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해연이 다시 그를 만나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처음에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과 부대껴 사는 걸 어색해하던 해연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일상에 녹아들자 이제 그를 기다리지 않을 것 같아 초조해졌다. 버려 달라고 한 것은 자신인데, 막상 해연이 그럴 기미가 보이자 염치없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해연에게 호감을 보이는 강기욱이라는 남자였다. 해연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잘 어울려서 불쾌했다.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그땐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해연을 위해선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해연에게 호감을 갖고 천천히 다가가는 남자를 보니 속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해연이 그런 강기욱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며 웃어 주면 더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해연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욕망이 해연에게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자신만 사라지면 곧 해연은 자신을 잊고 평범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저 강기욱이라는 인간처럼 평범하지만 좋은 남자를 만나서…….
그러니 이제 자신만 사라지면 된다. 이렇게 해연을 쫓아다니지 않고 깨끗이 없어지면 곧 그녀는 완전히 자신을 잊을 것이다.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내가? 해연이 날 잊는 걸 견딜 수 있다고? 막연히 상상만 하던 게 조금씩 실체를 갖기 시작하니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질투심과 독점욕이 검붉게 타올라 당장이라도 해연을 가로채고 싶었다. 주제도 모르고. 그냥 자신과 함께 나락에 떨어져 달라고 그녀의 일상을 다 망가트리고 싶어졌다.
지금처럼.
해연이 자신을 잊은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 때마다 그는 해연이 아직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프게 했다. 해연이 자신을 찾으며 힘겨워할 때마다 저열한 희열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변하지 않는 자신의 이기심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렇게 그녀의 곁을 맴돌며 끊임없이 아프게만 하는 자신에게.
해연을 놓지도, 그렇다고 가지지도 못하는 이기적인 사랑.
‘내 사랑은 이렇게 더럽기만 해요.’
그래서 더욱 해연의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 * *
시간은 계속 지나갔다. 해연은 점점 더 그가 없는 세상에 녹아들었다. 비가 오는 날도 무던히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괜찮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기운을 잃고 실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은 징조였다. 아마 계속 이렇게 된다면 해연은 곧 완전히 그에게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은 날엔 그가 존재했던 것마저 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당신 곁을 맴돌 핑계마저 없어지면, 그럼…….
그때, 퇴근 준비를 하는 해연에게로 강기욱이 다가왔다. 해연이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보자마자 놓칠세라 서둘러 접근하는 강기욱의 얼굴에 초조감이 드러나자 이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해연 님. 일 끝났어요?”
기획팀 소속 팀장 강기욱이 해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무심코 습관적으로 팀장님이라고 말하려던 해연은 강기욱의 눈짓에 “기욱 님.” 하고 말을 바꿨다.
작업물을 한번 볼 수 있냐는 말에 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퇴근을 위해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켰다.
“조금 전에 메일로 보냈는데 못 보셨나 봐요.”
“막 회의 마치고 해연 님 자리부터 들렀거든요.”
해연은 아무렇지 않게 흘려들었지만, 이현은 그 말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보내는 적나라한 호감의 표시를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강기욱이 고개를 모니터 쪽으로 당겼다. 해연은 그가 보기 편하도록 의자를 옆으로 뺐다. 그로 인해 강기욱이 더욱 해연 옆에 가까이 붙었다. 이현은 이렇게 해연의 사생활을 훔쳐보고 쫓아다니는 스스로가 치졸하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접근하는 남자를 쳐내고 싶어 하는 것도.
해연이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이현은 매 순간 그녀를 따라다녔다. 혹시나 해연에게 무슨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는 치졸한 변명으로 포장한 채. 그러지 말아야지 싶으면서도 잊혀지고 싶지 않다는 본능이 이성을 더 앞섰다.
사실은 해연이 자신을 잊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거였다.
“피디님께는 보여 드렸어요?”
“네. 피디님은 좋다고 하셨는데, 오늘 기욱 님 바쁘셔서 월요일에 함께 회의하고 결정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요즘 자리에 잘 없죠?”
“워낙 일이 많으시니까요.”
해연과 강기욱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옆에 있는 것보다도 저 남자가 해연과 잘 어울려서.
“음, 일단 제 자리에 가서 한 번 더 볼게요. 수고하셨어요. 퇴근하려는데 제가 붙잡았죠? 빨리 도망가세요.”
“기욱 님은 오늘도 철야하세요?”
“아니요, 저도 집에 가려고요. 이러다 비명횡사하겠어요.”
