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 *
“아니, 이름도 모르는 여자를 자기가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알아 오라는 게 말이 되는 거냐고.”
도윤은 머리카락을 쥐어 잡은 채 좌절감을 맛보는 중이었다.
“진성 건설이라고 했지? 진성 건설…….”
진성 건설. 손꼽히는 건설사는 아니었지만 이름은 알아주는 중견기업이었다. 비록 지금은 예전의 그 명성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건설업계에서는 유명했다.
“진경호 대표…….”
도윤이 제 손에 들린 서류를 찬찬히 훑었다. 서류에는 경호의 가족사진과 함께 빼곡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부인은 홍설영. 두 번째 부인이고.”
한참을 읽어내려가던 도윤의 눈가가 반짝하고 빛이 났다.
“뭐야, 첫째 딸은 두 번째 부인이 데리고 온 딸이네? 둘째 딸은 죽은 첫째 부인 딸이고.”
뭔가를 알았다는 듯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호텔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에 울고 있던 여자, 그리고 그 여자에게 날 선 말을 쏟아냈던 또 다른 두 명의 여자를 떠올리며 도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새엄마와 이복 언니한테 구박당하는 신세라니……. 완전 신데렐라네.”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도윤이 그대로 종이를 움켜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로 건너편에 있는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도윤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제대로 알아 왔다!”
도윤의 말에 모니터에 고정됐던 세헌의 시선이 천천히 들렸다.
“그래서.”
도윤이 당황한 듯 세헌에게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라니! 열심히 정보를 찾아온 사람한테!”
“시켰겠지.”
“…시켰어도 아무튼 알아 왔잖아.”
세헌이 무심한 얼굴로 알았다는 듯 턱짓을 했다.
“말해봐.”
“진서하. 28살. 진성그룹 막내딸!”
도윤이 들뜬 얼굴로 제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세헌에게 내밀었다.
“직업은 백수. 자주 출몰하는 곳은 백화점이래. 쇼핑을 좋아한다나? 올 때마다 신상품 다 털어간다는데? 더 알아보려고 했는데 친한 친구가 없더라고.”
“그래?”
건조하게 답한 세헌이 도윤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확실한 건, 그때 너 만나볼까 어쩐다고 말하던 여자는 그 진서하 씨 이복 언니인 거 같고. 같이 있던 다른 여자는 새엄마인 것 같아.”
도윤의 말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세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들과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은 지난번에 들었던 대화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정보였으니까.
“진 대표님이랑 피는 섞인 건가.”
“응. 진경호 대표 친딸은 맞아. 첫 번째 부인의 딸이라고 했으니까.”
세헌이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도윤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뭐야, 찾았는데 연락 안 해봐? 휴대폰 번호도 있으니까 연락해봐. 며칠 내내 진서하 씨, 찾고 싶어 했잖아.”
왜 자신이 들뜬 건지 도윤은 상기된 얼굴로 세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세헌이 누군가를 이렇게 찾은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앙갚음하기 위해서 찾은 적은 있었지만.
“너, 진서하 씨한테 반한 거 아니었어?”
도윤의 말에 세헌이 나가보라는 턱짓을 했다.
“가서 일해.”
“진짜 연락 안 한다고?”
다시금 세헌이 나가라는 턱짓을 하자 도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이내 도윤이 대표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세헌의 시선이 다시금 서류로 향했다.
톡. 톡. 톡.
길게 뻗은 손가락 하나가 일정하게 책상 위를 두드렸다. 마치 초침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세헌의 초조한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명함을 줬는데 연락은 없고.”
그렇다고 제가 먼저 연락했다간 놀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으니까.
“뭐가 좋으려나.”
일정하게 책상 위를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벗어둔 재킷을 챙겨 들었다.
“어, 어? 어디가?”
갑작스럽게 대표실을 나온 자신을 보며 묻는 도윤을 향해 세헌이 목소리를 냈다.
“진서하, 자주 가는 백화점이 어디야.”
* * *
평일 이른 오후라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이 없는 백화점 내부를 훑으며 서하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유리창 너머로 진열된 옷들과 액세서리들이 저마다 빛을 내며 서하를 유혹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건조하기만 했다.
“바바리코트 그리고…….”
아침부터 제게 신상 코트를 사 오라고 윽박지르던 다미를 떠올리며 그녀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또 뭐 사 오라고 했더라…….”
그 윽박에 서하가 신상 코트를 사러 백화점을 간다고 하자 다미는 아예 리스트를 만들어 메시지로 보냈다.
메시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 가방을 뒤지던 서하에 손에 매끄러운 실크의 촉감이 느껴졌다.
“아…….”
휴대폰이 아닌 제 손에 닿은 것을 꺼내든 서하의 입에서 짧게 숨이 터져 나왔다.
