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12화 (112/113)

112화.

“나는 인간이 아니에요.”

어렵게 떨어진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해연을 조금 허탈하게 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설마 고작 그 이유로 떠났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진심으로 화가 날 것 같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요. 그게 왜,”

“아니요, 당신은 몰라요. 내가 어떤 건지. 나는……,”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이현은 저보다 긴장한 얼굴을 한 해연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의 의식이 처음 만들어졌던 때부터 시작했다. 결코,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오물 그 자체.

그런 자신에게 처음으로 제 것이 생겼다. 그게 바로 해연이었다. 이현에겐 더없이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였으나 둘의 관계는 피식자와 포식자의 관계였다. 그가 살려면 해연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처음 가진 제 것의 존재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해서.

그 관계가 오랜 시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치열한 삶이었다. 원하는 게 너무 달라서 고통만 가득했다. 그건 모두 그의 오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초라한 삶이어서 단 하나뿐인 자신을 위한 존재를 어떻게든 움켜쥐고 싶었다. 그래서 더 해연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에겐 길고 길었던 이야기가 말로 풀어내니 지금껏 홀로 앓아 왔던 게 허탈할 정도로 짧았다.

이현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해연을 향해 아직 남아 있는 찌꺼기까지 모두 쏟아 냈다.

“당신을 먹으려고 했던 괴물들도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거예요. 내가 있는 곳은 모두 더러워져서…….”

자신과 비슷한 괴물로 변한다. 이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해연을 지키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해연을 위협하는 건 자신의 존재였다.

“당신이 날 증오했던 이유도 그런 거였어요. 당신은 사용 용량을 초과해서 망가지려는 날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여서…….”

필연적으로 자신을 해칠 존재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했다. 그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난 결국 당신을 먹었어요.”

해연을 먹고 아팠던 몸이 완전히 나았다. 이젠 그의 몸 안에 있는 힘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일이 사라졌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먹고 육체를 회복했다는 사실이 그에겐 끔찍하기만 했다. 자신이 해연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아서.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이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해연의 앞에 낱낱이 드러냈다.

“하지만, 난 지금 살아 있잖아요.”

“다시 살아난 거죠.”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해연이 그의 말을 부정하자 이현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해연이 완전히 사라진 그때의 절망감이. 그녀가 없는 가혹했던 순간이.

모든 걸 해연의 죽음 앞에 바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마저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막은 건 해연이 남겨 놓은 이유영의 존재였다. 해연이 애써 살려 놓은 존재를 제 손으로 망가트릴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다시 그녀를 돌려달라는 애원뿐이었다. 살려만 달라고, 다신 해연의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빌고 빌었다. 하지만 그게 이루어질 거라곤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적처럼 다시 제게 돌아온 해연에게서 떠났다.

“……무서웠어요. 기껏 다시 살아난 당신을 또 망가트릴까 봐. 당신 인생을, 지금까지 내가 다 망쳤으니까, 분명 또 그럴 것 같아서요.”

그런데 당신이 날 잊어 가는 게 더 무서웠다. 버려 달라고 했지만, 정말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 당신은 이 끔찍하기만 한 삶을 이어 가는 단 하나의 이유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정말 잊혀지고 나면 존재하는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당신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뺏어 버렸다.

내가 살고 싶어서.

“미안,”

턱. 이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해연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해연의 손이 떨렸다. 평생을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온 자신으로선 이현이 한 말은 선뜻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어차피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고도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그를 향한 마음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깊어져만 갔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저 사람은 그걸 나쁘게만 해석한 모양이었지만, 해연은 이제 다신 헤매지 말고 마음대로 사랑하라는 뜻이라고 여겨졌다.

만약 정말 끝이었다면, 자신은 다시 살아나지 않았을 테니까.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해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랑하니까. 기껏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는데 불안에 떨며 살고 싶지 않았다.

힘들었던 건 과거로 묻어 둘 것이다. 과거를 곱씹으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며 살기엔 우리가 돌아온 시간이 너무 길고 괴로웠기에. 아니, 그 어떤 것도 그가 곁에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분명히.

“지금까지 당신이 제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서 결과가 좋았던 적이 있었어?”

해연의 말에 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죄책감과 후회로 점철된 절망감이 그대로 드러나자 해연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젠 내가 하자는 대로 해요. 다신 혼자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 똑똑한 척하는 멍청아.

가차 없는 해연의 말에 이현이 고개를 푹 숙여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말이 너무 심했던 건가 후회하던 해연은 곧 이현의 몸이 떨리는 이유가 그가 웃고 있어서라는 것임을 깨달았다.

“놀랐잖아요.”

그녀가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치자 이현이 해연의 허리를 꽉 끌어당겨 안았다.

“당신 말이 옳아요. 모두 다.”

“그렇죠?”

“네.”

설혹, 그들 앞에 다른 잔혹한 진실이 숨어 있더라도 그는 해연의 말을 믿고 싶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속에 쌓아 두기만 했던 걸 모두 털어 낸 탓일까. 그의 얼굴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활짝 피어서 아주 보기 좋았다. 뿌듯하게 그를 보던 해연은 엉덩이에 닿는 발기한 성기에 눈을 깜박였다.

“이 순간에?”

“안 돼요?”

“으으음…….”

“제발. 응?”

말은 애원이면서 성기는 이미 해연의 입구를 두드리고 있었다. 두툼하게 부푼 귀두가 예민한 질을 벌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해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응!”

“허락한 거예요.”

“아, 진짜. 흣. 앙! 아! 혀, 현아, 읏!”

