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죽일 거였으면 진작 죽였으리라. 자신은 물론 유영이까지 아직 살려 두고 있다는 건 분명 무슨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죽이지 못할 정도의 필요.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은 우위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추측은 괴물이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에서 더욱 확신이 생겼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죽어 버릴 테니까.”
“이 씨발년이 진짜. 오냐오냐해 줬더니!”
“그럼 죽여.”
“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빌빌 기던 해연의 돌변에 괴물은 그녀의 얇은 목을 손으로 감아쥐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차마 손에 힘도 주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씩씩거리기만 했다. 그 접촉조차도 소름 끼치도록 싫었지만, 해연은 오연한 얼굴로 괴물을 직시했다.
한동안 해연과 눈을 마주치고 있던 괴물은 해연을 묶어 놓은 끈을 확인하고 그녀를 비웃었다.
“죽어 버린다고? 어떻게? 이 꼴로 자살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못할 거 같아?”
되받아치는 해연의 얼굴이 결연했다. 자살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만 죽는 건 상관없지만, 유영의 생명까지 담보로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몸을 걸고서라도 아주 조금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지켜야 했다. 자신의 몸도, 유영이의 생명도 지킬 수 있도록.
진심이 느껴졌던 걸까. 괴물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목에서 황급히 손을 풀었다. 한해연이 죽어 나자빠지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두려웠다. 한해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 안위 때문에.
몸에 가득 찬 힘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불어나기만 하는데, 한해연이 죽어 버리면 다시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한해연은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 한해연 자신보다도 그녀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괴물은 결국 삽입을 포기했다.
“씨발!”
“…….”
이겼다. 목숨을 건 모험이 결국 먹혀들자 해연은 참고 있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섭다. 무서웠다. 이 상황이. 눈앞에 있는 괴물도 두렵고 이현이 오지 않아서 머리가 엉망이었다. 정말 자신을 버린 걸까?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그럴 리가 없는데 자꾸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 불길한 감정에 불을 지피듯이 괴물이 해연의 속을 긁었다.
“하긴 유산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좆질을 하긴 좀 그렇겠지?”
“……뭐?”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유산이라고? 해연이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뜨자 괴물은 제가 더 놀랐다는 듯이 되물었다.
“호오. 그 놈이 네 몸에 좆물 냄새가 풀풀 나도록 쌌는데 임신한 줄도 몰랐어?”
“…….”
“네가 여기 온 날, 가랑이 사이로 피를 줄줄 흘렸잖아. 기억 안 나? 애가 떨어진 거라고.”
“그게 뭐?”
해연은 괴물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더 냉정하게 대꾸했다. 괴물과 이현의 말. 둘 중에 신뢰도가 높은 건 이현의 말이었다. 고작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라는 것 하나에 제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던 이현의 얼굴을 믿어야 했다. 자신에게 절망을 주려고 안달 난 저 괴물의 헛된 말이 아니라.
‘그래, 이현을 믿을 거다. 그리고 그가 올 거라고 믿을 거야.’
분명 그가 와서 자신을 구해 주리라. 그러니 그때까지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야 했다.
잠시 흔들리던 해연의 눈이 다시 단단해지자 괴물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여자의 고집스러움에 내심 혀를 찼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여자의 가랑이 사이로 흘러내린 건 여자와 붙어먹은 놈의 힘이었으니까. 자살을 운운할 정도까지 저를 거부한 여자의 행동이 짜증 나서 충격 좀 받아 보라고 한 말이었는데 도리어 역효과만 낳은 셈이었다. 그래서 더 속이 들끓었다.
‘내가 그 새끼랑 다른 게 뭐라고.’
해연의 목숨을 건 거부가 괴물의 속에 아직 남아 있던 열등감을 긁었다. 놈을 없애야 했다. 이년과 붙어먹었던 놈을 죽이면 이 불쾌감도 사라지리라.
그때였다. 고요하던 밖에서 갑자기 비명과 함께 소란이 일었다.
“씨발, 왜 지금……!”
창문을 뚫어져라 보던 괴물이 입술을 길게 찢었다. 놈이다. 그놈이 왔다. 자신을 죽인 놈. 또 한해연과 붙어먹은 놈. 마침 죽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하지만 놈의 힘이 아주 약하게 느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의심했던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한해연을 구하러 온 건가?’
괴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제가 낸 상처로 처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한해연을 바라봤다. 한해연을 향한 독점욕으로 괴물의 눈이 번들거렸다.
이년을 구한다고? 제까짓 게? 이건 내 거야. 내 것이다. 내 먹이야. 아무한테도 뺏기지 않는다. 내 것을 탐하는 놈은 모두 죽여 버릴 거다.
인간의 모습이었던 괴물의 몸이 크게 부풀어 오르더니 온몸에 검은 털이 돋아났다. 그 아래에서 괴물이 변하는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 있던 해연이 구역질이 날 것 같은 혐오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네 수컷이 온 모양이야. 기쁘지?”
“……!”
괴물의 은근한 말에 해연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해연의 얼굴에 희망에 돋아나자 괴물이 소름 끼치는 얼굴로 웃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놈의 목을 따서 가져올 테니까. 네 앞에서 먹어 줄게.”
이현이 질 리가 없다. 그는 강하니까. 어느 누구보다 강하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이 괴물을 이기고 자신과 유영을 구해 줄 것이다. 틀림없이.
“죽는 건 너야.”