손수건. 며칠 전 울고 있던 제게 세헌이 준 손수건이었다.
“돌려줘야 하는데.”
손수건을 받은 그날 저녁, 깨끗이 빨아서 말리고는 다림질까지 했지만, 막상 전화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돌려주지 못한 채 서하의 가방 속에 있던 것이었다.
“전화해볼까…….”
주눅이 들어 있는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빛이 났던 사람. 서하의 머릿속에 세헌의 모습은 닿을 수 없는, 반짝이는 별 같은 사람이었다.
“귀찮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길 가다가 우연히 손수건을 준 것뿐인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 쓰고 돌려달라던 그의 말이 진심이기를 바랐다.
“답답해…….”
자신이 우유부단하다는 것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제 모습이 끔찍이도 싫은 서하였지만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잔뜩 주눅 들어버린 성격은 이미 제 몸에 가득 배서는 한 몸같이 변해 있었으니까.
손수건을 쥔 서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
왜 이럴 때도 망설이고 답답하게 구는 건지. 한심한 자신에게 질린 서하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때, 그녀의 머리 위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해할 텐데.”
그 소리에 서하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내 손수건을 그렇게 꽉 쥐고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그였다. 자신과 달리 당당하고 빛이 났던 사람.
“꼭 그쪽이 내 생각을 한 것 같잖아.”
우세헌.
“우, 우세헌 씨?”
놀란 서하의 두 눈에 세헌의 모습이 담겼다.
“내 이름도 알고.”
내리깐 눈꺼풀 아래로 서늘한 시선이 서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야…….”
“그러니까 더 오해할 거 같은데.”
무슨 오해를 한다는 걸까. 아니, 지금 서하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긴 어떻게…?”
“우연히 백화점에 들렀는데 그쪽이 있네요.”
“아…….”
백화점.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에 어떻게 왔냐니.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 서하가 입술을 물었다. 그런 서하를 바라보던 세헌이 입을 열었다.
“그거. 나 돌려주려고?”
세헌의 질문에 서하가 손에 들린 손수건을 반사적으로 뒤로 숨겼다.
“아니, 그 구겨져서요…. 다음에 다시…….”
“다음에 언제.”
“그게…….”
“명함도 줬는데 안 돌려줬잖아요.”
그 말에 서하가 서둘러 목소리를 냈다.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근데…….”
“근데.”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집요했다.
“혹시나 많이 바쁘실까 봐…….”
순간 세헌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렇게 귀여워서야. 가녀린 것과는 먼 얼굴로 순진하게 말하는 그녀가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진심인가?”
“진짜예요!”
순수한 눈동자가 올곧게 세헌에게 향했다. 그 눈을 잠시 빤히 바라보던 세헌이 입을 열었다.
“그럼, 돌려주세요.”
“아, 네!”
뒤로 숨겼던 손수건을 내밀던 서하가 멈칫했다. 빳빳하게 다려놓은 손수건이 어느새 꾸깃꾸깃하게 바뀌어 있었다.
“아…. 혹시 다음에 드리면 안 될까요.? 너무…….”
차마 너무 구겨져 있어서 주기 민망하다는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다음에 꼭 제가…!”
“명함을 줬는데도 연락도 안 하던데.”
“그건!”
“뭘 믿고 내가 그쪽을 더 기다리죠.”
맞는 말이었다. 그의 명함을 받아 연락처를 알았음에도 그 흔한 감사 하다는 말이나 손수건을 돌려드리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마땅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던 서하가 결심한 듯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제 이름은 진서하예요. 이건 주민등록증이에요. 원하시면 지갑도 맡길 수 있어요. 그러니까 믿어주세요. 꼭 돌려드릴게요.”
처음 보는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세헌의 눈썹이 흥미로운 듯 추켜 올라갔다.
“진서하.”
“네, 제 이름이에요.”
그녀의 두 손에 가지런히 들려있는 주민등록증을 바라보던 세헌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서하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닿았다. 느리게 움직이는 손끝 아래로 느껴지는 감촉이 왠지 부끄러운 그녀가 몸을 슬쩍 뺐다.
그러자 세헌이 가볍게 입술을 휘며 말했다.
“그럼 다시 돌려받을 때까지 이건 제가 가지고 있도록 하죠.”
그 말에 긴장했던 서하가 그제야 안심한 듯 내내 동그랗게 떴던 눈을 휘어 보였다.
“네!”
“그런데.”
“네…?”
서하의 주민등록증을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으며 세헌이 다시금 그녀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기다린 값은 받아야겠는데.”
“…기다린 값이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서하와 시선을 맞췄다. 짙고도 깊은 그의 눈동자에 마치 홀린 듯 멍해진 그녀를 향해 세헌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저녁, 같이 먹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