * *

노크도 문이 없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서하가 방문에 선 다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 오라는 건 다 사 왔어요.”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잔뜩 미간을 구긴 다미의 시선이 방 한곳에 쌓아둔 쇼핑백으로 향했다.

“빠짐없이 사 왔어?”

“…네.”

감흥 없는 눈빛으로 쇼핑백을 훑던 다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건 그렇고.”

저를 노려보며 다가오는 다미의 모습에 서하가 몸을 움츠렸다.

“너, 아직도 우세헌 만나?”

일순간 서하의 심장이 덜커덩거리며 내려앉았다. 또 같이 있는 모습을 들킨 걸까.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생각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 오늘 우연히…….”

또 손이 날아올까, 두 눈을 질끈 감은 그녀를 향해 다미가 쌀쌀맞게 목소리를 냈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멍청한 걸 꼭 티를 내야 해?”

“…네?”

“너 정략결혼 할 거잖아. 엄마가 상대도 골라놓은 거 같은데. 이 상황에서 다른 남자 만나는 거, 바람이나 마찬가지 아니야?”

다미가 앙칼지게 말끝을 올렸다.

“아니면 뭐, 결혼하고 나서도 우세헌이랑 바람피우려고?”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런데 왜 자꾸 만나? 네 주제를 알아야지. 결혼할 사람이 남자랑 단둘이 만나고 다닌다고 소문 돌면 어쩔 건데. 집안 개망신시키려고 작정했어?”

시선을 떨구는 서하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쇼핑백들을 집어 들었다.

“처신 똑바로 해.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우세헌한테 앞으로 연락하지 말라고 했을 거야.”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서하의 입에서 긴 숨이 터져 나왔다.

“하.”

띠링.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메시지 알림음에 서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휴대폰 액정위로 보이는 글자에 그녀의 마음이 일렁거렸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해.]

한편, 서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휴대폰을 내려놓는 세헌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집안에서 정해주는 상대면 누구든 상관없다라.”

자신 또한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료한 삶이었고 결혼 또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생각은 서하를 만나고 달라졌다. 세헌은 서하를 제 옆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으니까.

서하를 그 집안에서 빼 와 제 옆에 온전히 둘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세헌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TA 그룹 우강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게 된다면 진성 그룹에서 세헌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서하의 집안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결혼하게 둘 수는 없지.”

그가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배도윤.”

-네네, 무슨 일이십니까.

장난기 어린 도윤의 목소리에 짧게 헛웃음을 치고는 세헌이 입을 열었다.

“진성 건설 대표한테 내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

-진성 건설이라면 진서하네 집안 아니야? 갑자기 왜?

“말이 많네, 배 비서.”

-알았어, 알았다고. 무섭게 배 비서라고 부르지 좀 마. 그냥 약속만 잡으면 되는 거야?

세헌의 입꼬리가 매끈하게 섰다.

“아니, 우세헌이 진서하랑 결혼하고 싶어 한다고 전해.”

* * *

커다란 통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명패에 반사되며 부서졌다.

‘수도 투자증권 회장 양대모’라고 쓰인 명패를 등진 노인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도민아.”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풍채만큼이나 크고 힘 있는 목소리. 양 회장의 말에 도민이 고개를 들었다.

“네.”

도민이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지만 어쩐지 눈은 웃고 있지 않은 듯했다.

“선 자리가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네.”

“어느 집안이냐.”

“하나는 화종 그룹이고 하나는 중견 건설사인 진성 건설입니다.”

양 회장이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화종 그룹이면 맞먹으려고 들겠구만. 아무리 집안도 중요하지만 영소 그룹 봤지? 잘난 며느리 하나 들였다가 풍비박산 나는 거.”

“네.”

“어느 정도만 되면야 굳이 같은 수준을 찾을 필요는 없지. 서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우리보다 수준이 낮은 곳이 좋다.”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 같은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도민의 부모님 또한 정략결혼으로 맺어졌으며 자신도 당연하게 정략결혼을 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럼, 진성 건설과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그래, 너는 네 부모처럼 이 할아비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구나.”

양 회장의 말에 도민의 눈빛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그럼요, 회장님.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가보거라.”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선 도민이 회장실에서 빠져나왔다.

“실망시키지 않는다고요?”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부모님을 벼랑까지 몰아넣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주제에 실망 운운하다니.

“할아버지, 착각을 단단히 하시는 것 같네요.”

말 잘 듣는 개인 척하는 것도 단지 복수를 위해서라는 것을 양 회장은 평생 모를 것이었다.

도민이 회장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비서가 바짝 붙어섰다.

“윤 비서님.”

“네.”

“진성 건설한테 연락하세요. 만나 보겠다고.”

서로 눈치를 보는 것보다 오히려 마음껏 휘두르기에는 우리보다 수준이 낮은 곳이 좋다던 양 회장의 말을 떠올리며 그가 입술을 휘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똑같은 수준의 여자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자신이 수도 투자증권을 손에 넣을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내조만 할 수 있는 여자. 도민은 그런 여자를 원했다.

“일이 끝나고 이혼을 해준다면 더 좋고.”

자신이 마음을 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 일이 끝나면 차라리 깔끔하게 이혼하면 좋을 것 같았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만약 있다면 무슨 일이 있든 잡아놔야 했다.

자신의 성공과 복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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