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2화 (3/70)

2화

* * *

한껏 꾸민 채, 파우더룸 거울을 바라보는 다미의 얼굴은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립스틱을 고쳐 바르고 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다미를 바라보는 설영의 표정은 한없이 다정했다.

“우리 딸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엄마 닮아서지, 누굴 닮았겠어?”

“아 참, 우리 딸. 오늘 이 회장님이랑 자제분들 오신다니까 잘 보이고. 알겠지?”

“걱정하지 마. 나 잘하잖아.”

사랑이 묻어나던 설영의 시선이 이내 날카롭게 서하에게 향했다. 경멸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훑으며 설영이 입을 열었다.

“오늘 중요한 자리인 거 알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렴.”

쥐 죽은 듯 조용히 있으라는 말은 설영이 말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특히나 오늘같이 건설사 집안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면 더욱더 남들 눈에 튀지 말고 유령처럼 있어야 했다.

어디에서든 서하가 아닌 다미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으니까.

“어서 가자, 엄마.”

다미의 말에 서하에게 향했던 설영의 시선이 거둬졌다.

“그래.”

두 사람을 따라서 파우더룸을 나서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설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내 검은 빛이 도는 고급스러운 퍼를 두른 중년 여성이 다가오더니 설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아이고, 진성 건설 대표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렇게 예쁜 따님들을 둬서.”

“이성 건설 대표님도 아드님이 훤칠하시잖아요, 호호.”

눈꼬리를 휘며 웃던 설영이 힐끗 서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 다미는 알아서 잘하는데… 막내라서 그런가, 서하가 아직 부족하네요. 애가 철이 안 든 건지 쇼핑을 너무 좋아해서는…….”

다미가 천연덕스럽게 서하의 팔짱을 꼈다.

“엄마도 참, 서하가 스트레스 푸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 거라니까.”

“얘가 이래요. 매번 동생을 이렇게 감싼다니까요?”

웃음을 터트리는 모녀를 보며 서하는 익숙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겠네요, 서하 양은. 든든한 언니가 있어서.”

연기력으로 따지면 설영과 다미는 이미 상을 받고도 남을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제 쪽이 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서하는 생각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를 보던 중년 여성이 시선을 돌려 설영에게 말했다.

“근데 소식 들으셨어요? 요즘 신생 건설사 하나가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던데. 남편 회사가 입찰한 것도 그쪽이 땄다고 하더라고요.”

“신생 건설사가요?”

“네, 남편이 그러는데 오늘 건설사 집안 모임을 가진 이유가 그 신생 건설사 대표 얼굴 좀 보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설영이 허공에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뭐, 신생 건설사가 얼마나 잘나가겠어요. 딱 신생 수준이겠죠.”

“그렇겠죠?”

설영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신생 건설사가 잘나간다면 얼마나 잘나갈까. 든든한 뒷배라도 있으면 모를까.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설영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었다.

잠시 후, 나타날 누군가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건설사 모임이 열리고 있는 호텔 앞, 고급스러운 검은색 세단이 매끄럽게 멈춰 섰다. 멈춰 선 세단 뒷좌석의 문이 열리더니 잘빠진 긴 다리가 뻗어 나왔다.

한 치의 구김도 없이 떨어지는 블랙 슈트를 가볍게 툭툭 턴 그가 고개를 추켜들었다. 짙은 눈썹 아래 느릿하게 올려 뜨는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은 마치 맹수처럼 사나웠다.

“소문이 좀 났으려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고저 없는 나른한 목소리에 운전석에서 내린 도윤이 입을 열었다.

“다들 너 보려고 벼르고 있을걸? 신생 건설사가 수주를 다 따내는 것도 모자라서 이런 모임에 지각이라니.”

건설사들이 그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고작 몇 년 채 되지 않은 신생 건설사가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갑자기 성장하기 시작하더니 굵직굵직한 건설사들을 제치고 국내 수주는 물론 해외수주들까지 따냈으니.

그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었다.

“아직 내가 누군지는 모르는 거고.”

그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TA 그룹이랑 관련 있겠다고는 생각하겠지만…….”

TA 그룹. 국내 최고의 대기업이었다. 이름이 같아서 TA 그룹의 계열사 같지만, 독립적으로 운영한다고 TA 그룹의 우강 회장은 일찍이 선을 그었었다.

하지만 남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TA 그룹 우 회장님의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이,

“우세헌, 네가 TA 그룹 우 회장님의 하나뿐인 아드님이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겠지.”

우세헌이라는 것을.

“같은 성 씨인데도 모르는 건 너무하지 않나.”

