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에필로그
아침이 되자마자 해연은 이현을 깨웠다.
“이현, 현아, 일어나요.”
“으음…….”
살짝 잠에서 깬 이현은 본능적으로 해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해연을 끌어안고 더 자려고. 평소였다면 당장 덥석 안겼을 테지만,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해연은 자신을 향해 뻗어진 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아이참. 안 된다니까. 어서 일어나요!”
해연은 이현을 강제로 일으켜 씻게 했다. 이현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결국 씻고 그녀가 준비해 놓은 옷까지 얌전히 입었다.
“우리 어디 가요?”
“비밀이에요.”
해연은 주희와 유영의 도장을 찍은 혼인 신고서와 신분증, 도장을 가방에 넣고 의아해하는 이현을 끌고 구청으로 향했다. 설렘과 긴장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때 외투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이 웅웅― 진동했다.
“앗!”
“조심해요.”
고작 핸드폰 진동에 놀라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해연을 이현이 가뿐히 안아 지탱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
“잠깐만요, 지금 전화가…….”
서둘러 꺼낸 핸드폰 화면에는 ‘강기욱’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해연은 오늘이 출근해야 하는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혼인 신고에만 정신이 팔려서 회사에 연락하는 것도 깜박했다.
해연은 강기욱의 이름에 이현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도 모른 채 황급히 통화를 눌러 전화를 받았다.
-해연 님, 오늘 출근 안 하세요?
“기욱 님, 죄송해요. 이번 주는 연차 쓰려고요.”
-이번 주 내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혹시 금요일에 봤던 그 남자가 무슨 짓을,
강기욱의 이상한 오해에 해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거 아니고요. 아무튼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연차를 꼭 써야 해요. 자세한 건 출근하면 알려 드릴게요.”
회사를 다닌 일 년 동안 해연은 연차를 쓴 적이 없었다. 남들 다 가는 여름휴가도 가지 않았다. 이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쌓아 놓은 연차가 지금 빛을 보고 있었다. 만약 거절당하면 회사를 그만둘 생각도 하고 있어서 더 당당할 수 있었다.
자신이 맡은 일이 회사에서 꽤 중요한 것이라는 것도, 갑작스럽게 일주일이나 연차를 쓰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해연에게 이현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해연의 목소리가 완강해서일까. 강기욱이 협상을 요청했다.
-삼 일. 제 재량으로 줄 수 있는 시간은 삼 일이 최선이에요. 그 이상은 힘들어요.
“아……. 알겠어요. 삼 일. 삼 일 연차 내는 걸로 할게요.”
삼 일 뒤에 출근해서 결혼 휴가를 신청하면 되겠지. 해연은 너무 고집을 부리지 않고, 한발 뒤로 물러서 유연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피디님께 보고할게요.
“네, 감사해요.”
-그런데 진짜 뭐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죠?
“네, 정말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다음 주에 뵐게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해연은 심기가 뾰족해진 이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왜 기분 나빠졌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이유가 뭔데요?”
해연은 삐진 티를 확확 내고 있는 이현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얼굴 가득 알아 달라고 열심히 티 내고 있으면 왜 말을 안 해요?”
“……싫어요.”
“뭐가요?”
“당신이 다른 남자랑 웃으면서 대화하는 게 너무 싫어요.”
유치한 질투에 해연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 남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람.
“대화하는 거 다 들었잖아요. 그냥 회사 동료라고요.”
“그냥 동료가 아니라, 당신을 좋아하는 남자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기욱 님이 왜 날 좋아해요.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요.”
“하아…….”
이현은 여전히 웃고 있는 해연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남자의 감정은 남자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강기욱이라는 남자는 분명히 해연을 ‘여자’로서 좋아했다. 하지만 그걸 해연에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현이 입을 꾹 닫아 버리자 해연은 살포시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그렇게 싫으면 회사 그만둘까요?”
다 버리고 당신하고만 지낼까. 해연은 자신이 한 말에 제가 더 솔깃해졌다. 회사에 들어갔던 이유도 그가 없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돌아왔으니 회사를 다녀야 하는 이유도 사라졌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다른 남자랑 대화하는 게 싫다면서요? 회사 다니면 또 그럴 텐데?”
“그건,”
이현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멈췄다. 하지만 아까보다 확연히 풀어진 얼굴이었다. 아주 쉬운 남자였다. 해연은 쿡쿡 웃으며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 가요.”
