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억을 먹는 밤-1화 (2/70)

1화

* * *

“다녀왔어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기계처럼 말을 내뱉었다. 누구 하나 저를 반기지 않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서하는 이렇게나마 제 존재를 알려야 했다.

“어머, 왔니?”

앙칼진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부엌을 지나치려던 서하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그제야 밥상에 고정됐던 중년 남성과 젊은 여자가 고개를 돌려 서하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단란한 가족의 저녁 식사 모습이었다.

물론, 서하만 빼고.

“네.”

“또 쇼핑한 거냐?”

서하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훑으며 그녀의 아버지인 경호가 혀를 찼다.

“놔둬요, 쓰고 싶으니까 쓰겠지.”

눈꼬리를 휘며 웃는 그녀의 새어머니, 설영이 너무나도 가증스러웠다.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세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찌개와 정갈한 반찬들이 놓여있었지만, 누구 하나 서하에게 밥을 먹었냐는 물음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익숙한 듯 서하는 발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 제 방문을 열었을 때, 아래층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그녀의 곪은 가슴을 후벼팠다.

서둘러 방문을 닫은 서하는 그제야 제대로 된 숨을 터트렸다.

“하.”

아버지, 새어머니, 그리고 이복 언니. 이 집에서 가족이라는 단어는 그 세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서하는 철저하게 이 집에서 고립되었으며 무시당했다.

“익숙하잖아.”

달래듯 혼잣말로 중얼거린 서하가 쇼핑백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돈 쓰기 좋아하는 철없는 부잣집 딸.

하지만 오히려 남들이 그녀를 손가락질할수록, 제 평판이 나빠질수록 서하는 마음이 편했다.

제가 잘나서는 안 된다는 것, 이복 언니와 비교되는 일이 없어야 구박이 덜해진다는 것은 이미 다섯 살 때 깨우쳤다.

달칵.

그때 노크 없이 열린 방문 사이로 서하의 이복 언니인 다미가 들어섰다. 늘씬한 다리로 서하를 향해 걸어온 다미는 그녀의 앞에 있는 쇼핑백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우악스럽게 쇼핑백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다미가 미간을 찡그려졌다.

“고르는 수준하고는. 저번에 내가 신상들 가져오란 말 못 들었어?”

여성스럽고 상냥할 것 같은 외모와 달리 다미의 입에서는 거친 말들이 쏟아졌다.

“애가 쓸모가 없어, 쓸모가.”

쇼핑백에서 꺼내진 옷들이 서하의 앞에 떨어졌다. 조금 전 반짝이는 조명들을 받으며 걸려있던 옷들이 한순간에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서하는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아 참, 이거.”

서하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구두.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눈에 띄는 새하얀 구두는 서하가 스무 살이 되던 날, 그녀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선물해준 구두였다. 너무 아끼는 나머지 서하도 꺼내만 보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새 구두였다.

“이게…. 왜.”

“신자마자 부러지는 게 말이 되니? 신고 나갔으면 개망신당할 뻔했잖아.”

마치 구두가 제 것처럼 말하는 다미를 향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거 아끼는 거라고 분명…!”

“아끼다가 똥 된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지.”

일그러진 서하의 얼굴을 보며 다미가 코웃음을 쳤다.

“이건 잘 입을게?”

다미는 쇼핑백에서 고른 옷들을 집어 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서하가 잇새로 입술을 짓이겼다.

“하…….”

굽이 부러진 구두를 조심스럽게 안아 든 그녀가 가슴에 품으며 결국 시선을 떨궜다.

누군가는 제 신세를 보며 답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제게 무신경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휘두르며 저를 괴롭히는 새어머니와 이복 언니에게서 왜 벗어나질 않는 거냐며.

28살, 충분히 독립하고도 남을 나이인데도 왜 이 집에 붙어있는 거냐고 화를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서하에게 그런 용기는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용기가 있어도 하질 못했다.

애정 결핍. 그녀를 표현하기에는 적절한 단어였다.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다고 했다.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고립된 그녀에게 그나마 관심을 준 건 새어머니와 이복 언니였다.

물론 그 관심은 괴롭힘이나 다름없었지만, 그 괴롭힘조차 서하에게 있어서는 소중했다.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고립되어 외로움 속에서 자란 그녀에게 가족이라는 소속감은 떨쳐낼 수 없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비록 비상식적인 가족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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