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8화 (9/70)

8화

* * *

“흐으음~”

콧노래를 부르며 손에든 서류를 확인하는 설영의 표정이 유난히 밝았다. 약속으로 밖으로 나가려던 다미가 그녀의 콧노래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입을 열었다.

“엄마,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

“그럼, 드디어 걔를 집 밖으로 쫓아 내버릴 수 있게 됐잖니.”

‘걔’라는 말이 서하를 칭한다는 것을 안 다미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다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진서하가 사라지는 건 좋은데, 걔가 없으면 내 신상은 누가 사다 줘?”

“네가 사야지. 카드는 서하가 쓴다고 하고 너한테 하나 더 발급해줄 테니까 그걸로 써.”

다미는 경호에게 검소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서하가 돈만 쓰는 생각 없는 철부지로, 자신은 동생이 질린 물건들을 쓰는 착한 언니인 척 연기를 하는 것은 모두 설영의 계략이었다. 경호가 친딸인 서하보다 다미를 더 좋아할 수 있도록.

설영이 준비한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에 경호는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처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모든 것을 설영에게 맡긴 경호였지만 점차 그녀를 신뢰하게 된 그는 집안일에 더욱 무관심해졌다.

“알겠어, 엄마.”

다미가 현관을 나서자 설영의 시선이 다시금 손에 들고 있는 서류로 향했다.

“자, 그럼 누가 좋을까.”

새하얀 종이 위에는 큼직하게 남자의 사진들과 신상 정보가 적혀 있었다.

“얘는 우리 집안이랑 수준이 비슷하네? 그럼 안 되지. 적어도 우리보다는 잘나가야지.”

설영이 보고 있는 서류는 바로 서하의 신랑감 후보들이었다.

“얘는 집안이 괜찮고.”

종이에는 사진과 함께 학벌, 성격, 취미 등이 빼곡히 쓰여 있었지만 설영에게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집안이 중요했다. 집안만 된다면 띠동갑 차이 나는 남자나 이혼한 독신이라도 서하와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딱 마음에 드는 집안이 없네, 쯧.”

혀를 차던 설영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수도 투자증권? 회장님의 딱 하나 있는 손자라고?”

수도 투자증권이라면 국내에서 알아주는 투자회사였다. 그런 대단한 곳에 손자라니. 설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 수도 투자증권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으면 나중에 회사는 물려받을 테고. 딱이네, 딱이야.”

집안도 괜찮은데 외모 또한 준수했다. 이 정도면 경호에게 보여줬을 때,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을 듯싶었다.

“쯧, 아깝긴 하네. 이 정도면 우리 다미랑 짝지어줘도 괜찮을 텐데.”

그 정도로 설영이 생각하기에 서하에게는 과분한 상대였기에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미는 더 데리고 있다가 시집보내야지, 금쪽같은 딸인데 벌써 보낼 수는 없지.”

애써 마음을 달래며 설영이 손에 든 종이를 챙겼다. 상대도 정했으니 남은 것은 경호를 설득하는 일이었다.

“뭐, 수월하겠네.”

지금도 제 손에서 움직이는 경호가 반대할 리 없다는 생각에 설영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서둘러 안방으로 향한 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서랍에서 짙은 립스틱을 꺼내 바르는 설영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 * *

“일찍 오셨네요?”

경호가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설영이 그에게 다가섰다.

“응.”

“고생했어요. 밥 먹게 어서 씻고 와요.”

평소보다 더 간드러진 목소리에 경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

“좋은 일 있는 것 같아서.”

“어머, 티 나요? 호호.”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설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서하 신랑감이 딱 나타났지 뭐예요? 그것도 아주 근사한 사람으로.”

서하의 신랑감이라니. 경호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설영을 쳐다봤다.

“신랑감?”

“네.”

한껏 온화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설영이 챙겨둔 종이를 경호에게 건넸다.

“서하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신랑감을 구해봤거든요.”

“서하가 결혼하길 원했다고?”

“네.”

설영의 대답에 경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아무리 친딸이었어도 경호는 서하를 잘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음식은커녕 그녀의 혈액형조차 헷갈렸다.

“…아직은 이르지 않나.”

“이르다뇨, 서하가 몇 살인데.”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기에도 너무 늦은 일이었다.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경호는 서하를 전적으로 설영에게 맡겨버렸는데, 지금에서야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다미도 아직이잖아.”

“언니라고 꼭 먼저 가야 하는 법 있나요? 그리고 다미는 아직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니, 결혼 원하는 서하 먼저 시키는 게 맞죠.”

“그래도.”

쉽게 설득시킬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경호가 완고하게 나오자 설영의 눈가가 매서워졌다.

“지금 상대가 누군지 알고 그러는 거예요? 무려 수도 투자증권 회장님의 손자라고요.”

“수도 투자증권?”

