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 * *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서하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졌다.
“아…….”
무심결에 눈가를 비비던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었나 보네.”
새벽 내내 눈물을 쏟아내서인지 두 눈덩이가 퉁퉁 부어있었다.
지잉-
찬물로 가라앉히면 나아질까, 욕실로 향하려던 서하는 휴대폰 진동에 움직임을 멈췄다.
“세헌 씨?”
액정 위에 선명하게 뜬 이름에 주춤거리던 그녀가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이윽고 서하의 귓가로 달콤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내가 깨운 건가.
“아니에요. 일어나 있었어요.”
세헌이 피식 소리를 냈다.
-오늘은 뭐 할 생각이지?
“오늘이요? 따로 생각해보지는 않았는데…….”
-밥 먹을까.
“네?”
-밥. 지난번에 장어덮밥 먹고 싶다고 했잖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것을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서하가
놀란 듯 물었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네가 한 말은 다 기억하고 있어.
그가 단순히 기억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서하의 심장이 이상할 정도로 요동쳤다.
-그래서 대답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려던 서하가 멈칫했다. 지난밤, 세헌과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다미에게 맞았던 것을 떠올리자 설렘으로 가득 찼던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아.”
-한 시간 뒤에 데리러 갈게.
“잠깐…!”
뚝 끊긴 통화에 서하가 그대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거절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머리로는 만나지 말자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세헌 씨 만나는 게 좋아.”
단지 그 이유였다. 만나면 좋으니까. 천덕꾸러기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그가 좋았다. 유일하게 소속감을 느끼는 때도 세헌을 만날 때였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니까…….”
평생 어딘가에 속해본 적 없는 그녀에게 세헌이 주는 소속감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었기에 쉽게 놓을 수는 없었다. 부디 오늘은 자신과 세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길 바라며 서하는 욕실로 향했다.
* * *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직하게 내뱉는 세헌의 눈썹은 매섭게 올라가 있었다. 조금 전 들었던 가라앉은 서하의 목소리가 그의 신경을 거슬렸다.
“또 이복 언니가 괴롭히기라도 한 건가.”
쯧 소리를 내며 세헌이 천천히 차창 밖, 그녀의 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대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그의 눈동자가 작게 진동했다.
구불거리는 단발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동그랗게 뜬 큰 눈이 세헌의 차를 발견하고는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똑똑. 그녀가 세헌의 차창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는 조수석 문을 열어젖혔다.
“세헌 씨.”
꿀이라도 발라놓은 걸까. 미끈한 목소리가 세헌의 귓가를 끈적하게 만들었다.
“어서 와.”
“기다렸어요? 늦지 않게 나온 줄 알았는데…….”
“제대로 나온 거 맞아. 내가 일찍 온 거니까.”
서하에게는 한 시간 후에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미 그녀를 향해 가고 있던 세헌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하가 볼멘소리를 냈다.
“갑자기 한 시간 뒤에 데리러 온다고 하면 어떡해요. 내가 어디 있을 줄 알고.”
뻔했다. 서하가 있을 곳이라고는 집 아니면 백화점이었다. 세헌이 그녀를 지켜본 바로는 겉모습과 달리 소극적이었으며 내성적이었다. 어쩌면 밝았을지도 모르는 그녀였지만 아마 오랫동안 설영과 다미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받아서 변해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세헌은 생각했다.
“왠지 집에 있을 것 같았어.”
그가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장어덮밥집 예약했는데.”
“예약도 해놨어요?”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그래도 돼요?”
“그래서 네 기분이 나아진다면야.”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을 하는 세헌에게서 서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준다는 것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서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세헌 씨는 왜 저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이유 없어.”
“네?”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 굳이 말해야 한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잘 보이고 싶으니까.”
“…저한테 잘 보이고 싶다고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세헌을 보며 서하는 놀란 듯했다.
서하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은 했어도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왜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아…….”
서하가 멈칫하자 세헌이 작게 혀를 차며 웃었다.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목적지에 도착한 건지 차를 멈춰 세운 세헌이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 잘 보이고 싶냐고?”
서하를 담은 짙은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흑심 있어서. 이러면 진서하가 날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고.”
“저, 세헌 씨 좋아하는데…! 세헌 씨랑 만나면 즐겁고…….”
“내가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닌데.”
매끈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세헌이 말을 이었다.
“그 작은 머리로 잘 생각해봐.”
운전석에서 내리는 세헌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하가 서둘러 짐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쪼르르 뛰어와서는 제 옆에 바짝 선 서하를 흘끗 내려다본 세헌이 만족한 듯 시선을 들었다.
