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3화 (4/70)

3화

* * *

“대표님!”

연회장 밖을 나온 세헌의 뒤로 빠르게 뒤따라온 도윤이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야, 우세헌!”

긴 다리를 자랑이라도 하듯 성큼성큼 앞으로 향하는 세헌의 옆을 힘겹게 따라 선 도윤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인사하는 자리인데, 이렇게 박차고 나오면 어떡하냐. 젊은 놈이 대표인 것도 아니꼬운데 건방지기까지 하다고 그러면 어쩌려고 그래.”

그의 잔소리에 느긋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린 세헌이 입을 열었다.

“의도가 뻔한 질문들, 답해주기 지겨워.”

“그래도 그렇지. 좀 참았으면…….”

“시끄러워.”

세헌에게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들이었다. 자신의 빈틈을 찾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은.

그래서 의도적으로 숨겼다. 자신이 TA 그룹 우강 회장의 하나뿐인 아들이란 사실을. 그래야 조금은 편안해질 것 같았고 자신이 TA 그룹 회장의 아들이 아닌 우세헌이라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숨겼음에도 거북한 것은 여전했다.

건설사 대표라는 사람들은 마치 며칠 굶은 하이에나처럼 저를 향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작은 빈틈이라도 보이면 물고 늘어지겠다는 그들의 뻔한 의도에 그의 입가에 조소가 서렸다.

“경계할 만도 하지.”

세헌이 아버지인 우강 회장은 건설업을 시작하기 위해 오랫동안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일찍이 알고 있던 세헌은 자신이 경영할 기회를 달라고 우 회장에게 요청했다. 이미 대기업으로 성장한 TA 그룹의 후계를 물려받기 전에 자신의 진가를 확인하고 싶다며.

그 말에 우 회장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세헌은 그 허락에 대한 보답을 톡톡히 해냈다. TA 그룹의 집중적인 투자도 있었지만, 세헌의 천부적인 경영 능력은 TA 건설을 단숨에 급성장하게 했다.

굵직한 건설사들을 긴장하게 할 만큼. 그 때문에 건설사 대표들이 세헌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TA 건설이 점차 유명해진다면 결국 세헌이 우 회장의 아들이란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언론에서 분명 떠들어대겠지.”

그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건설사 대표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빤히 보였다.

“지금보다 더 지겨워지겠네.”

내려앉은 음성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도윤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넘어가.”

“회장님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하고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도윤이 지금껏 친구로서, 비서로서 십여 년간 세헌을 옆에서 지켜보았지만, 오늘처럼 선을 넘는 질문이나 은근하게 깎아내리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래, 알겠다. 나 차 가지고 올게. 실외 주차장에 세워놔서 금방 올 거야. 여기 있어.”

도윤이 서둘러 실외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돌리는데 세헌이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었다.

“같이 가.”

“응? 같이 가자고?”

“어.”

세헌은 답답했던 찰나에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주차장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그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여기에 있었니?! 어딜 간다면 간다고 해야 할 거 아냐! 애가 왜 이러는지 몰라, 정말.”

잔뜩 성이 난 중년 여자의 말 뒤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여기서나마 눈에 튀고 싶었나 보지. 엄마, 무시해. 얘가 이러는 거 한두 번이야?”

비아냥거리는 말투. 그 말투가 묘하게 거슬린 세헌의 고개가 소리 난 쪽으로 향했다.

작은 나무들과 화단 사이 언뜻 보이는 인영들로 그의 시선이 멈췄다.

“쯧, 어쩜 마음에 두는 구석이 하나도 없을까.”

“그런데 얘도 정말 눈치 없다. 이렇게 구박받으면 집 나갈 생각도 할 텐데. 끝까지 붙어있는 거 봐.”

“지 엄마가 생전에 눈치가 없었나 보지.”

