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사진이라도 찍어 둘걸. 그와 흔한 사진 한 장조차 찍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꿈뿐이었다. 그게 해연을 힘들게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의 얼굴이 잊혀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구직 준비를 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테이림에서 연락이 왔다. 이진아 피디가 있던 곳. 유영은 차마 못 다니겠다며 다른 곳으로 이직했던 회사.
사실은 일 년 전부터 입사 제의를 받았지만, 아직 회사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계속 거절했었는데 구직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다시 연락해 왔다. 해연이 고민하자 유영이 펄쩍 뛰었다.
“거길 왜 가요? 다른 데 가요!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다구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해연은 말끝을 흐렸다. 간혹 그때의 일이 생각나면 몸이 떨렸다. 그때 죽을 뻔했던 사실이 두렵고 무섭다기보단 그날 이후로 이현이 떠났던 게 더 아프고 힘들어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건 모두 이현이 사라져서였다. 그가 생각나 반가웠던 비가 이젠 끔찍해진 것까지 모두. 그가 없다는 공허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며칠을 두고 고민하던 해연은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두려워서 피하고 싶지 않았다. 이를 극복해 내면, 자신이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고 증명해 내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들었다.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해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도 잡고 있어야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 * *
입사한 지 한 달 째. 해연은 퇴근을 하고 회사 빌딩 앞에 서 있었다. 평소에는 택시를 주로 타고 다녔는데 오늘은 왠지 지하철을 타고 싶어졌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회사와 십 분 거리에 있는 지하철로 걸어갔다. 빌딩이 아주 많은 거리답게 길거리에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그 사이에 묻혀 함께 움직이던 해연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무리의 가장 중심에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몹시 익숙했던 탓이었다.
“윤시후…….”
예전에 봤던 것보다 조금 더 성숙해지고 키도 한 뼘은 더 커졌지만, 특유의 날티가 나면서도 수려한 얼굴은 여전했다.
이현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과 마주친 건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해연은 점점 더 가까워지는 윤시후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를 향해 직진했다.
친구들과 함께 까불며 웃던 윤시후의 시선이 제게 다가오는 해연에게로 향했다. 윤시후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지자 해연은 윤시후가 자신을 알아봤다는 걸 직감했다. 해연은 다짜고짜 그의 팔을 잡았다.
“윤시후. 맞지?”
“아, 아닌데. 누, 누구세요……?”
애써 모르는 척 굴고 있었지만,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윤시후의 주변에 있던 대여섯 명의 남학생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했다.
“시후야, 누구야?”
“올, 윤시후 이 새끼 능력 좀 봐라? 이젠 연상도 꿰냐?”
기껏 아니라고 모른 척한 게 무색하도록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그의 이름에 윤시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해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나랑 얘기 좀 해.”
“아니라니까! ……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주희 씨는?”
“주희 누나는 저기 카페에……, 합!”
거짓말을 할 거였으면 친구들하고 말이라도 맞추든가.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척하든가. 해연이 열이 바짝 오른 윤시후의 귀를 잡아당겼다.
“안내해.”
“아후, 진짜 미치겠네. 씨발, 왜 아는 척하고 난리야!”
“욕하지 말랬지?”
“윽!”
해연의 경고에 윤시후가 미치고 팔짝 뛰겠다며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니, 사람이 모른 척하면 좀 알아들어 줘야지! ……요. 누나도 나 별로 좋지 않을 거 아냐.”
“내가 왜?”
“그야, 내가 그……. 이씨. 야, 나 먼저 간다. 다음에 놀자.”
“오올, 윤시후 이 능력자! 부럽다 부러워.”
“예쁜 누님하고 좋은 시간 보내고 내일 꼭 보고해라!”
“이 미친 새끼들이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
해연은 자신과 윤시후를 두고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 그의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야유를 흘려들으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현이 어디 있는지 실마리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한계를 모르고 높이 치솟았던 탓이다.
친구들이 그 나이대 특유의 요란을 떨며 멀어지자 윤시후는 다시 해연을 내려 봤다.
“아, 진짜 미치겠네. 왜 마주친 거야 대체.”
“이현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거짓말하지 말고. 알잖아, 응?”
“진짜 모른다니까! 정말 몰라. 진짜 진짜!”
“그럼 주희 씨한테 안내해. 주희 씨는 알겠지.”
“안 된다니까아. 누나하고 마주친 거 알면 주희 누나한테 혼난다고!”
그런 걸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해연이 알고 있는 윤시후는 남들 눈은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제멋대로의 성격이었다. 심지어 이현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만에 본 윤시후는 이전과 달라졌다.
“나도 네 사정 신경 써 줄 여유 없어. 주희 씨한테는 내가 사정을 말할 테니까 빨리 안내해 줘. 제발 부탁해.”
“으윽…….”
“시후야, 진짜 부탁이야.”
해연이 간절히 애원하자 윤시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 그럼 주희 누나한테는 내가 진짜 열심히 모른 척했다고 말해 줘야 해?”
