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주인이라면, 제게 물을 필요도 없이 한해연이 어디에 있든 알아서 찾아갔을 것이다. 안주희는 눈앞에 있는 이가 정말 주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본능은 저 남자가 주인이 맞다고 알렸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안주희는 일단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본가에 있어요. 별채에…….”
주인은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렸다. 안주희는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저 약한 힘으론 본가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당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혼자 가시게요? 안 돼요. 지금 거긴 당신보다 강한,”
“나보다 강한?”
“…….”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했던 주인에게 당신은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할 거라고, 그렇게 약한 몸으론 한해연을 구할 수 없을 거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안주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이현의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 줬다.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일족들이 다른 여자에게 주인이라고 하고 있어요. 그 여자는 주인님과 아주 비슷한 느낌이고, 그런데 주인님은 지금 힘이 너무 약해져서…….”
마치 주인이 아닌 것 같다고. 안주희가 더듬거리며 말을 흐렸다. 그녀는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땀이 흐르고 있다. 얼굴뿐 아니라 전신에.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저 상태로 한해연을 구할 수 있을까. 안주희는 제 손을 뿌리치고 나가려는 주인을 향해 소리쳤다.
“절 드세요. 제 힘을 드시면 조금 나아지실 거예요.”
“…….”
예전에 별채에서 한해연을 잡아먹으려던 일족의 힘을 모두 뺏어 하찮은 동물로 만들었던 것처럼. 윤시후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말이 예상치 못했던 걸까. 주인은 다시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안주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선택이 옳은 걸까.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작 자신의 힘을 흡수한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건 확률이 너무 낮은 위험한 모험이었다. 만약 주인이 한해연을 구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자신은 다시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들짐승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해서라도 한해연을 구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지켜봐 왔던 대로라면. 그러니 이 모험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안주희가 결연한 얼굴을 하자 이현은 그녀에게로 가까이 왔다.
“바라는 게 있나요?”
순수한 의도만으로 이러지 않는다는 걸 안다는 듯이 이현이 원하는 걸 말하라고 하자 안주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구해 주세요. 아버지가, 어딘가로 숨겨 놨는데 찾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의 목숨을 인질 삼아 아버지, 안재호는 그녀를 제 마음대로 휘둘렀다. 엮인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주인에게 아버지의 배신도 말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의 생사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가 잘못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죽이는 게 아니라?”
“제가 죽일 거예요! 그러니까 제 몫을 남겨 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참혹하게 죽일 것이다. 그게 안주희가 바라는 소원이었다. 일족의 가장 첫 번째 규율은 친족을 살해하지 않는 거였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그 규율을 어기면 일족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꾹꾹 속으로만 눌러 왔던 소원이었다.
이현은 새빨간 핏줄이 선 안주희의 눈을 가만히 보며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에 댔다.
“또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주인의 말에도 안주희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자신의 모험은 성공해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시후도 살려 주세요. 걔가 어려서, 아직 사리분별을 잘 못해서 그런 거니까…….”
시후가 아주 어릴 적, 아버지에 의해 힘들어하며 울던 자신을 위로하려고 그 조그만 손으로 등을 토닥이던 것이 생생했다. 자기가 크면 다 혼내 주겠다며 호언장담하던 것도. 물론 너무 오냐오냐하고 크다 보니 철없이 행동해 자신을 괴롭게도 했지만, 그래도 동생 같은 아이였다.
안주희의 간절한 말에 이현은 차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 줄 테니. 이현의 말에 안주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녀의 이마에 닿은 손바닥을 통해 전신에 있던 힘이 쭉 빨려 나갔다. 잠시 후, 그 공간에 남은 것은 바닥에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평범한 여우 한 마리뿐이었다.
* * *
유영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해연을 상처 입힐 때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자신이 하는 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 잔인한 말이 토해져 나왔다.
그건 오늘 집에서 나올 때부터 그랬다. 유영은 단 한 번도 해연을 원망하거나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좋기만 했다. 집이 생긴 것도 좋았고, 그 집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좋았다.
포근하고 따뜻한, 가족이 있는 집이 평생의 소원이었기 때문에.
고작 영화 따위 안 봐도 됐다. 그런 것보다 그냥 해연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았다. 그런데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지 말자는 해연을 향해 독설을 내뱉으며 기어이 밖으로 끌고 나왔고, 해연을 잡고 이진아를 따라갔다. 아니, 이진아라고 생각했던 저 남자에게. 아니, 괴물에게.
‘언니 미안해…….’
