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의 아내-100화 (100/113)

100화.

검은 연기가 닿은 곳이 전부 썩기 시작했다. 괴물은 살점이 썩어 잇몸이 모두 드러난 흉측한 모습으로 기어코 모조리 삼켜 버렸다. 검은 연기는 괴물의 몸 안에 들어가 융화되기를 거부했다. 괴물의 몸이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울룩불룩하게 부풀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라앉았다. 괴물이 결국 이현의 근원을 모두 제 몸에 융화시켜 버린 것이다.

“어디서 좆같은 게 설쳐대.”

융화되기가 무섭게 녹아내렸던 피부도 순식간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괴물은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먹었던 순혈들보다도 가장 강한 힘을 가진 것을 먹자 속에서 힘이 들끓었다.

괴물은 두려운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순혈들을 노골적으로 비웃으며 유영의 품에 의식을 잃고 안겨 있는 한해연을 휙 가로채 어깨에 들쳐 멨다. 그리고 마치 원래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당당하게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순혈들의 본거지 중에 가장 공을 들여 꾸며진 공간이었다. 한눈에 봐도 한해연을 지키던 놈의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순혈들은 제 주인의 공간을 침범하는 괴물을 저지하지 않았다. 아니, 저지하지 않는 게 아니라 괴물이 그곳에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몸을 물려 길을 터 주기까지 했다.

괴물의 뒤를 유영이 따라갔다. 유영의 입술엔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웃음마저 달려 있었다.

유영마저 별채 안으로 들어서자 순혈들은 별채를 지키는 경호원처럼 입구 앞에 도열했다. 가장 앞에는 안재호가 서 있었다.

* * *

안주희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일우는 연락이 끊겼고, 윤시후는 어디로 갔는지 돌아오지 않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인이 쳐 놓았던 결계도 흔적만 남은 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아무도 없는 빈집을 지키고 있던 안주희는 아침 이른 시간에 외출하는 해연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한해연에게서 나는 냄새가 너무 짙었기 때문에. 섣불리 따라나섰다간 도리어 자신이 그녀를 잡아 삼킬 것 같아서.

그래서 한해연이 지켜 주는 이 없이 이유영과 단둘이 외출하는 걸 알면서도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본가로 피신해 있으려고 했다. 하지만 본가 역시 뭔가 이상했다.

“…….”

다른 냄새가 풍겼다. 주인의 냄새가 아닌, 아니, 아주아주 비슷했지만, 어딘가 생소한 냄새가. 안주희는 본가에 들어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지키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 주인이 사용하던 세단이 본가 앞에 섰다. 한해연의 냄새를 짙게 풍기며.

‘주인인가?’

순간 안도하며 가까이 가려던 안주희는 세단에서 내리는 모르는 여자를 보자마자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여자는 주인과 아주 비슷한 느낌이 났다. 주인일 리가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여자는 뒷좌석에서 한해연을 끌어 내렸다. 한해연은 반항하려고 했지만, 따라 내리는 이유영을 보더니 반항을 멈췄다. 그리고…….

아버지, 안재호가 일족을 이끌며 우르르 나와 여자를 향해 마치 주인을 대하듯 몸을 숙였다.

‘이게 뭐야?!’

대체 왜? 저 여자가 아무리 주인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해도 결코 주인이 아니었다. 안주희는 어제 저녁부터 보이지 않던 윤시후가 여자의 발밑을 뒹굴며 애교를 부리는 걸 보고 기겁했다.

그녀는 더 볼 것도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해연이 위험했고, 자신은 저기서 한해연을 구할 힘이 없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주인을 찾아야 한다.

* * *

순혈의 본거지를 차지한 후 괴물은 가장 먼저 잡종들을 불러 모았다. 처음엔 자신을 사냥하기 위한 미끼가 아닌가 하던 잡종들은 저와 친했던 괴물이 순혈들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안심해 또 다른 잡종들을 데려와 본가를 차지했고, 순혈들은 그들의 종이 되어 부려졌다. 완전히 형세가 뒤바뀐 상황이었다.

오랫동안 쌓여 온 모든 규율과 기반이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무너져 버렸다. 그럼에도 순혈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본가를 장악한 괴물이 아주 작은 불만의 기색을 보인 순혈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잡아먹었기 때문이었다.

잡종들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고,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것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이 제멋대로 굴었다.

잡종들은 인간을 사냥해 와 먹기도 했고, 순혈의 어린아이를 잡아먹기도 했다. 이현이 돌아온 후 다소 정적마저 감돌던 본가엔 이제 비명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아름답게 가꿔졌던 정원은 완전히 황폐해졌고, 간혹 싸움이 붙어 건물도 부서졌다.

