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이현?’
해연의 심장이 갑자기 쿵쿵 뛰었다. 뭔가 불안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미친 듯이 울리던 땅이 멈추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이현이 왔다고 생각했다. 곧 자신을 구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설마…….’
문득 든 끔찍한 가정에 해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현은 강하다. 누구보다 강했다. 그러니까 그가 잘못됐을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그때, 멍하니 서 있던 유영의 몸이 흠칫 튀었다.
“어, 언니, 언니, 언니!”
괴물의 제어에서 벗어난 유영이 다급히 해연에게로 달려갔다.
“유영아!”
“언니 우리 빠, 빨리 도망쳐요. 빨리!”
“너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요. 그런데 언니가 안 괜찮잖아!”
유영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해연의 팔을 묶은 끈을 풀려고 마구잡이로 손을 움직였다. 어찌나 단단히 묶었는지 손톱이 깨지고 피가 흘렀지만, 유영은 개의치 않고 끈을 푸는 데만 집중했다.
손에 힘이 빠지면 이빨로 물어서까지 끈을 풀어내자마자 유영은 옷장을 열어 아무 옷이나 가져와 해연에게 입혔다. 그러고는 해연의 손을 꽉 잡았다.
“언니 미안해! 나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마, 마음대로 되지 않았어.”
“알아, 다 아니까 그런 말 하지 마. 일단 빨리 나가서…….”
그 순간 해연의 입이 딱 굳었다. 유영도 마찬가지였다.
별채에 수많은 발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는 아주 빠르게 가까워졌다. 해연은 긴장한 유영의 손을 꽉 잡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있는 방문이 산산이 부서졌다.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과 짐승의 얼굴을 한 괴물들이 해연과 유영을 보며 침을 흘렸다. 해연을 먹기 위해 달려온 잡종들이었다. 괴물도 이현도 순혈도 모두 사라지니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 튀어나온 것이다.
“어, 언니…….”
“유영아, 뒤에 창문이 있어. 거기로 나가야 해.”
“응.”
해연이 침착한 얼굴로 유영에게 속삭이자 겁에 질려 있던 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연과 유영은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괴물들은 마치 궁지에 몰린 쥐를 사냥하듯이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달려들 시기를 보고 있을 때, 해연이 유영을 창문 밖으로 세게 밀었다.
“언니!”
“빨리 가!”
창문 밖으로 떨어진 유영의 눈에 해연의 뒤를 덮치는 괴물들이 보였다. 유영은 손을 뻗어 해연을 잡으려고 했지만, 해연은 괴물들에 의해 모습이 사라졌다.
“아, 안 돼! 안 돼, 언니! 해연 언니!”
“어서 가! 제발 가, 유영아!”
그게 해연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해연을 먹기 위해 달려온 잡종들은 창문 밖으로 떨어진 유영의 존재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해연은 자신을 덮는 괴물들에 의해 쓰러지며 눈을 감았다. 꼭 이현을 보고 싶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끝내 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자신을 구하러 왔음에도 아직까지 제게 오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리라.
아마도, 이현이 죽었으리라는 것.
하아.
자신을 두고 다투며 소유권을 주장하는 괴물들의 괴성이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귀에 물이 찬 것 같다. 아니, 온몸이 깊은 수면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유영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지만, 혼자가 되니 해연은 모든 걸 놓아 버렸다.
해연은 아무 희망도 없는 절망뿐인 현실을 받아들였다. 가능한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 느끼고 죽기를 바랐다.
이현.
나도 죽게 되면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곳은 이현이 살던 곳이었다. 그와 함께 지냈던 곳에 다시 끌려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음에도 해연은 이상하게 이현이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저 그가 오길 기다리지 않고 결국 밖에 나가 이런 일을 겪게 된 게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그가 구하러 오길 기다린 것도, 아무 관련도 없는 유영마저 이런 일을 겪게 만든 것까지 전부.
그때였다. 그렇게 기억나지 않던 꿈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그 괴물은 곧 너의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야.’
꿈에 나왔던 여자는 반드시 일어날 미래를 해연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처럼…….’
후회.
그래, 후회해. 그에게 조금 더 마음을 내주지 못했던 것을.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밀어냈던 것을. 그리고…….
이현에게 꿈에 대해 말했던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 여겼던 꿈이 사실은 그의 과거라는걸. 그리고 저와 상관없다 여겼던 그 노파는 자신이라는 걸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죽음에 다다라서야 겨우.
바보 같다.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가 있을까. 의도가 아니었지만, 자신은 그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것이다. 아팠을 텐데. 충격적이었을 텐데도 이현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웃으며 나갔다.
수많았던 생애가 해연의 뇌리에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모든 생애에는 이현이 있었다. 저만 바라보며 사랑을 갈구하던 그가.
늘 그를 증오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사랑했다. 그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아니, 인정하면 안 되기 때문에 계속 그를 외면해야 했다.
해연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후회에 잠긴 해연과 달리 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다급했다. 해연의 몸이 거칠게 잡는 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렸다. 그러다 참을성을 잃은 한 괴물이 해연의 목에 이빨 전체를 박았다.
아.
해연의 눈이 살짝 뜨였다가 다시 감겼다. 이번엔 본의가 아닌, 눈을 뜰 힘조차 없어 감긴 것이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뚫리는 순간 해연의 몸에서 피 내음과 함께 더욱 짙은 냄새가 퍼져 나갔다. 단숨에 눈이 돌아간 다른 괴물들 역시 해연의 몸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온전히 차지할 수 없다면 늦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먹어 치울 작정으로.