비아냥이 섞인 중년 여자의 말에 그 딸이 웃음을 터트리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엄마, TA 대표 너무 잘생겼지? 그 나이에 대표면 능력도 있고. 이름이 우세헌이라고 했던가? 어디 한번 만나나 볼까?”

자신감이 찬 어조로 말하는 딸을 향해 그 어머니가 꾸짖듯 목소리를 냈다.

“얘는. 얼굴이 다가 아니야.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곳이랑 상종하려고 해. 우리 진성 건설 이름이 있지.”

“가볍게 만나는 거지, 가볍게. 얼굴이 봐줄 만하니까. 게다가 요즘 잘나간다며.”

“그래도 신생이야. 언제 망할지 모르는.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들어가자, 딸.”

중년 여자가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여태껏 벙어리인 양 가만히 있던 단발머리 여자를 향해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넌 그냥 집에 가. 네 역할은 충분히 했잖니? 네 아버지한테는 너 먼저 갔다고 전하마.”

말이 끝나자마자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엉겁결에 이 장면을 지켜보던 세헌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직하게 내뱉은 음성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그 음성에 움찔한 도윤이 슬쩍 시선을 올려 세헌을 바라봤다.

“진성 건설이라고 했나.”

역시나.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서늘한 눈빛은 허공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었다.

“야, 야…. 세헌아…….”

설마 진성 건설을 박살을 내는 건 아닐까, 걱정 섞인 얼굴로 세헌을 향해 묻던 도윤은 들려오는 흐느낌에 말을 멈췄다.

그 흐느낌에 반응한 것은 도윤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모녀가 있었던 자리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세헌의 시선이 흐느끼는 쪽으로 향했다.

“세헌아…?”

도윤이 붙잡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흥미로운 상황에 제멋대로 움직인 그의 발은 이내 벤치에 앉아 있던 단발머리 여자의 앞에 멈춰 섰다.

“어디서 봤더라.”

딱딱하지만 차분하게 내뱉은 그의 목소리에 여자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흐느끼는 듯한 가녀린 소리가 자신이 어릴 적에 봤던 동화 속 공주님인 줄 알았는데, 제 앞에 있는 여자는 그런 공주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세헌이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주는 아닌데.”

짙은 갈색의 단발머리. 한눈에 보기에도 가녀린 것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오히려 발랄하고 한없이 밝은 공주의 시녀라면 모를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가 동화 속에서만 보던 공주들보다 더 가녀려 보였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우는 여자가 예뻐 보일 때가 있다고.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우는 여자에게 끌리는 취미는 변태들이나 가지는 취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가 그런 미친놈일 줄이야.

세헌이 탁한 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왜 울고 있습니까?”

세헌의 물음에 맑은 눈을 끔벅이며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니.”

서둘러 붉어진 눈가를 훔치는 여자를 보자 그의 미간이 엷게 주름졌다. 이내 세헌이 안쪽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받아요.”

“아…….”

제 앞에 내밀어진 손수건을 바라보던 여자가 고맙다는 듯 작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여자가 손수건을 받자마자 그가 무뚝뚝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냥 주는 거 아닙니다.”

“…네?”

“다 쓰고 돌려주세요.”

세헌은 다시금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내 들었다.

“연락은 여기로.”

얼떨결에 받아든 명함을 살펴보던 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세헌은 이미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깐…!”

등진 뒷모습을 보며 몇 번을 불렀지만, 세헌은 미련 없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세헌의 옆을 쫓던 도윤이 뒤를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세헌아, 저분이 부르는데…?”

도윤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 채 세헌이 입을 열었다.

“배도윤.”

“응?”

“알아봐.”

갑작스레 알아보라니. 멈칫하던 도윤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졌다.

“뭘? 설마 방금 저 여자?!”

놀란 얼굴로 묻는 도윤을 향해 고개를 가볍게 까딱인 세헌의 입술이 매끈하게 휘었다.

“전부 알아 와. 내가 만족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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