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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아내-104화 (104/113)

104화.

넓게 퍼졌던 연기가 순식간에 다시 돌아와 회오리치며 서로 엉겨 붙었다. 그건 점차 인간의 형태를 만들었다. 얼굴부터 재생하기 시작하더니 이현의 육체가 돌아왔다. 이현은 아직 완전하진 못하지만, 많은 힘을 되찾고 마른 한숨을 흘렸다.

어쩌면 이 고된 삶을 끝내고 도망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차 버린 걸 수도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하늘은 너무 높고 맑았다. 이 상황과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는 듯이.

언제나 그랬다. 하늘은 홀로 고고하고 깨끗해서 도리어 제가 더러운 존재라는 걸 각인시켰다.

이현은 다시 고개를 내려 자신이 딛고 선 땅을 바라봤다. 선선히 부는 바람에 잔해조차 남지 않고 사라진, 그가 만들어 냈던 쓰레기들의 흔적을.

여자를 향한 집착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며 만들어진 쓰레기들이 도리어 해연을 위태롭게 했다.

이건 모두 자신으로 인해 생긴 일이다. 자신이 가당치도 않게 해연을 원하고, 사랑을 바라서.

“나 때문에…….”

지금까지 수없이 반복된 여자의 증오는 이것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또 한 번 좌절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멈춰지지 않는 해연을 향한 갈망에 자조했다.

“나는 그저 당신 곁에 있고 싶었을 뿐인데…….”

바라는 게 고작 그거 하나뿐인데 어째서 이 바람은 당신을 해치게 되는 걸까.

이현은 끝없이 바닥을 치고 내려가는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지금은 안 된다. 다시 무너지면 해연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만약 안주희의 힘을 흡수하지 않았더라면 이걸 시도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연을 구하러 가기도 전에 형태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으리라.

그래서 안주희의 소원대로 안재호와 윤시후를 살려 두었다. 안재호의 두 다리를 제외하고.

상체만 남은 안재호가 버러지처럼 바닥을 기어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한 채 피를 토하고 멈췄다.

이현은 잘게 경련하고 있는 안재호의 몸을 지나 얌전하게 앉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삵을 바라봤다.

윤시후.

해연을 지키라고 남겨 놓은 것까지 해연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 그것 역시 자신의 패착이었다.

그는 무거운 얼굴로 해연이 있을 별채로 향했다.

조금이나마 힘이 돌아와서일까. 거의 맡아지지 않을 정도로 옅었던 해연의 향이 다시 짙어졌다. 깨끗하고 청량한 냄새. 아직 무사하다는 증거. 하지만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

이현은 여유로운 얼굴로 별채 밖으로 나오는 놈을 본 순간 발을 멈췄다. 보는 순간 알았다. 자신이 무너져 내린 순간 빠져나갔던 근원이 모두 놈의 몸 안에 고여 있다는 사실을.

놈은 그와 달리 이 천형 같은 힘을 가진 걸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것이란 걸 모른 채.

* * *

“그래, 이래야 좀 상대가 되지.”

괴물이 아까보다 힘이 강해진 이현을 보고 낄낄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순혈을 잡아먹는 모습을 봤을 때 공격할까 했지만, 그래 봤자 저를 이길 수 있는 수준이 되진 못한다는 걸 깨닫고 기다렸다.

저를 죽였던 놈을 쉽게 죽이는 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정도가 돼야 죽여도 만족스러울 터. 하지만 그 끝은 어느 누구보다 참혹하리라. 저놈을 죽여서 한해연의 앞에 가져갈 것이다. 그럼 한해연은 자신을 구해 줄 상대가 사라졌다는 걸 깨닫고 제게 복종할 게 분명했다.

놈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게 다리를 벌리겠지. 그년의 가랑이 사이에 좆을 박고 피를 빨면 기분이 어떨까. 끝내주겠지. 아주 미치게 황홀하리라.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숨이 헐떡거렸다. 제 것이 된 한해연을 뺏으러 온 놈을 죽이자. 그리고 저 몸뚱이까지 삼켜 이 세상에 우뚝 서리라.

“한해연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네까짓 게?”

“…….”

이현은 괴물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해연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해연은 건물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지만, 그의 눈은 모든 걸 뚫고 해연을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입지 못한 채 침대에 묶여 있는 해연의 얼굴에 난 생채기를 본 순간 그의 눈이 검게 가라앉았다.

만약 자신이 끝내 정신을 놓아 버렸더라면, 해연은 지금보다 더 비참한 모습을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의 분노에 동조하듯 이현이 딛고 선 땅이 진동했다. 해연이 좋아했던, 고풍스럽게 가꿔졌던 정원은 이미 사라져 황폐해진 뒤였다. 잔디조차 사라진 땅이 흔들리더니 쩌억 갈라져 이현이 서 있는 곳부터 빠른 속도로 괴물을 향해 입을 벌렸다.

괴물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가볍게 허공에 떠 피하는 순간, 이현의 몸이 괴물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현의 팔이 괴물의 허리를 갈랐다.

“크아아아아!”

허리가 반쯤 갈라진 괴물이 고함을 내지르며 이현을 공격했다. 괴물에 의해 머리를 가격당하자 이현의 몸이 짧게 휘청였다. 공격을 한 번씩 주고받은 두 사람은 양쪽으로 주욱 밀려났다가 다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무엇이 파괴되든 신경 쓰지 않는 괴물과 달리 이현은 힘을 반쯤 빼고 해연이 있는 건물을 보호하고 있었다. 괴물은 그걸 깨닫고 입술을 길게 찢으며 이현을 비웃었다.

“이 병신 새끼야. 네가 지금 한해연을 걱정할 주제나 되는 줄 알아? 전력을 다해도 상대가 될까 싶은데 어디서 감히 여유를 부려!”