갈가리 찢긴 몸에서 해연의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 피는 바닥 위에 고였다가 땅 아래로 깊숙이 흡수됐다. 순식간에 땅 깊숙이 파고든 그녀의 피는 다시 재생되고 있던 이현의 육체로 빨려들어 갔다.
그 순간이었다. 땅이 진동했다.
* * *
유영은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입술을 덜덜 떨며 홀로 되물었다. 가라고? 어디로?
“나 혼자 어떻게 가? 언니만 두고 어떻게 가?”
유영이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겨우 일어섰던 유영이 다시 중심을 잃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해연의 육체를 허겁지겁 목구멍 안으로 삼키고 있던 잡종들도 마찬가지였다. 땅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검은 장막이 그들을 덮쳤다. 잡종의 육체를 모조리 터트려 내장 안에 있는 해연의 살점과 피만 가지고 다시 바닥에 스며들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연의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해연의 육체와 피를 삼킨 검은 장막은 곧장 땅 아래 깊숙한 곳에 있는 이현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해연까지 집어삼킴으로써 완전한 육체를 복구한 이현의 몸이 지상으로 떠올랐다. 이현이 위로 올라서자 갈라졌던 땅이 다시 움직이며 원래의 평평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이 떠졌다. 온몸에 해연의 기운이, 청혈이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로 인해 그동안 고통과 함께 공존했던 육체는 완벽하게 안정화가 됐지만, 이현의 정신은 이전보다 더 황폐해졌다.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해연만은 무사하길 바랐는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토록 먹지 않으려 버티고 버텼건만 결국 그가 원치 않더라도 해연을 먹어 버린 것이다.
분명 본가에 있던 쓰레기들을 모두 흡수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놈만 없애면 해연이 안전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한 모험이었다. 놈은 분명 이 천형 같은 힘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힘은 다시 제게로 돌아올 거라고.
만에 하나 힘이 자신이 아닌 다른 대체재를 찾아간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사라진다 하더라도 해연은 무사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계가 만든 질서와 규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세상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놈은 자신의 대체재가 아니었다. 해연을 죽여 자신의 몸에 흡수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결국 해연을 죽음으로 몰아가던 운명을 이번에도 막지 못했다.
이 세상에 이제 해연이 없다. 자신이 먹어 버렸으니 이젠 다시 태어날 일도 없으리라.
이제 정말 혼자가 됐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무슨 소용이 있지?
이번에도 해연이 죽는다면 이 세상을 그녀의 죽음에 바치기로 했었다. 강제로라도 해연을 먹게 만든 것에 대한 보복을 해야 했다. 이 세상이 사라지면 자신도 사라지게 되리라.
보슬비처럼 약하게 내리던 비가 거세졌다. 이현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는 돌풍이 그 비를 더욱 위협적으로 만들었다. 새파랗던 하늘은 그가 덮은 먹구름으로 검어졌다. 구름 전체에 번개가 번뜩이며 지상에 내리꽂힐 준비를 했다.
그때, 절망과 파괴욕만 남은 이현의 눈에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는 이유영이 보였다.
이유영. 해연이 유일하게 가족이라며 애지중지했던 인간.
“이럴 순 없어…….”
이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해연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살리고자 했던 인간을 자신으로 인해 다시 죽게 할 수가 없었다.
이거였구나. 이런 이유로 이유영이 계속 한해연의 옆에 붙어 있었던 거였다. 자신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처럼 세상 역시 그가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만들 보루를 준비한 거였다. 그동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게 고작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 나는? 그럼 나는 어떡해요? 당신이 없는데, 나 혼자 살라고? 그게 가능해?
이현이 속에 가득 찬 분노와 좌절을 터트릴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을 때 그의 귓가로 해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연의 목소리는 아주 차분했고, 부드러웠다.
‘사랑해, 강이현. 그동안 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해연?”
이현은 정신없이 고개를 돌렸다. 해연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해연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어딨어요?”
‘당신은 괴물이 아니야. 적어도 내겐 절대로 그런 게 아니었어.’
“괴물이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그냥 다시 돌아오기만 해 줘요.”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당신만 살아 있으면 된다. 그런데 이제 당신이 없어. 이현의 메마른 눈에서 뜨거운 물줄기가 뚝뚝 떨어졌다.
“당신만 돌아오면 다신 괴롭게 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요. 욕심 부려서 미안해요. 이제 사랑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을 자유롭게 놓아줄 테니까.
그 순간 이현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왔다. 해연의 몸 안에 있던 청혈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온통 검게 물들였던 장막 같은 구름이 갈라지며 다시 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이현의 몸을 덮은 푸른 기운과 공명하듯이 이현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빛을 따라 그의 앞에 해연이 나타났다. 이전처럼 청혈의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그는 이 여자가 해연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이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환각이라도 좋았다. 설혹 이게 꿈이라 해도 이 꿈을 안고 살 것이다. 그는 떨리는 팔을 해연을 향해 내밀었다. 그런데 손가락에 닿은 해연의 살이 따뜻했다. 만져졌다. 이현은 허겁지겁 해연의 몸을 끌어안았다.
돌아왔다.
놓아준다고 애원하자마자. 마치 놓아준다는 다짐을 지키라는 것처럼, 해연이 다시 돌아왔다.
해연을 끌어안은 이현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