경호의 눈이 커졌다. 수도 투자증권이면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투자회사였으니까. 진성 건설과 매출액을 비교해도 월등히 뛰어난 곳이었다.

“얼굴도 준수한 데다가 나이도 서하보다 딱 두 살 많고. 이 정도면 돈만 쓸 줄 아는 서하한테 너무 과분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니까요?”

“당신…!”

“왜요?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서하가 쇼핑만 하고 집에서 놀고먹는 건 사실이잖아요. 어쨌든 한번 만나보라고 할 거예요. 서로 얼굴 보고 결혼을 하든 말든 하겠죠.”

경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는 조금 전 설영이 건네준 종이를 들여다봤다.

“서하가 좋다면야.”

“좋아할 거예요. 얼굴도 준수하고 집안도 좋고 이만하면 일등 신랑감이지. 그럼, 서하 괜찮은 날 맞춰서 날 잡아볼게요.”

맞장구치는 설영의 말에 경호는 탐탁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서하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줘.”

“알겠다니까요. 당신도, 정말.”

못마땅한 표정으로 답한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에는 허락할 것을 질질 끌기는.’

비스듬히 휘어진 붉은 입술이 께름칙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비웃는 것처럼.

* * *

“결제는 평소처럼 일시불로 하면 될까요?”

직원의 물음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미 양손 가득 들려있는 종이백은 모두 다미가 시킨 물건들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내민 종이백을 힘겹게 받아든 서하가 몸을 돌렸을 때,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오늘은 더 많아 보이는데.”

“…세헌 씨?!”

놀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세헌이 가볍게 입술 끝을 올렸다.

“백화점 오면 연락하라고 했지.”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진서하가 있는 곳에 내가 없을 리가.”

능청스럽게 말하는 세헌을 보며 서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들으면 스토커인 줄 알겠어요.”

“남들이 뭐라는 건 상관없는데.”

“그러다 잡혀가요.”

“그럼 막아줄 거 아니야?”

세헌이 서하가 든 쇼핑백을 뺏어 들었다.

“또 어디 가야 해.”

“살 건 다 샀어요.”

“그럼, 밥 먹으러 가지.”

“밥이요? 잠깐…!”

서하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가 앞장섰다.

“세헌 씨…!”

“왜.”

어느새 옆에 바짝 선 서하가 입을 열었다.

“잠깐,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다는 서하의 말에 그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무슨 할 말.”

“그게…….”

이야기를 나눌 마땅할 장소를 찾기 위해 서하가 주위를 살폈다. 작은 카페를 발견했지만 이미 자리는 만석이었다. 고민하는 서하를 향해 세헌이 말했다.

“우선, 차로 가지.”

차라리 사람 많은 곳보단 단둘이 이야기할 수 있는 차 안이 좋을 것 같았다.

성큼 앞서가는 세헌의 뒤를 서하가 쫓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향할 때까지 두 사람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타.”

그가 조수석의 문을 열자 서하가 군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고마워요.”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운전석에 앉은 세헌이 상체를 돌리고는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아, 그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저, 결혼할 것 같아요.”

일순간에 시공간이 멈춘 듯했다. 눈 깜빡임조차 잊은 채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를 응시했다.

“결혼?”

정적을 먼저 깬 것은 세헌이었다.

“…네.”

“누구랑.”

“아직 안 정해졌어요.”

세헌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안 정해졌다고? 설마, 정략결혼이라도 되나?”

부정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문 서하를 보며 그가 짧게 숨을 터트렸다.

“진서하.”

그가 이름을 불렀음에도 바닥으로 향한 서하의 시선은 올라오지 않았다.

“나 좀 봐.”

다정하면서도 내려앉은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건조한 표정으로 그가 서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선택한 거야, 집안에서 강제로 시키는 거야.”

세헌의 물음에 그녀의 눈동자가 동요하듯 엷게 진동했다.

“집안에서 시켰나 보네.”

“…아니에요.”

“아니긴.”

안 봐도 뻔했다. 그녀가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세헌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분명 가족을 운운하며 뒤흔들었을 테고 선택지가 없는 서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따랐을 터였다.

“하지 마, 그런 결혼.”

그의 입술에서 단호하게 흘러나온 말에 서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미 하기로 했어요.”

“네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

“저도 동의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이 동의한 거고.”

미간을 구기며 세헌이 말을 이었다.

“이용당하는 거야.”

이용당한다는 것쯤은 서하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절하지 못했다.

“…알면서 하는 거예요.”

“진서하.”

“아마 이해 못 할 거예요. 왜 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하지만…. 제게는 당연한 거예요. 평생을 이렇게 살았으니까.”

건조했던 세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를 이해하라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멸시를 받으면서도 왜 그렇게 맹목적으로 집안에 남고 싶어 하는 건지.

오랜 학대로 인한 학습은 그녀의 판단력을 망가트렸다. 떨리는 목소리로 서하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의견…. 존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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