잡종들이 이제 눈치 볼 필요 없이 닥치는 대로 인간을 사냥하기 시작하자 실종 신고가 무수히 이어졌지만, 그걸 모두 무마시킨 것은 안재호였다. 순혈들이 인간 세상에 끼어 살기 시작하면서 차근차근 권력과 부를 독점했기 때문에 인간 몇 명이 사라졌다고 그들에게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안재호에겐 그 상황들이 조금 번거로울 뿐이지 큰 불만은 없었다. 괴물을 제외하고는 그들 가운데 가장 위에 선 것은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눈치 볼 존재는 괴물뿐이었다. 안재호가 비위를 잘 맞추기도 했고, 문제가 될 만한 일들은 깔끔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괴물은 잡종들보다 그를 더 우대했다. 말을 아주 잘 듣는 개를 내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괴물은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점점 더 강해졌다. 대체 왜 이런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괴물은 그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계속 주입되는 힘을 감당하는 것에 급급해 그런 걸 따지기엔 여유가 없었다.

강해질수록 그 힘에 대한 부작용인지 간혹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몸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였다. 처음에는 순혈을 부리는 권력에 심취했던 괴물은 점차 그것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아니, 흥미를 가질 여유도 없었다.

한해연의 옆을 벗어나기만 하면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몸이 꼬꾸라졌다. 몸 안에 가득 찬 힘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는데 그 힘을 감당할 육체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바라던 힘을 마음껏 쓰기는커녕, 이젠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게 괴물에게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한해연의 존재였다.

인간을 사냥하며 날뛰는 잡종들과 달리 괴물은 별채 안에 잠적한 채 오직 한해연만을 끼고 돌았다. 사냥보다도 한해연의 곁에서 그녀의 냄새에 취해 있는 게 그 어떤 마약보다도 황홀하고 더 중독적이기 때문이었다.

괴물은 별채 가장 깊은 곳에 머물며 아직도 의식을 잃고 누워만 있는 한해연의 피를 조금씩 빨았다. 그것만으로도 그날 하루는 푹 쉴 수 있었다. 그래서 가장 안쪽에 숨겨 놓고 아끼고 아꼈다.

한해연을 먹이로 보지 않는 인간인 이유영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별채에 드나들 수 없었다. 해연의 냄새를 맡고 기어들어 오는 순간 괴물에 의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밖에 버려졌다.

“이 개 같은 것들이 어디서.”

그렇게 경고를 했건만 또다시 별채 안으로 기어들어 온 잡종의 머리를 손으로 찢어 목에서 분리해 버린 괴물은 흉흉한 얼굴로 마당 밖으로 시체를 던져 버렸다. 고적하던 별채의 정원은 이미 황폐해진 지 오래였고, 괴물이 내던진 시체들로 한가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수의 대상이었던 순혈은 힘의 우위를 일찍 깨달아 상대적으로 관리가 잘됐지만, 잡종이 문제였다. 그동안 너무 조용히 지냈던 탓인가. 기껏 이곳으로 불러들여 줬더니 주제도 모르고 한해연을 먹으려고 기어이 제가 있는 별채까지 기어들어 오려고 했다. 순혈을 마음대로 부리다 보니 온갖 것이 모두 저희들 세상인 줄 안다. 감히.

‘다 죽여 버릴까?’

오늘 아침에 이미 한해연의 피를 빨아 육체가 안정화됐기 때문에 본가에 있는 것들을 초토화시키는 건 무리가 없었다.

크르릉, 성마른 짐승의 위협적인 하울링이 별채를 넘어 본가까지 울렸다. 본가에 있던 잡종과 순혈들은 그 소리를 듣고 몸을 납작 숙였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최상위 포식자가 내는 사냥 신호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찢어 죽이기 위해 달려가려던 괴물의 몸이 움칫 멈췄다. 한해연의 냄새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괴물은 별채를 넘어가기 직전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 * *

해연이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현과 함께 지냈던 그 방, 그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이현이 아니라는 것. 차라리 꿈이길 바랐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는 해연이 정신을 잃기 전에 봤던 이진아의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정말 이진아였던 건 맞는 걸까. 이진아는 처음부터 괴물이었을까?

“깼구나.”

해연은 반가운 표정으로 불쑥 제게로 얼굴을 들이미는 괴물을 피하려고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이 모든 악몽의 시작이었던 그때처럼 온몸이 묶인 채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음습하고 피비린내 나는 창고가 아니라는 것과 입이 막히지 않았다는 것뿐.

“괴물…….”

해연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말에 괴물이 입술을 주욱 찢으며 웃었다. 외관상으로는 꽤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해연에겐 괴기스럽기만 했다. 몸을 떨며 옆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던 해연의 고개가 강제로 다시 돌아갔다.

괴물이 해연의 턱을 꽉 잡고 눈을 맞췄다. 새까만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왜 그놈이 널 바로 안 잡아먹었는지 궁금했거든? 나였으면 핏방울,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일단 목구멍에 쑤셔 넣었을 텐데. 그런데 막상 잡고 나니까 알겠어. 한 번에 먹어 치우기엔 너무 아까워.”

그놈도 똑같았겠지, 씨발. 괴물이 혀를 내밀어 목줄기를 핥아 올리자 해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축축하고 물컹한 혀가 살갗을 타고 움직일 때마다 불쾌하고 역겨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