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바닥에 엎드린 채 눈을 꽉 감고 있던 유영은 더 이상 땅이 흔들리지 않고 이상한 적막이 흐르자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 언니?”
설마 아니리라. 그럴 리가 없다. 유영은 두 손으로 입을 꽉 막았다. 말이 씨가 될까 봐. 혹시라도 해연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 막았다. 무사한 걸까. 무사해야 한다.
“아…….”
고개를 들어 올린 유영의 시야로 강이현이 해연을 안은 채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유영이 황급히 물었다.
“어, 언니는요? 살아, 있는 거죠? 그렇죠?!”
“……,”
이현은 유영의 다급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해연을 내려 봤다. 그는 해연의 눈꺼풀이 흔들리는 것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의식이 들었는지 해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맑은 갈색 눈동자가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드러나자 이현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해연의 앞에서면 늘 그랬던 것처럼.
눈이 뜨겁고 입술이 잘게 떨렸다. 해연이 돌아왔다는 것이 기쁘고, 또 이제 이 여자를 놓아줘야 한다는 것이 슬퍼서. 하지만 그럼에도 이현은 꽃이 활짝 핀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요?”
“……이현? 어떻게…….”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그도……. 해연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살아 있어요. 당신도 이유영도 모두.”
“아…….”
“다 끝났어요, 이제.”
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번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을 보였던 이현이 자신을 살린 거라고 생각했다. 이현의 말에 깃든 다른 뜻은 모른 채.
그때 유영이 해연을 불렀다.
“언니 괜찮아요?”
“유영아…….”
해연의 목소리를 듣자 안도감으로 유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살았어. 살아 있다.
“도망가라니까…….”
“내가 언니를 두고 어떻게 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유영이 소리치자 해연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
“고마워요.”
구해 줘서. 구하러 와 줘서. 해연의 말에 이현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도 고마워요. 살아 있어 줘서.”
돌아와 줘서. 깊은 한숨 같은 속삭임. 해연은 자신을 안은 그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어서 도리어 웃음이 나왔다. 다 끝났다. 그가 구하러 왔으니까 이제 다 괜찮을 것이다.
안도감이 드니 그동안 참아 왔던 통증이 되살아났다. 몸은 모두 나았지만, 해연의 정신에 남아 있는 두려움과 긴장이 풀려 몸에 나타난 것이었다. 해연이 무의식중에 신음을 흘리자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이현이 황급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아파요?”
“……그것보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요.”
여기 더 있고 싶지 않았다. 해연의 지친 속삭임에 이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유영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유영이 냉큼 해연에게로 다가왔다. 해연은 바로 유영의 전신을 살폈다.
“유영아,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있는 건 아니고?”
“아니요. 하나도 안 다쳤어요.”
“정말이지?”
“네! 봐요.”
유영이 해연이 보는 앞에서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팔을 휘적휘적거리며 안 다쳤다는 걸 열심히 어필했다. 이 난리를 겪고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활발함에 해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유영이 눈치를 보다 이현을 향해 머뭇거리며 말을 걸었다.
“근데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그럼 그쪽도 사람이 아니에요?”
“……네.”
해연은 긴장한 채 유영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유영은 딱히 이현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해연을 바라봤다.
“그래서 언니가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못 했구나…….”
“응……. 미안해, 유영아.”
“아니에요. 나였어도 말 못했을 거예요. 말해 봤자 믿지도 못할 텐데 뭐.”
직접 겪지 않았더라면 무슨 말을 해도 정신이 어디 이상해진 게 아닐까 싶었을 거라며 유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해연은 손을 내밀어 유영의 손을 잡았다.
“유영아,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이제 다 끝났으니 집에 가서 푹 쉬자고 해연이 옅게 웃으며 하는 말에 유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가요. 나 여기 너무 싫어요.”
“나도.”
두 사람의 대화에 이현은 홀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곳이 싫다는 말이 가슴에 깊게 박혔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자신이 만든 공간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현은 이내 그 마음마저 털어 냈다. 해연을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시 살아나 해연과 함께 있었다. 해연도 돌아왔다.
그러니 이제 놓아주리라. 다신 자신으로 인해 힘들지 않도록.
* * *
해연과 유영을 단숨에 집으로 이동시킨 이현은 두 사람이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유영에게 빨리 씻으라고 말하던 해연은 말도 없이 나가 버리는 이현의 뒷모습이 뭔가 이상해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어디 가요?”