“그럴게.”
몇 번이나 약속한 뒤에야 윤시후는 해연을 안주희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는 살짝 어두운 조명에 인테리어도 괜찮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거리에서 꽤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카페 안엔 손님이 없었다.
여유롭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안주희는 윤시후의 뒤를 따라 들어온 해연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주희 씨 오랜만이에요.”
“해연, 님?”
안주희는 슬쩍 해연의 뒤로 숨는 윤시후를 노려봤다.
“시후 너…….”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쳤어요. 제가 우겨서 주희 씨한테 안내해 달라고 한 거예요.”
해연은 약속대로 윤시후를 위해 변명을 대신해 줬다. 그러자 안주희는 해연을 깊은 눈으로 주시하다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아니요. 그것보다 이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요. 주희 씨는 알고 있죠?”
“시후 넌 카페 오프해. 문 잠그고.”
“으응.”
“주희 씨!”
“앉으세요. 저 어디 안 가요.”
극도로 해연에게 상냥했던 모습과 달리 선을 긋는 듯한 딱딱한 말투. 안주희도 예전과 달랐다. 해연은 자꾸 성급해지려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안주희가 앉았던 테이블에 앉았다.
시후가 문을 잠그고 유리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서야 안주희는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현 님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주희 씨…….”
“그때로부터 이 년 조금 넘었죠? 우리 일족에서 시후하고 저만 남았어요.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으로요.”
“…….”
“인간으로 변하고 나서 단 한 번도 이현 님을 본 적 없어요.”
이 년 전, 안주희는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자마자 자신의 모험이 성공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반뿐인 성공이었다. 이전의 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평범한 인간이 된 안주희를 맞이한 건 폐허로 변한 본가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윤시후, 그리고 몸이 반쪽만 남은 아버지, 안재호뿐이었다.
죽기 직전의 모습의 아버지는 안주희를 보자마자 마치 살았다는 듯이 안도한 얼굴을 했다.
‘어머니는요?’
‘지금 그딴 걸 챙길 때냐! 이 아비부터, 큭!’
‘그딴 거요? 그딴 건 너겠지?!’
안주희는 발을 들어 아버지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러자 반으로 갈린 안재호의 몸통 경계선에서 멈춰 있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끔찍한 고통이 찾아오자 안재호는 미친 듯이 안주희의 다리를 잡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 꼴이 마치 버러지 같았다.
피를 나눈 혈육이었지만, 안주희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안타깝기는커녕 온몸이 오싹한 희열을 느꼈다. 그대로 난도질해서 죽이고 싶었지만, 아직 끝을 낼 때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알고 나서 죽여야 했다.
‘어머니가 어딨는지 말해요.’
‘그년이 죽은 지가 언……! 주, 주희야, 그게 아니라…….’
‘죽었다고요?’
살아 있다며? 아주 가끔뿐이었지만, 어머니와 통화도 했었다. 그런데 왜 죽어?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의심이 들 때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었다.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안주희는 눈앞이 벌겋게 물드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그건 제 앞에 있는 버러지 같은 아버지를 향한 분노였다.
‘이 개새끼…….’
‘사, 살아 있어, 주, 큭, 주희야, 이 아비를 살려 다오. 이러다 죽겠, 크아아악!’
안주희는 그대로 안재호의 목을 꺾어 버렸다. 비록 인간이 되었지만, 태생적으로 타고난 육체적인 힘이 보통 이상으로 뛰어났던 탓에 안재호는 그대로 즉사했다.
오래 쌓아 온 증오에 비하면 너무 간단히 끝내 버렸다. 이성이 돌아오고 나서야 후회했지만, 이미 죽은 아버지를 다시 살릴 방법은 없었다. 그때였다. 안주희의 소원이 이루어지고 나자 안재호의 시체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만약 조금만 늦었더라면 자신이 손쓸 틈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쉽게 죽였다고 후회했던 게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그 뒤로 이현을 보지 못했고, 안주희도 애써 찾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고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시후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이전처럼 특별한 힘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삶을.
언젠가는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주인과 함께 있는 한해연이었다. 주인은 결코 한해연을 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도 신기해요. 해연 님이 이현 님의 거취를 모른다는 게.”
안주희의 긴 설명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해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 자신도 신기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버리고 사라질 수 있는 건지. 그렇게 놓아달라고 할 땐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그래도 이렇게 보게 돼서 다행이긴 해요. 줄 게 있었거든요.”
“줄, 거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안주희는 카운터로 돌아가더니 서류 봉투 하나를 가져왔다. 해연은 조심스럽게 안에 든 것을 빼냈다.
“아…….”
이현의 주민등록증과 여권, 인감도장이었다. 해연은 주민등록증에 있는 그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어딘가 어색하고 권태로운 얼굴이었지만, 이현이었다. 그와 사진 한 장 찍지 못해서 그토록 후회했는데, 이렇게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해연이 그의 주민등록증을 꽉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자 지켜보고 있던 안주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모든 짐을 털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