“미친년아, 조금 있다가도 그 말 똑같이 할 수 있나 봐라.”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가랑이 벌릴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괴물의 구역질 나는 호언장담에 해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만약. 만에 하나 정말 이현이 괴물을 당해 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희망이란 없다. 살아날 방도가 없는데 왜 괴물에게 살려 달라고 빈단 말인가.
하지만 이현이 자신을 구하러 온 이 중요한 순간에 괴물의 심기를 굳이 뒤흔들 이유가 없어 해연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는 유영을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 유영아. 이현이 구하러 왔으니까, 분명히 모두 괜찮아질 거야.’
그때 괴물이 다시 해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괴물에게 피가 빨려 몸에 생채기가 났고, 그게 채 낫기도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겼다. 괴물이 이현과의 전투를 대비해서 이번엔 더 많이, 욕심껏 빨자 해연은 피가 부족해서 생기는 빈혈로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번엔 눈을 감지 않았다. 이현이 왔으니까. 이딴 괴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괴물.
해연은 계속 이현을 향해 괴물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현은 괴물일 수가 없었다.
‘사랑하니까.’
그 모든 순간을 겪고도 그를 놓을 수 없는 이 마음은 사랑일 수밖에 없었다. 해연은 그렇게 뒤로 미루고 미루며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이 감정을 결국 정의 내렸다.
‘당신을 보게 되면, 꼭 말해 줄게요.’
당신은 절대로 괴물이 아니라고. 사랑, 한다고…….
만족할 만큼 피를 빤 괴물이 기세등등하게 밖으로 나가자 가물거리던 해연의 눈이 결국 감겼다.
* * *
이현은 본가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곳엔 모든 ‘순혈’들이 모여서 진을 치고 지키고 있었다.
가장 앞엔 안재호가 서 있었다. 안재호는 마치 순혈의 우두머리가 된 것처럼 기세등등한 얼굴로 이현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멍청한 짓을 하고 있군.”
“제가 볼 땐 당신이 더 멍청해 보이는데요. 고작 그 힘으로 우리를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안재호는 호기롭게 말하며 이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존재가 못 본 사이에 아주 하찮게 변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비록 그게 괴물이 그의 머리를 조정해 강제로 만든 선택이었다 한들, 안재호는 이미 이현을 배신하고 있었다.
일족들을 모아 인간 여자에게만 신경 쓰는 주인을 비난하며 이간질했고, 그러자 처음엔 눈치를 보던 이들도 그의 이간질에 동조하며 하나둘 쌓아 둔 불만을 터트렸다.
괴물이 중간에 끼어들어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주인이 생겼으니 이제 약해 빠진 이전의 주인을 처리할 차례가 됐다. 안재호가 그토록 바라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대체 어디서 뭘 했길래 그 꼴이 되셨습니까?”
이현은 안재호의 조롱에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순혈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터를 잡았던 본가도.
사실 지금 이현의 몸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무너지기 직전 자신을 찾는 해연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꿰어 맞춘 육체였다. 그에게 남은 힘은 육체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나마 안주희의 힘을 흡수해서 견딜 수 있는 정도가 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들의 뒤에 있는 별채에 해연이 있다. 자신이 해연을 소중하고 소중하게 품었던 곳에 갇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설혹 이 육체가 완전히 사라진다 하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현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자 그를 주인이라고 섬겼던 순혈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현은 저를 향해 달려드는 순혈들을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리 지금 그가 약해졌다 한들 그에겐 필요할 땐 언제든 뽑아 쓸 수 있는 여분의 힘이 남아 있었다.
자신들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있는 ‘쓰레기’들이.
그가 여자를 기다리며 오랜 시간 땅에 머물러 있는 사이 근처에 있던 동물들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먹고 형태가 변형됐다. 그건 오염이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것이라 칭해야 마땅한 것.
착각에 빠진 쓰레기들은 오랜 시간 동안 씨를 퍼트려 더 많은 동족을 만들어 세력을 부풀렸다. 그건 이현에게 도움이 됐다. 여자가 새로 태어나길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동안 흘러간 시대를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해 줬고, 그에게 필요한 자원을 바쳤다.
어차피 이 땅에 계속 뿌리내리고 있으면 이들이 아니어도 또 다른 쓰레기가 생긴다. 그래서 이현은 그들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들 위에 서서 통제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었다.
수많은 순혈들에게 둘러싸인 이현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육체를 폭발시켜 터져 나온 검은 연기는 아주 느리고 약해서 순혈들은 도리어 이현을 비웃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존재가 이렇게 약해 빠졌다는 게 우습기만 했다.
그들은 검은 연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피할 만한 가치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실착이었다.
순혈들이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힘을 아주 조금씩 빨아들인 연기는 점점 부피를 키우며 증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일처럼 거대하게 부풀어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순혈들을 휩쓸었다.
“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이현의 바로 앞에 있는 순혈들을 덮친 검은 연기가 꿈틀거리며 그들의 몸에서 힘을 빨아들였다. 연기는 순혈의 힘을 먹고 더욱 커지고 흉포해졌다.
아직 뒤에 서서 이현을 감싸고 있던 순혈들은 일족이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가는 모습을 본 순간 뒤를 돌아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퍼져 나간 검은 연기가 그들의 발목을 잡아챘다.
마치 지옥도가 펼쳐진 것처럼 검은 연기가 훑고 지나간 곳은 새하얀 동물의 유골만 남았다. 그 유골조차도 바람이 분 순간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