유영은 자신을 보고 안도한 얼굴을 하는 해연을 향해 입 밖으로 토해지지 않는 사과의 말을 하고 또 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그런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유영아, 이거 네 잘못 아니야. 응? 이건 다, 악!”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줬으니 이제 내 차례야.”
괴물은 유영에게 이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던 해연의 머리채를 잡고 거칠게 침대에 눕혔다. 유영은 당장 달려가 해연을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발이, 몸이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언니, 언니!’
마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해연이 유영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옅은 웃음마저 지으며. 절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저를 생각하는 해연의 모습에 유영은 차라리 울고 싶었다. 그런데 제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몸은 눈물조차 내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비참하고 끔찍했다.
“웃을 여유도 있어?”
“…….”
“아니면 나랑 하는 게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그 순간 해연이 괴물을 향해 침을 뱉었다.
“웃기지 마. 구역질이 날 것 같으니까!”
“……이게 미쳤나.”
어이가 없는 얼굴로 제 뺨에 붙은 침을 손으로 닦아 내린 괴물이 그 손으로 해연의 뺨을 내리쳤다. 해연의 다른 뺨마저 새까맣게 멍들었다. 온 얼굴이 엉망이 된 해연이 숨을 헐떡이자 입에 고인 피가 입술 밖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피가 내는 향기에 다시 손을 들어 해연을 때리려던 괴물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괴물은 해연의 뺨을 손으로 세게 쥐어 고정한 뒤, 피가 흘러내린 입술과 턱을 혀로 핥았다. 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핥아 먹고도 부족해 아직 피가 흐르고 있을 입술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
“……!”
입술에 닿는 혀가 끔찍하게 역겨웠다. 유영이 괜찮기만 하다면 강간을 당해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입 안쪽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괴물의 혀가 구역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해연은 입술을 이빨로 꽉 깨물어 괴물의 혀를 막았다.
“어쭈?”
“…….”
“네가 반항하면 이유영이 어떻게 될 것 같아?”
“……!”
“내가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못할 거 같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괴물의 협박에 문가에 서 있던 유영이 가까이 걸어왔다. 그 순간 해연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꽉 다물려 있던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서서히 벌어지는 입술을 보며 괴물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이렇게 순순히 굴라고. 저년이 뒤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
해연은 괴물이 제 입술 안에 혀를 집어넣고 샅샅이 훑을 때 멍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유영을 외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유영을 부르지 말 걸 그랬다. 그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자신의 섣부른 생각으로 유영에게 자신이 괴물에게 이런 짓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만들었다.
‘왜 나는 매번 안 좋은 선택만 하는 거지?’
해연의 눈에서 비참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괴물이 제 입안을 혀로 탐하는 것보다, 괴물의 성기가 비벼지고 있는 허벅지 안쪽이 축축하게 젖고 있는 것보다, 유영이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게 더 끔찍했다.
드디어 괴물의 혀가 빠져나갔을 때, 해연은 고개를 돌려 입안에 고인 괴물의 타액을 토했다.
“우욱!”
구역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이현과 너무 달랐다. 이현과 닿으면 몸이 저절로 달뜨는 것과 달리 괴물의 혀가 입안을 파헤쳤을 때는 온몸의 내장이 뒤집히는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리 토악질을 해도 입안에 괴물의 타액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해연이 혐오감이 물씬 든 얼굴로 몸을 들썩이며 토하는 모습을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 보던 괴물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싫어하니 더한 것도 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괴물은 헉헉거리고 있는 해연의 머리채를 잡고 저를 보게 만든 다음 바지 지퍼를 내려 성기를 끄집어냈다. 이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있도록. 괴물의 의도대로 해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질렸다.
해연은 본능적으로 이 모습을 보고 있을 유영을 바라봤다. 유영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해연을 보고 있었다. 이런 짓을 당하고 있는 모습을 전부 다 보고 있었다. 해연은 괴물에게 애원했다.
“유영이를, 바, 밖으로 내보내 줘……. 그럼, 시,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제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대로도 충분히 재미를 볼 수 있는데 말이야.”
오히려 이유영이 있으니까 더 말을 잘 듣는다고 괴물이 낄낄 웃으며 해연을 비웃었다. 괴물이 해연의 양다리를 확 벌리며 성기를 들이밀려던 찰나, 괴물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해연이 발작적으로 괴물의 뺨을 친 거였다. 괴물의 고개가 느릿하게 다시 해연을 향해 옮겨졌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어디서 감히.”
“죽여 봐. 죽이라고!”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저지르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더 냉정해졌다. 해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괴물은 계속 그녀가 아닌 유영을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만 했다. 그건 오히려 죽이지 못한다는 신호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