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서하와 세헌이 같이 있다고 생각하자 다미는 속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엄마, 걔 빨리 결혼시켜버려! 걘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되니까.”
“나도 그러려고 하고 있어. 아무나 결혼시켜버려도 상관없는데, 이왕이면 집안에 도움이 되는 결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니?”
조소 띤 얼굴로 설영이 말을 이었다.
“우리 진성 건설에 도움이 되는 집안으로 서하를 시집보내야, 우리 다미가 편하게 남편감을 찾지.”
“그런 집안이 있어?”
“찾아보면 있겠지.”
잔뜩 일그러졌던 다미의 표정이 천천히 풀렸다.
“엄마, 빨리 찾아서 시집보내버려. 나, 걔 거슬려서 못 참겠어.”
설영이 손을 뻗어서는 토닥이듯 다미의 볼을 쓸어내렸다.
“걱정하지 마, 우리 딸.”
서하가 거슬리는 건 설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은 전 부인의 딸, 처음에는 불쌍해서 마음을 붙이려고도 했지만, 정이 가질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딸인 다미보다 더 제 딸인 척하려는 서하가 설영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러려면 서하를 잘 구워삶아야겠지?”
그 말에 다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구워삶아?”
“그래, 군소리 안 하고 결혼할 수 있게 말이야.”
설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스쳤다.
* * *
“세헌 씨.”
서하의 부름에 그의 고개가 그녀에게 향했다.
“세헌 씨는 인기 많죠?”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냥요…….”
어제부로 다미가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외적인 부분이나 내적인 부분,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세헌은 분명 매력적이었고 그런 그가 자신을 만난다는 것에 서하는 의아하기도 했다.
“우리 언니 이름이 진다미인데… 세헌 씨도 알죠?”
그녀의 입에서 다미의 이름이 나오자 세헌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언니가 인기가 참 많거든요. 화려하고 예쁘면서도 청순하고…. 남자들은 그런 여자 좋아하잖아요.”
주춤거리며 움직이는 입술 사이로 속내가 터져 나왔다.
“저같이 평범한 애보다…….”
“자격지심이야?”
날카롭게 귓가에 꽂히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들었다.
“네?”
“왜 널 걔랑 비교해. 걘 걔고 넌 넌데.”
서하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자격지심. 맞을 수도 있었다. 서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다미와 비교당하며 살았으니까.
무조건 언니보다 모자라야 했으며 못나야 했다. 그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는데 세헌을 만나고 난 뒤부터는 달라졌다.
“너랑 비교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어. 진서하는 진서하뿐이니까.”
그의 말이 서하의 심장을 잔잔하게 울렸다.
“세헌 씨…….”
“조금 더 당당해져도 될 것 같은데.”
건조하게 내뱉은 말에는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내 눈에는 그 누구보다 진서하가 가장 예뻐서 미치겠으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헌을 빤히 바라보던 서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빈말인 거 다 알아요.”
“빈말 아닌데.”
세헌이 딱 잘라 말했다.
“누가 빈말이래. 미친놈처럼 너한테 매달리니까, 내가 빈말할 놈으로 보이나 봐.”
조금의 거짓도 없이, 몸쪽으로 꽉 찬 돌직구를 던지는 그가 부담스러웠지만 서하는 밀어내고 싶지는 않았다.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야. 진서하가 내게 마음이 열 때까지.”
진동하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세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진서하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질 때, 이런 느낌이었나 싶었다. 그가 준 선악과가 너무 달아서 서하는 현실을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세헌 씨…….”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의 마음을 알면서도 서하는 외면해야 했다.
설영의 말대로라면 서하는 원하지 않더라도 정략결혼을 해야 했다. 설령 그에게 마음이 가고 있다고 한들 괜한 희망 고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설영의 말을 거역할 힘은 서하에게 없었으니까.
“저는…….”
“지금 대답해 달라는 거 아닌데.”
달칵. 세헌이 그녀의 안전띠를 풀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천천히 지켜봐.”
단호하면서도 간절한 그의 목소리에 서하는 벌어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들어가. 연락할게.”
“…아, 네. 오늘 고마웠어요.”
서하가 서둘러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그의 차에서 내렸다. 신경 쓰이는 듯 세헌을 힐끔거리며 돌아보던 그녀가 대문의 문을 열었다.
서하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괜한 조급함에 속내를 보인 것이 신경 쓰인 걸까, 세헌의 표정이 어두웠다.
