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본가를 정리하다가 나왔던 건데 챙겨 두길 잘했네요.”
“감사, 합니다…….”
정말. 정말 고마웠다. 그가 있었던 흔적이라도 가질 수 있게 해 줘서. 비록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다고 해도 그의 얼굴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게 되었기에.
해연은 안주희가 건네주는 휴지로 눈물을 닦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안주희가 분위기도 환기할 겸 건넨 장난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기억하세요? 이현 님이 집 지키는 개라던 고양이. 그게 시후였어요.”
“네?”
“아씨, 그걸 왜 얘기해! 모양 빠지게!”
“어디서 큰소리야? 이제 용돈 필요 없나 보지?”
안주희의 으름장에 발끈했던 윤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고는 해연의 눈치를 살폈다.
“시후가 해연 님께 폐를 많이 끼쳤죠? 어려서 사리분별을 잘 못해서 그런 거니 이해해 주세요. 고등학생인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제 고작 열세 살이거든요.”
“열세 살…….”
해연은 새삼스레 윤시후를 바라봤다. 백팔십은 충분히 넘을 듯한 키와 성숙한 외모는 아무리 봐도 열세 살로 보이지 않았다. 안주희의 폭로에 툴툴거리던 윤시후는 해연의 시선을 받고 볼을 붉혔다.
“그래도 인간으로 치면 곧 성인이야…….”
“응?”
“어, 어차피 주인도 없으니까 나는 어, 악!”
말 같지도 않은 설레발에 안주희가 윤시후의 머리를 후려쳤다.
“이게 어디서 작업질이야? 주제도 모르고.”
“아흐……. 존나 아파, 씨이…….”
“이것도 이해해 주세요. 얘 첫사랑이 해연 님이었거든요.”
“아악! 누나!”
“…….”
첫사랑. 그러고 보니 자신의 첫사랑은 이현이었다. 해연은 안주희와 윤시후가 티격태격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다시 이현에 대한 생각에 빠졌다.
지금은 꿈을 꾼 것처럼 흐릿하지만, 몇 번이나 태어났던 모든 생애를 통틀어 이현은 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아마, 이번 생도 마지막까지 그녀에겐 이현뿐일 것이다.
분명히.
해연은 이현의 사진을 다시 한번 눈에 새기고 서류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가방에 넣고 꼭꼭 닫았다. 소중한 보물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대화를 마치고 일어선 해연은 안주희를 바라봤다.
“가끔, 여기 와도 돼요?”
“자주 와도 돼요.”
“그리고, 이름 편하게 불러 주세요. 우리 이제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아, 버릇이 돼서 그만. 그래요, 해연 씨.”
해연은 마지막으로 허리를 숙여 고마움을 담아 인사했다.
돌아서서 집으로 오는 내내 해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좌절감과 기쁨이 혼재된 감정이 북받쳐서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시선에도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도 회사에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집에만 있었다면 그의 사진을 얻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녀는 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이현의 주민등록증을 액자에 넣었다. 그리고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수납장 위에 올렸다. 마음 같아선 매일 가지고 다니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분실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집에만 둬야 했다.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그의 사진을 다시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잘생겼네.”
주민등록증 특유의 반짝이는 무늬로 코팅된 사진이 아니라 원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럼 큰 사진으로 인화해서 걸어 뒀으리라.
참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었다. 해연은 그의 사진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으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웃음의 끝은 결국 눈물로 변했다.
보고 싶어서.
오늘따라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오랜만에 다니는 회사는 어색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그건 모두 살뜰하게 그녀를 챙겨 주는 기획팀장인 강기욱 덕분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해연은 강기욱의 권유로 퇴근 후 함께 가벼운 술자리를 가졌다.
강기욱이 안내한 살짝 어두운 조명의 작은 바는 그리 소란스럽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였다. 가벼운 안주와 각자의 술을 시킨 뒤 강기욱은 재킷을 벗어 다른 의자에 올리고 해연을 향해 말을 걸었다.
“어때요? 회사는 좀 익숙해졌어요?”
“네, 덕분에요.”
“다행이네요. 우리 회사에서 해연 님에게 거는 기대가 커요.”
“그건, 조금 부담스러운데요.”
“잘하고 계시면서 너무 겸손하시네요.”
강기욱의 추켜세우는 말에 해연이 멋쩍게 웃었다. 오랜만에 다시 현업에 돌아온 거라 손이 녹슬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동안 했던 게 몸에 익었는지 금세 익숙해졌다. 하지만 삼 년이나 업계에서 멀어져 있던 탓에 완벽히 요즘 트렌드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그건 기술적인 것보다 감각이 필요했다. 그래서 해연은 아직 본격적으로 일에 돌입하지 않고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며 감각을 다시 키우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회사에서도 해연이 손을 풀며 만든 결과물들을 만족스러워해서 그 시간을 기다려 줬다. 그것도 강기욱이 적극적으로 나서 준 덕분이었다.
“그동안 계속 일을 쉬시면서 뭐 하셨어요? 여행?”
“……네. 비슷해요.”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여행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남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아니겠지만.
해연이 어딘가 멀리 그리운 것을 보듯 술잔을 만지며 가만히 침묵을 지키자 강기욱은 “다시 가고 싶으신가 봐요.” 하고 물었다.
“네. 아주 많이요. 정말 다시 가고 싶어요.”