“…….”

이현은 괴물의 조롱에도 담담했다. 그도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간 힘이 대체재를 찾아 제 눈앞에 있는 괴물에게로 흘러들어 간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 순혈 몇 명의 힘을 흡수했다고 놈을 상대할 수준이 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건 고작해야 자신의 대체품밖에 되지 않았다. 저 약하디약한 몸으론 욕심껏 삼킨 제 근원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잘 버티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건 모험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건 단 한 번뿐인 모험. 이 모험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해연을 다시 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해연은 안전해지겠지.’

그럼 됐다. 다신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해연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의 해연을 만나면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그녀가 죽는다면 이 세상과 함께 끝내겠다고.

그런데 막상 그런 상황에 다다르자 그는 가장 먼저 해연만이 무사하길 바랐다.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상관없이 오로지 그녀만은 안전하길, 바랐다.

‘그래도 좋았어. 며칠뿐이었지만, 해연이 날 받아들여 줬었으니까.’

처음이었다. 날 받아 주려고 노력하는 여자는. 여자는 몇 번을 거듭 태어나고 태어났지만, 아무도 그를 사랑해 주지 않았다. 늘 외로웠고, 힘들었다. 그렇기에 고작 며칠간의 행복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에겐 절대 주어지지 않을 행복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면, 이제 당신도 평온하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테지.’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여자의 뜻 모를 증오가 익숙하면서도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안다. 알게 됐다. 끝에 다다라서야 이현은 드디어 인정할 수 있었다. 여자의 모든 생애가 힘겨웠던 것은 제가 붙어 있어서였다고. 불행 그 자체인 자신이 있었으니 그녀의 삶도 저로 인해 오염된 것이리라.

‘미안해요.’

내가 멍청해서 몰랐어요. 이제라도 내게서 해방시켜 줄게요. 당신을 괴롭히던 괴물에게서.

마지막 미련까지도 끊어 낸 이현은 괴물의 몸 안에 있는 자신의 근원을 흔들었다. 아직 괴물의 몸에 완전히 융화되지 못한 근원이 원래의 주인을 찾아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여유가 넘쳤던 괴물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몸이 이상했다. 한해연의 피를 먹고 안정적으로 다듬어졌다고 생각했던 힘이 갑자기 그의 제어를 벗어났다.

괴물이 아주 잠깐 방심한 사이 이현이 괴물의 팔을 뜯어냈다. 찢어진 팔을 뚫고 검은 피가 허공으로 확 퍼졌다. 하지만 이현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괴물의 팔을 뜯어낸 순간 놈의 다른 팔이 이현의 심장을 꿰뚫었던 것이다.

“……!”

“내가 그랬지? 여유 부리지 말라고.”

그 순간 이현이 웃었다.

“웃어?”

살려 달라고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여유롭게 웃기까지 하는 모습에 빈정이 상한 괴물이 퍽, 손을 뒤로 밀어 이현의 심장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제 입안에 넣고 씹지도 않고 단숨에 삼켰다. 괴물의 목구멍 안으로 넘어가는 심장은 여전히 펄떡거렸다. 괴물은 얼굴에 피를 잔뜩 묻힌 채 심장을 잃고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버린 이현의 육체를 발로 걷어찼다. 이현의 시체가 처참하게 갈라진 땅 아래로 뚝 떨어졌다.

퍼억……. 깊은 절벽 아래에서 크게 부딪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괴물은 놈의 시체가 이젠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땅 속 깊이 처박힌 것을 확인하고 상체를 들썩이며 거친 숨을 흘렸다.

“하아, 하…….”

끝났다. 죽였다. 놈의 심장도 먹었다. 이제 다 내 거다.

“다 내 거…….”

이현의 힘이 모여 있는 심장을 집어삼킨 괴물이 갑자기 몸을 휘청거렸다. 다리에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게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놈의 힘을 모두 가졌는데 왜 이렇게 아프지? 이제 다 내 건데. 내가 제일 강한데, 왜 아파?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인식하지도 못했던, 살갗에 닿는 공기조차도 아팠다. 전신에 빈틈없이 칼날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왜?’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더 강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동안 강해지는 대가로 몸이 조금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까진 아니었다. 지금은 숨을 쉬는 것조차도 고통스러웠다.

괴물의 머리가 중심을 못 잡고 옆으로 기울었다. 다리도 팔도 기괴하게 꺾였다. 눈알은 충혈되어 앞으로 튀어나왔고, 혀가 길게 내려온 입에서 피와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너무, 아파…….”

온몸이 부스러질 것 같다. 공기에 스치는 피부도, 머리도, 내장도, 손도, 다리도 전부 아팠다. 안 아픈 곳이 없었다. 팔이 뜯겼을 때 느낀 고통은 고통도 아니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평생?’

그때, 괴물이 혀를 길게 뺀 상태로 히히 웃었다. 한해연의 냄새가 아주 맛있게 풍겨 났기 때문이었다. 한해연을 먹으면 다 좋아지리라. 그래, 이때를 위해 아껴 왔던 거다.

“한해연, 한해연, 한해연, 한해연…….”

괴물이 바깥쪽으로 꺾인 다리를 움직여 한 발 한 발 해연이 있는 곳을 향해 삐걱삐걱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괴물의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얼마 가지 못한 채 체중을 버티지 못한 다리가 툭 꺾인 순간, 괴물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쓰러진 괴물의 전신에서 이현의 근원이 흘러나왔다. 괴물의 몸을 벗어난 검은 연기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 위로 향하려고 하자 새파랗던 하늘에서 투둑투둑 비가 떨어졌다. 먹구름도 없이 깨끗하고 맑은 하늘에서 내린 비는 검은 연기를 꾹 눌러 땅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이현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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