그 말에 도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텃세가 심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조금만 참고…….”

“배 비서.”

나직하게 내려앉은 세헌의 목소리에 도윤이 짧게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알겠어, 알겠어. 이럴 때만 비서라고 부르지. 그래, 네가 알아서 잘해봐.”

그사이 저만치 멀어진 세헌의 뒤를 급히 쫓았다.

* * *

화려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 연회장 안에 가득 모인 사람들은 서로 인사하기에 바빴다.

“어머, 홍소 건설에서는 이번에 정부 입찰받으셨다면서요?”

“작은 기관 하나 짓는 거라 별거 아닙니다, 하하. 그나저나 도금 건설도 이번에 아파트 분양 잘되었다고 들었는데…….”

가식적인 모임이었다. 명분은 건설사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서로 웃는 얼굴을 하고는 재고 따지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이곳저곳에서 팽팽하게 펼쳐졌다.

“진성 건설 사모님은 좋으시겠어요. 진성 건설 대표님도 자상하시고 따님분들도 예쁘시고…….”

누군가의 아부에 설영이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

진성 건설. 서하 아버지의 회사였다. 손꼽히는 건설사는 아니었지만 이름은 알아주는 중견기업이었다. 먼저 인사를 청하는 건설사들이 많았지만 설영은 철저하게 사람을 가렸다.

자신에게 인사를 건 사람이 힘없는 건설사 집안일 경우에는 쌀쌀맞게 인사를 받아주거나 말도 섞지 않고 자리를 뜨곤 했다.

하지만 진성 건설보다 더 잘나가는 건설사가 있을 때, 설영의 행동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어머, 이 회장님네 오셨네!”

다미의 손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는 설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서하는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서하는 굳이 오지 않아도 될 자리였지만 설영은 항상 이런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녀를 대동했다. 이유야 뻔했다. 설영은 그녀가 다미와 비교당하는 모습을 즐겼으니까.

“그렇게 깎아내리고 싶을까.”

억울할 만도 했다. 왜 그렇게 저를 미워하는 건지. 설영의 눈에 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모든 것은 다 헛수고였다. 누군가에게 당연한 ‘딸’이라는 소리가 서하에게 만큼은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았다.

“진짜 바보 같네.”

속이 쓰렸다. 그럼에도 그 ‘딸’이라는 칭호가 부러웠다. 제게는 허락되지 않는 그 칭호가.

서하가 씁쓸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던 그때, 굳게 닫혔던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며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향했다. 이내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그가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제가 좀 늦었네요.”

남자의 건조한 시선이 가늠하듯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TA 건설 대표, 우세헌입니다.”

세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순간 정적이 흘렀던 연회장은 다시금 웅성거리는 소리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TA 건설이라면…?”

“그, 신생 건설사?”

몇 번의 눈짓을 주고받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 향했다. 젊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젊을 줄이야. 다들 세헌을 보고 매우 놀란듯했다.

“안녕하십니까. 우 대표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허허, 이렇게 젊은 분이 대표일 줄이야.”

서하의 아버지인 경호를 포함한 각 건설사의 대표들이 세헌에게 악수를 청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넨 그들은 본격적으로 질문 공세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제치고 국내 수주는 물론 해외수주들까지 따낸 신생 건설사의 대표라는 사람이 궁금하던 찰나였다.

신생 건설사의 젊은 대표. 대표들은 세헌을 가늠해보려는 듯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세헌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대표들은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에 더욱 의아함을 가질 뿐이었다.

긴장감 하나 없는 표정으로 막힘없이 대답하는 세헌을 멀리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서하는 이상하게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당당하고 자신 있는 태도가, 저 많은 인파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너무나도 빛나 보였다.

굳게 닫혀 있었던 서하의 입술 사이로 슬그머니 속내가 터져 나왔다.

“부럽다.”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점점 더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서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장을 빠져나온 서하는 적막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긴 복도를 멍하니 따라 걷던 중 무언가 서하의 눈을 사로잡았다. 복도 끝 쪽 유리문 건너로 보이는 정원이었다.

아늑해 보이는 정원의 모습에 끌리듯 다가간 그녀가 유리문을 열었다. 지상 주차장과 호텔을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정원은 꽃들과 작은 나무들, 그리고 벤치가 자리했다. 몇 안 되는 벤치에 그녀가 앉자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듯했다.

두어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서하가 탁 트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오늘따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유난히 맑았다.

“좋네.”

고작 숨 한 번 트여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자신이 바보스러웠지만 서하는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다.

저를 옥죄고 짓누르는 모든 것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이렇게 작은 숨을 트일 곳만 있다면.

이 생활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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