부지불식간에 나온 애칭에 이현의 표정이 어색하게 흐트러졌다. 성기가 들어오다 말고 어중간한 위치에서 멈추자 해연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그, 섹스할 때는 현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돼요?”

“왜?”

“조금, 기분이 이상해서…….”

현이라고 불렸을 때는 이런 성애의 관계가 아니었다. 개와 주인, 자식과 부모 같은 느낌의 관계였다. 그래서 이렇게 섹스를 하고 있을 때 현이라고 불리니 굉장히 배덕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에 해연이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도덕적이었는데요?”

“……그래도 기분이 이상해요.”

이현의 볼이 불만을 담고 부풀었다. 그 탓에 입술이 도톰하게 모아져 앞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귀여워.’

어린애처럼 툴툴거리는 남자의 행동이 너무 귀엽다. 해연은 장난스레 그의 입술을 이로 살짝 깨문 뒤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았다.

“알았으니까 이제 움직여요.”

빨리.

해연의 명령을 따라 이현이 다시 그녀를 흔들었다. 잠시 가라앉았던 열기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 * *

?늦은 오후까지 푹 잠을 자고 깨어난 해연은 여전히 곤히 자고 있는 이현의 얼굴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항상 꿈에서 깨어나면 혼자 남았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가 있다.

해연은 그의 눈앞에 손을 한번 휘저었다. 예전이었다면 바로 눈을 떴을 텐데 오늘은 깰 기미가 없었다. 편안한 얼굴이었다. 해연은 한참 그의 얼굴을 지켜보다 문득 든 생각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이 어딨더라…….”

방에 없는 건 확실했다. 해연은 허벅지를 덮는 긴 티 한 장을 걸치고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 앞에 널브러진 가방. 그리고 그 위로 말라붙은 체액. 집에 들어오자마자 새벽까지 이어진 정신없던 섹스의 흔적이었다.

여기서 바로 욕실로 갔었으니까……. 해연의 눈이 현관을 지나 욕실로 이어지는 바닥을 훑었다. 예상대로 온통 체액이 말라붙은 흔적이 가득했다. 욕실 안도 마찬가지리라. 아니, 거기가 가장 심각하겠지.

해연은 머쓱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유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웅, 언니……. 왜요?

한참 자던 중이었는지 유영의 목소리엔 잠기운이 물씬 묻어 있었다. 평소였다면 더 자라고 끊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해연의 목소리가 들떴다.

“유영아, 그 사람 왔어.”

-그 사람이 누구우……. 헉! 설마 강이현이요? 아아악!

우당탕탕. 핸드폰 너머로 큰 소리가 나자 해연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뒤로 빼고 어깨를 움츠렸다.

“유영아? 너 괜찮아?”

-아고고……. 일어나다가 이불에 발이 걸렸어요. 히잉.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강이현이 왔어요? 진짜?!

“응. 왔어. 어제. 이젠 안 갈 거래.”

-언니 목소리 엄청 좋아서 나도 기분 좋다.

“하하.”

-지금 보러 가면 실례겠죠?

“응, 아직 자고 있어. 조금 이따가 와.”

이현이 자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우선 유영이 오기 전에 엉망이 된 집부터 청소해야 했다. 해연의 말에 유영이 길게 하품을 했다.

-그럼 나 좀 더 잘게요.

“아, 유영아! 나 부탁할 게 있어.”

-우웅? 뭔데요?

해연은 슬쩍 이현이 자고 있는 방을 보곤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 이현은 모르는 해연 혼자만의 계획이었기 때문에.

“월요일에 혼인 신고 하러 갈 거야. 증인 좀 해 줘.”

-헐. 대박! 진짜?! 와, 나 잠 다 깼어요. 그럼 결혼식은?!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일단 혼인 신고부터 하려고.”

무엇보다 그와 연결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야 조금 안심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가 또다시 훌쩍 떠나 버리면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 법적으로 유부녀가 된 자신을 선뜻 혼자 두지 못하리라. 일종의 안전장치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다. 그동안 못해 봤던 걸 하고 싶었다. 다시는 엇갈리지 않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다. 보통의 부부처럼. 평범하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 특별한 삶을.

혼인 신고서에 증인은 두 명이 필요했기에 해연은 주희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이현이 왔다는 말에 놀란 듯 숨을 들이켜던 주희는 증인이 되어 달라는 해연의 부탁을 단숨에 수락했다. 주희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이현을 보러 가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연은 당연하다며 웃었다.

전화를 끊은 뒤 해연은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을 가만히 바라봤다. 온전히 그를 위해 꾸민 집이었다. 하지만 내내 그녀 혼자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헛된 짓이 아닌가 의심하고 불안해했었다.

그러나 그 불안도 이제 끝이었다. 그가 돌아왔으니까.

늘 보던 곳인데 오늘따라 느낌이 달랐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전보다 더 따뜻하고, 충만하게 느껴졌다. 가슴이 벅찼다.

해연은 다시 이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조심 침대 위로 올라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사랑해.”

속삭이는 듯한 고백에 이현의 입술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깬 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지만, 그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해연은 살짝 실망해서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그러자 큰 웃음소리와 함께 그가 팔을 내밀어 해연을 끌어안았다.

“앗!”

해연은 이현의 가슴에 안겨 침대에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굉장히 좋았다. 행복했다.

“나도 사랑해요.”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이현이 제 몸 아래 깔린 해연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는 말. 환하게 웃는 이현의 얼굴로 밝은 빛이 비췄다. 해연도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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