“어디 가는데요?”
“지금은 비밀. 가면 알아요.”
“…….”
그를 끌고 가는 내내 해연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이현은 해연이 왜 이러는지 궁금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아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도착한 구청에 애써 참았던 궁금증이 다시 터져 나왔다.
“여긴 왜…….”
“혼인 신고 하려고요.”
“……!”
해연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그에게 보여 줬다. 서류는 이미 그의 도장까지 찍힌 채 모두 다 작성된 뒤였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류를 훑는 이현은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해연은 그런 이현의 손을 잡고 작게 웃었다.
“거절은 거절할게요.”
그가 싫다고 하면 혼자서라도 신고를 할 작정이었다. 해연의 단호한 말에 이현의 눈이 흔들렸다.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연신 눈을 깜박이던 이현이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해연은 불안해졌다. 제멋대로 그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진짜 싫어요?”
“아니요. 그럴, 리가 없…….”
이현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감정이 북받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생애에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 해연과 자신이 부부가 된다. 고작 서류 하나뿐이었지만, 이현에겐 ‘고작’이 아니었다. 해연이 스스로 결정한 저와 함께하겠다는 결심의 증거였다.
결국 그의 눈에서 뜨거운 감정이 쏟아졌다.
“좋아요. 너무…….”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해연은 그의 눈물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주 예쁘고 예쁜 비가.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그가 없어서. 하지만 지금은 좋았다. 이제 그가 제 곁에 있기 때문에.
해연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던 작은 벨벳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것도 혼자 준비했던 거였다. 언젠가 그가 오면 나눠 끼고 싶어서.
달칵. 상자 안에서 같은 디자인의 반지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연은 반지 하나를 꺼내 그의 약지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다행히 반지는 완벽하게 맞았다.
그리고 남은 반지를 그에게 넘기고 왼손을 곧게 펴서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끼워 줘요.”
“…….”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반지와 해연의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두 사람의 모습을 구청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하염없이 울고 있는 게 신기했던 탓이다.
“어서요.”
해연의 재촉에 이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해연의 손가락에도 들어가는 게 기분이 묘했다.
대체 이걸 언제 준비한 걸까. 내내 해연을 지켜봤음에도 반지는 처음 보는 거였다. 이현은 눈물로 젖은 속눈썹을 연신 깜박였다. 그러자 눈에 가득 고였던 물이 왈칵 쏟아졌다. 멈추고 싶은데, 해연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은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해연은 손을 들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고작 반지 하나 나눠 꼈을 뿐인데 정말 결혼한 기분이었다. 비록 마음이 너무 급해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해연은 약식으로나마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자 했다.
그녀는 여전히 예쁜 비를 내리고 있는 그의 눈을 애정을 듬뿍 담아 바라봤다. 이게 뭐라고 몸이 떨릴 정도로 긴장이 됐다. 해연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신부 한해연은 신랑 강이현을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읏…….”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말을 하는 것처럼 해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 순간, 이현의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해연은 반지 낀 손으로 그의 눈가를 쓸며 작게 속삭였다.
“자, 당신도 말해요.”
빨리요. 해연의 재촉에 이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기쁘고 행복한데 계속 눈물이 나왔다. 당장이라도 해연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해연이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에 마침표를 찍을 차례였다.
“……신랑 강이현은, 신부 한해연을……,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맹세, 합니다.”
꼴불견이었다. 조금 더 멋지게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현이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을 때였다. 숨을 죽이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하세요!”
“키스해!”
한 명이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마저 키스하라고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몰래 따라왔던 유영과 주희도 마찬가지였다. 시후는 주희의 눈치를 보며 같이 박수 치긴 했지만, 뿔이 난 것처럼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사람들의 성화에 그제야 현실을 파악한 해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현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몰랐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인 듯 살짝 쑥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키스하라는 성화가 더 거세지자 천천히 그의 고개가 해연을 향해 내려왔다. 해연은 볼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채로 살짝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그 순간 이현의 떨림이 느껴져 해연은 입술을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그녀는 이제 괴물의 아내가 되었다.
아주아주 사랑스러운 괴물의 아내가.
우리는 행복할 것이다. 설혹, 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기다려 겨우 마주 보게 되었으니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