흑심. 서하를 향한 그의 마음에는 부정한 것들로 가득했다. 서하의 마음뿐만이 아니라 몸, 그녀의 전부를 자신의 것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진짜 그럴 생각인데.”
세헌의 중얼거림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뭐라고 했어요?”
“아니.”
순진한 눈동자를 보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들끓는 독점욕과 소유욕이 너를 속박하고 옭아매려고 하고 있다고 세헌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들어가자.”
“네.”
식당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세헌이 직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세헌, 두 명 예약했습니다.”
“우세헌 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가림막이 처져 있는 자리에 앉게 된 두 사람이 메뉴판을 훑었다.
“전 장어덮밥 먹을래요.”
“다른 건.”
“괜찮아요. 배부를 것 같아요.”
서하의 말에 그가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말했다.
“같은 걸로 주세요.”
직원이 자리를 뜨자 세헌의 고개가 다시금 그녀에게 고정됐다.
“기분은 나아졌나.”
“알고 있었어요?”
“응.”
“나, 티 안 냈는데…….”
우울하지 않은 척 노력했던 서하였기에 더욱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어. 네 기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서하만 가능했다. 세헌이 목소리만 듣고 기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래서.”
“네?”
“왜 기분이 그랬는데.”
세헌의 물음에 작게 고개를 저은 그녀가 답했다.
“별일 아니었어요. 이제는 기분도 나아졌는걸요?”
기분이 나아졌다는 말에 세헌은 안심했지만, 아직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거슬리는 감정이 남아있었다. 서하가 혼자 앓는 건 싫었다. 그녀가 차라리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길 바랐다.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무슨 일 생기면 말해.”
무덤덤하게 말하는 세헌을 보며 그녀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때마침 장어덮밥을 가지고 온 직원이 테이블 위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호화스럽게 밥 위를 덮은 장어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서하를 바라보던 그가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에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지.’
메시지를 확인한 세헌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지만 이내 신경 쓸 일 아니라는 듯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세헌 씨, 오늘 뭐 해요? 전시회 표가 생겨서요. 같이 보러 갈래요?]
세헌이 가볍게 무시해버린 다미의 메시지였다.
* * *
“왜 답장이 없는 거야!”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침대로 던진 다미가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천하의 진다미가 이깟 남자 하나에 목매다니. 아니지, 아니야. 우세헌이 이깟 남자 하나는 아니지.”
세헌은 다른 남자와는 달랐다. 고고하면서도 높게 쌓아 올린 탑 위에 올라선 것 같은 남자였다. 보통 다미가 먼저 호감을 표시하면 모두 다 기다렸다는 듯 행동했는데 세헌만큼은 달랐다. 오히려 차갑게 그녀를 내쳤다.
“묘하게 승부욕을 끓어오르게 한다니까?”
가지고 싶었다. 빳빳하게 선 고개를 제 앞에서만 숙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다미가 침대 위로 던진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세헌의 번호를 누르고는 통화버튼을 눌렀지만, 신호음이 얼마 가지 못해 달칵 끊겨버렸다.
“하, 우세헌!”
주먹을 불끈 쥔 채 휴대폰을 노려보던 다미가 방문에서 나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 딸, 얼굴이 왜 그래?”
방문을 열고 들어온 설영이 잔뜩 성이 난 다미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듯 물었다.
“우세헌이 연락을 다 무시하니까 짜증 나서.”
“우세헌? 그 TA 건설 대표?”
“응.”
설영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
“다미야, 엄마가 말했지? 사람은 급이 맞아야 한다고. 엄마는 우리 다미가 그 정도 남자로 만족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엄마도 참, 걱정하지 마. 우세헌은 잠깐 연애하려고 하는 거라니까?”
“그래도. 그 남자, 서하랑 만난다며. 딱 끼리끼리 어울리는 게…!”
“악! 그년, 이야기 꺼내지도 마. 주제도 모르는 게 어디서 우세헌을.”
다미가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질투로 물든 눈동자가 허공을 이리저리 떠돌았다.
“엄마, 진서하 아까 나갔지?”
“그래, 아까 약속 있다고 나가더라. 집에 처박혀있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아예 확 나가버렸으면 좋겠네.”
중얼거리는 설영을 보던 다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걔가 약속이 있다고?”
내성적인 것도 모자라 낯도 심하게 가려서 친구도 없는 진서하가 약속이 있다고?
눈동자를 굴리던 다미가 인상을 썼다.
“그 계집애, 혹시 우세헌 만나는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