“되도록 잠은 집에 가서 주무세요. 진짜 큰일 나요.”
“아직은 버틸 만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강기욱이 해연을 향해 웃고는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을 어깨에 걸치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해연도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다행이었다. 조금만 더 둘의 대화가 길어졌더라면 그는 분명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해연이 사람들 틈에 싸여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이현은 강기욱이 해연을 쫓아 나오는 걸 발견했다.
‘안 돼. 이 여자는 내 거야.’
이현이 내뿜는 경계의 기운을 느낀 강기욱은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어리둥절해하는 강기욱을 지켜보며 이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러면서 해연을 놓아주겠다고?’
안 돼. 못한다. 불가능했다. 절대로.
엉망으로 흐트러진 이현의 감정을 따라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현은 강기욱을 두고 서둘러 해연을 따라갔다.
단숨에 해연을 쫓아 내려온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더니 해연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커다랗게 뜨인 투명하도록 맑은 갈색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믿기 힘들다는 듯 눈 한 번 깜박이지도 않고 그를 보던 눈동자에 뿌연 안개가 스며들었다. 해연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닫히길 반복했다. 이현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오랜 시간 그녀를 홀로 둔 것도, 결국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도 모두 미안했다. 다시 해연이 그녀의 인생을 더럽힐 오물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것도.
해연이 그의 손을 다른 손으로 움켜잡았다. 그녀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부를 가르고 있는데도 이현은 그 통증마저 달가웠다. 그를 잡는 해연의 절박함이 느껴져서.
해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은 얼굴이 예뻐서 그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떨리는 목소리에는 원망이 물씬 묻어나왔다. 이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졸렬한 핑계를 지어냈다.
“비가 와서요. 당신은 비가 오면 힘들어하니까.”
“…….”
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만났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해연을 힘들게 하고 두렵게도 한 끔찍했던 일들이. 하지만 가장 끔찍한 건 그가 떠났던 일이었다.
그 후로 삼 년만이었다. 꿈에서야 겨우 찾아와 아주 잠깐 보는 환상이 아닌, 그의 실체를 본 것은.
해연은 자신 앞에 죄인처럼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를 정도로. 하지만 이현은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또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약 없는 시간을 몇 번이고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자신만 봐 왔으면서 마지막엔 자신을 버린 이 남자가.
“내가 힘들어하는 걸 안다는 건, 다 봤다는 거지? 계속, 내 옆에 있었으면서……. 내가, 괴로워하는 걸 다 보고만 있었다는 거잖아…….”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나쁜 새끼야!”
해연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퇴근 시간대라 로비에는 사람이 많았다. 이현의 존재로 이미 시선을 끌고 있는 상태에서 해연이 내지른 큰 소리에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 중 하나인 강기욱은 사람들을 헤치고 해연의 앞에 다가갔다.
“해연 님,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갑자기 나타나 둘 사이에 끼어든 강기욱의 행동으로 인해 해연의 얼굴이 당혹감이 스쳤다. 강기욱이 중간에 선 탓에 그녀의 시야에 이현이 사라진 것이다. 해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가 다시 사라질 것 같아서.
해연은 바로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아직 이현이 있는지 확인했다. 있다. 가지 않았다.
해연이 자신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불안한 얼굴을 하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자 강기욱은 그걸 제가 등지고 선 남자 때문이라고 제 마음대로 오해했다.
“해연 님, 만약 도움이 필요하신 거라면.”
“네? 아,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불편하신 것 같아서요.”
저 남자가. 강기욱이 해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제 등 뒤에 감춘 뒤, 이현을 바라봤다. 그 순간 이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감히 어디서.
하지만 그가 나서기도 전에 해연이 먼저 단호한 목소리로 강기욱의 참견을 밀쳐 냈다.
“아니요. 제 일이에요.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아…….”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에 뵐게요. ……가요.”
당혹스러워하는 강기욱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해연은 이현의 팔을 잡고 회사를 나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해연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의 팔만 꽉 잡은 채 정면만 바라봤다.
하지만 물기가 고인 눈과 떨리는 입술, 점점 더 힘이 들어가는 그를 잡은 손이 해연의 감정을 말해 줬다.
“해연…….”
“지금은 조용히 해요. 집에서, 집에 가서 얘기해요.”
“…….”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택시에서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계산을 하고 정원을 지나 집으로 향하는 내내 해연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까 염려하는 것처럼 초조하게 그를 끌고 걸음을 재촉하더니 현관에 다다라선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것조차 손이 떨려 번호를 잘못 누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