“지금은 안 되는 거 아시죠? 해연 님이 하실 일이 아주 많아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며 강기욱이 단도리를 치자 해연이 옅게 웃었다.
“당연히 알죠.”
어차피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그 여행엔 단 한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제 다신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남자가.
“아, 비가 오네요. 오늘 비 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아…….”
비가 온다는 말에 해연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강기욱은 예상치 못한 해연의 행동에 당황했다.
“왜 그러세요?”
“…….”
“해연 님?”
“……아뇨. 그냥, 집 창문을 열고 와서…….”
그래서 잠깐 놀랐다며 해연은 어색한 변명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 뒤로는 강기욱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신경이 계속 비에 쏠린 탓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올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기대하고, 또 실망해서.
해연은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꽉 잡은 채 숨을 크게 들이켜고 천천히 내쉬었다. 불안을 느낄 때마다 하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이현이 없는 이 년 동안 든 버릇.
다행히 조명이 어두운 탓에 해연은 불안해하는 얼굴을 감출 수 있었다. 그래서 강기욱은 해연의 어설픈 변명에도 쉽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빗물이 번지는 유리창을 바라봤다.
“저는 비 오는 날이 좋아요. 아, 밖에 있을 때 빼고 이렇게 안에서 바라볼 때만요. 해연 님은 어떠세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아니, 싫어해요.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가 오지 않을 바엔, 평생 비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해연의 날카로운 대답에 강기욱이 머쓱하게 웃었다.
“아, 진짜 싫어하시나 봐요. 제가 날을 잘못 잡았네요. 오늘 비가 올 줄 몰라서…….”
“저도 몰랐는걸요. 그런데 기욱 님,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제가 비 오는 날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죄송해요.”
자리에 앉은 지 삼십 분도 되지 않았지만, 몸이 떨려서 버틸 수가 없었다. 이현이 사라진 뒤, 비가 오면 늘 그랬다. 몸에 힘이 없고 움직일 기력도 없어졌다. 해연은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해연이 불쑥 일어나면서 테이블에 부딪혀 칵테일 잔이 크게 흔들렸다. 모서리 쪽에 놓인 칵테일 잔이 완전히 기울어져 넘어가려는 순간, 놀랍게도 칵테일 잔은 다시 균형을 잡고 똑바로 멈춰 섰다.
“……!”
“와, 영락없이 깨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뒤늦게 칵테일 잔을 잡으려고 손을 뻗으려던 참이었던 강기욱이 스스로 균형을 잡은 칵테일 잔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만약 그대로 넘어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으면 유리 파편이 가까이에 있던 해연에게도 튀었을 것이다.
단순히 신기해하는 강기욱과 달리 해연은 굳은 얼굴로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이현, 당신이야? 당신 지금 여기에 있어?’
예전에도 안 보이게 자신을 따라다니며 위험할 때마다 구해 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해연이 아무리 주변을 돌아봐도 이현을 찾을 수 없었다.
“해연 님? 뭐 찾으세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기욱 님.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내일 회사에서 봬요.”
“……그래요. 대신 내일 커피 사 주셔야 해요.”
“열 잔도 사 드릴 수 있어요.”
“그거 기억할 거예요. 열 잔 킵. 자, 협상 타결됐으니 얼른 가죠. 택시 잡아 드릴게요.”
“아니, ……네, 감사합니다.”
어차피 같이 나가는 분위기인데 너무 거절하기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어서 해연은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세차게 내리던 비는 차츰 멎어 가고 있었다. 다행히 택시 한 대가 다가오기에 해연은 그 택시를 바로 잡아탔다. 해연이 택시 문을 닫기 직전, 강기욱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집에 도착하시면 간단하게 문자라도 남겨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요.”
“그럴게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별것도 아닌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손을 크게 흔들어 배웅하는 강기욱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해연은 기사에게 주소를 말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해연은 고개를 숙여 두 손에 묻었다.
강이현. 이현. 이현. 현아……. 정말 안 나타날 거야? 정말 조금 전의 그거, 당신 아니었어?
‘나 너무 힘들어.’
정말 영원히 당신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해. 제발 그때가 마지막이었다고 하지 마…….
집에 도착한 뒤, 해연은 현관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비가 온 날이면 늘 그렇듯이.
잠시 밝게 비췄던 센서 등이 다시 꺼졌다. 그러다 조금 뒤 다시 불이 켜졌다. 긴 인영이 지쳐 잠이 든 해연의 구두를 벗기고 그녀를 안아 든 뒤 침대로 향했다.
해연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 주던 그의 시선이 잠시 액자에 스쳤다. 주민등록증. 해연을 만난 이후 만든 것이다. 그걸 해연이 액자에 끼워 보관하고 있었다.
우웅―
해연의 가방에 든 핸드폰이 진동했다. 가만히 액자를 바라보던 남자는 고개를 돌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잘 도착했어요?]
강기욱의 문자.
“…….”
작은 핸드폰을 쥔 손에 굵은 힘줄이 곤두섰다. 당장이라도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손에 힘을 풀고 [도착했어요. 감사합니다.]라는 형식적인 답변을 적어 쓴 뒤 화면을 껐다. 또 한 번의 진동이 있었지만, 그는 다시 해연의 핸드폰을 보지 않았다.
그저 복잡한 얼굴로 잠든 해연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