해연의 물음에 이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멈춰 선 그대로 상체를 살짝 들썩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분명히 자신을 보고 있는데,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이건 이현답지 않았다. 해연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왜, 그래요? 왜 눈을…….”
“……그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했어요.”
당신이 겪은 건 모두 내 잘못이라고, 이현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해연은 그의 말과 표정에서 불안감을 느꼈다. 꼭 마지막이라는 듯이 굴고 있었다.
“왜 그래요? 꼭, 다신 안 올 것처럼…….”
“…….”
이현은 아예 고개를 돌려 해연의 시선을 피했다. 그게 대답이었다. 해연이 왈칵 화를 냈다.
“버리지 말아 달라며!”
“버려요, 이제.”
“……!”
“제발, 버려요. 그리고 행복해지세요.”
“그럼 당신은? 당신은 나 없이 행복할 수 있어?”
“…….”
“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해연의 격앙된 말에 이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상상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으니까.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젠, 사랑하지 않아요.”
“그럼 그 죽을 거 같은 표정이나 짓지 마!”
다 끝났다며. 위험한 건 이제 다…….
그 순간 해연은 진정한 뜻이 바로 이거였다는 걸 직감했다.
“다 끝났다는 게 이런 거였어? 이제 와서 날 놓아주는 거? 당신을 사랑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버려 달라니 그게 말이 돼?”
“……미안해요.”
이현은 자신의 손을 잡은 해연의 손을 밀어냈다.
“그냥 집착이었을 뿐이었어요. 당신 곁에 있으면 아프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였어요.”
“……거짓말하지 마요.”
“그런데 이제 아프지 않아요. 당신의 쓸모도 사라졌죠. 그러다 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거짓말이 아니에요. 알잖아요. 내가 만들어 낸 것들이 모두 당신을 먹고 싶어 했던 거.”
“……!”
격앙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부정하던 해연의 입술이 딱 닫혔다. 그의 말대로였기 때문에.
“당신 몸에서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나요. 아니, 났었어요. 지금은 내가 모두 먹어 버려서 나지 않지만.”
“…….”
“그런데 이제 내게 당신이 필요할 리가 없잖아요.”
이현의 목소리가 찼다.
“그럼 왜 지금까지 먹지 않았는데? 내가, 몇 번을 태어나도 당신 안 먹었잖아. 그냥 사랑해 달라고만 했잖아!”
해연의 말에 이현의 눈이 크게 떨렸다. 기억이 났다고? 그 모든 일들이? 그런데도 자신을 잡는다고?
이현은 당장이라도 해연을 끌어안고 싶은 손을 말아 쥐었다. 해연을 놓아주겠다는 것도 망각한 채 다시 그녀의 품에서 쉬고 싶은 욕망을 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냉담해졌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착각했다고.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거였어요. 먹고 나니 내가 멍청했다는 걸 알았을 뿐.”
그러니까 이제 당신은 내게 필요 없어.
차디찬 목소리와 눈빛. 그건 해연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매번 그는 그녀에게 매달리기만 했었기에. 해연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래서, 이제 내가 쓸모없어졌으니까, 버리, 겠다고?”
“네.”
“당신을, 사랑하게 해 놓고?”
“…….”
“이럴 거면 왜 살렸어? 그냥 죽은 채로 두지…….”
푹 고개를 떨군 해연이 힘없이 중얼거린 말에 이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거짓말이라고,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또 해연의 곁에 머물면 그녀에게 다시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
나는 본디 그런 존재니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존재. 쓰레기. 세상이 뱉어 낸 오물이 모여 만들어졌으니 또다시 그녀의 삶을 망가트릴 게 분명했다. 이런 일을 또 겪게 할 수 없었다.
가자. 계속 머뭇거리면 더 떠나고 싶지 않아지리라.
‘부디 당신이 날 잊고 행복해지길.’
당신이 원했던 대로 평범하게. 나 같은 괴물과 엮이지 않고.
이현은 마지막으로 해연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떨어지지 않는 눈을 결국 떼어 냈다. 그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현이 사라진 뒤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더니 잔잔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는 해연의 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이현?”
뭔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해연이 번뜩 고개를 들었을 땐, 이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런 게 어딨어……. 이렇게 가 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이렇게 허망하게 그와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해연은 망연한 얼굴로 그가 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현이 사라졌다. 그가 해연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홀연히. 그녀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