지잉.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액정 위에 뜬 메시지를 읽어내려갔다.
[조심히 가세요.]
“귀엽긴.”
짧은 메시지였지만 서하가 보낸 그 메시지에 굳어 있던 세헌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끈적였다.
잠시 후, 세헌의 차가 움직였다.
한편 천천히 멀어지는 세헌의 차를 자신의 방 창문에서 바라보던 서하는 손에 든 휴대폰을 꼭 쥐었다.
그의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서하는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세헌이 항상 직설적으로 표현했기에 그의 마음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애써 그의 마음을 모른 척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서하에게 낯선 것이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한번 사랑의 맛을 알게 된다면 애정 결핍인 자신이 더욱 그 사랑에 매달리게 될까 봐.
“미안해요.”
아직은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서하였다. 설영과 다미의 오랜 학대, 그것은 그녀를 모든 것에서부터 고립시켰다.
똑똑. 평소 같았으면 벌컥 열렸을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자 창문 앞에 서 있던 서하가 화들짝 놀랐다.
끼익. 방문이 열리며 설영과 다미의 모습이 보이자 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서하야.”
날 선 눈매를 억지로 휘며 설영이 그녀를 불렀다.
“…네.”
“앉아 보렴. 할 말이 있으니까.”
무슨 할 말일까. 의심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서하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았다.
“지난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지?”
“지난번이요?”
“그래. 정략결혼 말이야.”
덜커덩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작게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며 서하가 입을 열었다.
“…정략결혼을 꼭 해야 하나요…?”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설영이 짧게 실소를 터트렸다.
“어머, 서하야. 우리 같은 집안은 당연히 해야지. 같은 수준의 집안끼리 결혼해야 서로 이득이고 사는 것도 잘 산단다. 그리고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뜸을 들이던 설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네 아버지, 요즘 걱정이 많으시단다. 요즘 수주가 줄었다고. 한창 불경기잖니. 회사가 어려우면 구조조정도 해야 하는데 그 많은 직원은 어떡하니. 다들 네 아버지만 보고 있는데 말이야.”
설영이 힐끗 서하의 표정을 살폈다. 설핏 내리깐 속눈썹 아래로 걱정으로 물든 서하의 눈동자에 설영의 입가가 미묘하게 휘었다.
“이럴 때 든든한 사돈이 필요한 거야.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큰 자리에 계신 분이 사돈이면 수주도 밀어주고 얼마나 좋겠니?”
한껏 다정한 목소리로 설영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미가 언니기도 하니까 먼저 정략결혼을 해야겠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지금 다미는 하고 싶은 것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너부터 결혼시키는 게 맞다고 생각해. 너는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게 아니잖니?”
하고 싶은 일이 없다는 것에 서하는 부정할 수 없었지만 애초에 그녀가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 것은 설영과 다미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입술을 꾹 다문 서하를 보며 다미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집안을 위해서 정략결혼 할 생각이야. 키워주신 아버지 은혜는 갚아야지?”
빤히 보이는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서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정략결혼으로 집안에 겉도는 신세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
스치듯 세헌의 얼굴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자신을 향해 올곧게 마음을 표현하던 세헌이 너무나도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웠다. 그는 서하와 달리 존재만으로도 너무나도 빛나는 존재였다.
‘나 까짓거랑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지독한 애정 결핍은 서하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자유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게.
“…알겠어요.”
포기하듯 내뱉은 서하의 말에 설영과 다미의 표정이 활짝 폈다.
“잘 생각했어. 너도 이제야 집안에 도움이 좀 되는구나.”
“애가 생각은 있다니까?”
“그러게. 신랑감은 내가 괜찮은 사람으로 찾아놓을 테니 걱정 말고.”
설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미 옆에 섰다.
“너도 언니니까 서하 결혼 준비 잘하게 도와주고.”
당근이라도 주는 걸까. 평소에는 꺼내지도 않던 언니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설영이 눈가를 접었다.
“바쁜데 뭐, 어쩔 수 없지.”
말과는 다르게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짓는 다미의 팔을 끌며 설영이 말했다.
“이야기는 잘 끝난 거 같으니 이만 나가보마.”
달칵. 두 사람이 나가고 방 안에 혼자 남은 서하의 시선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답답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은 답답함이 서하의 목을 옥좼지만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애초부터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길들여진 그녀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