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챕터12
선잠을 자던 해연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번뜩 눈을 뜨니 깜깜한 방에 검은 인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 유영이야?”
“깼어요, 언니?”
“왜 안 자고 그러고 있어?”
너무 놀라서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해연은 급격히 뛰는 가슴을 손으로 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냥, 이제 언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아서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유영의 뒤, 살짝 열린 커튼 틈 사이로 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옅은 빛에 비친 유영의 얼굴이 어딘가 창백해 보였다. 유영은 창문 쪽을 힐끔 보더니 해연을 채근했다.
“아, 이제 아침이다. 언니, 우리 영화 보기로 했잖아요. 이제 준비하고 나가야 해요.”
“……벌써?”
상영 시간은 일곱 시였다. 지금은 고작 다섯 시가 되었을 뿐이었다. 해연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유영이 있는 쪽을 바라봤지만, 유영은 이미 일어나 그녀의 방을 나간 뒤였다.
“…….”
뭘까, 이 이상한 기분은. 해연은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다가 손에 쥔 핸드폰을 바라봤다. 어제 영화를 보러 나갈 거라는 말을 하려고 이현에게 전화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발신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많이 바쁜가.’
아니면 아직 자는 걸까. 너무 시간이 일러서 그런 걸 거다. 조금 있다가 다시 해 보면 받겠지.
해연이 거실에 나가자 유영은 벌써 씻고 나왔는지 수건을 머리에 돌돌 말고 있었다.
“유영아, 너 잠은 잔 거야?”
“네? 어휴, 당연하죠.”
유영이 드라이기를 들어 올리며 들뜬 얼굴을 했다.
“우리 밖에 나가는 거 오랜만이잖아요. 영화 보는 것도 그렇고. 알람 맞춰 놓고 잤는데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 거 있죠?”
“뭐야, 꼭 놀이동산 처음 가는 어린애처럼. 영화 어디로 안 도망가거든요?”
“그래도 그동안은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어디 나갈 정신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조금 답답했다는 유영의 말에 해연은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해연이 또 사과하려는 걸 알았는지 유영이 질색하는 얼굴로 먼저 선수 쳤다.
“으아악! 언니 사과하기만 해 봐요. 그냥 언니랑 맘 편하게 놀러 나가는 게 좋다는 거지 불만이었다는 뜻이 아니라구요!”
“……알았어. 안 할게. 그런데 가볍게라도 아침은 먹고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노노, 팝콘 먹어야 해요. 나 캐러멜하고 어니언 먹을 건데, 언니는요?”
“나도.”
“오케오케. 언니 빨리 씻어요. 아, 우리 영화 보고 나서 쇼핑해요.”
“어? 쇼핑?”
“왜요? 안 돼요? 모처럼 나가는 건데 영화만 보고 와요?”
“……아니야, 가자. 뭐 사고 싶어? 언니가 사 줄게.”
“나 사고 싶은 거 많은데 그렇게 쉽게 말하면 큰일 날걸요?”
유영의 장난스러운 말에 해연이 소리 내어 웃었지만. 속마음은 오래 밖에 있어도 괜찮을지 걱정됐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언제까지 유영이를 아무 데도 나가지 못하게 집에 가둬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오랜만의 외출에 신나 하는 유영을 보니 차마 영화만 보고 집에 바로 돌아오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괜찮겠지. 지금처럼…….’
이현이 조금 고생하겠지만, 이 정도는 넘어가 주리라.
하지만 씻고 나온 뒤에도 이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준비를 다 하고서도 나갈 생각도 없이 핸드폰만 붙들고 있는 해연을 향해 유영이 채근했다.
“언니 안 가요? 택시 왔대요.”
“어? 그게…….”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루뿐이긴 했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떨어져 있거나 연락이 안 된 건 처음이라 해연은 당황하고 있었다.
“유영아, 우리 영화 다음에 보면 안 돼?”
“네? 왜요?!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게 조금 불안해서…….”
“그럼 나 혼자 갈게요.”
실망을 많이 한 건지 유영이 굳은 얼굴로 혼자 현관으로 가 구두를 신었다. 해연이 서둘러 유영을 따라갔다.
“유영아, 너도 나가지 마.”
“……저도요?”
“응, 너도.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언니 그럼 난 언제까지 회사랑 집에만 있어야 해요?”
“…….”
유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심 쌓인 게 많았던 걸까. 유영이 처음으로 해연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나가는 게 힘들었으면 어제 아예 거절하지. 사람 다 기대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언니 힘들었던 거 저도 알아요. 그래서 제가 언니한테 뭐라고 했던 적 있어요? 한 번도 없어요. 언니가 무슨 일 있었는지 말 안 해도 다 이해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언니는 맨날 강이현하고 만나잖아요. 언니 힘들게 한 그 남자랑 같이 있는 건 되고 나랑 영화 하나 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당연히 해연으로선 할 말이 없었다. 유영의 불만은 당연했다. 아파하는 자신을 위로하고 대신 화내 주었다. 그렇게 신경 써 줬는데, 자신은 다시 이현과 만나고 있었다. 그것도 유영은 또 이해해 줬다. 유영의 입장에선 화날 만했다. 그런데 자신은 왜 나갈 수 없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이 또다시 유영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설명을 한들 유영이 그 이상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영이 이해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였다. 그럼 유영은 다시 이현을 배척할 것이다. ‘괴물’을 받아들이기로 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건 당연한 이야기였고.
“미안해, 내가 미안해. 유영아.”
“됐어요. 언닌 집에 있어요.”
“유영아! 잠깐만! 나도, 갈게. 나도 갈 거야. 그러니까 혼자 가지 마.”
“……안 간다면서요?”
“갈래.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마. 응?”
해연이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어차피 이미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해연이 어설프게 웃으며 유영의 팔짱을 끼자 날이 섰던 유영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언니, 내가 화내서 억지로 간다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요.”
“아니야. 진짜 괜찮아. 나 떼 놓고 가면 안 돼?”
괜찮을 거다. 잠깐 외출한다고 무슨 일이 생길까. 게다가 이현이 유영에게 경호원을 붙여 놓은 상태였다. 그가 없더라도 안전할 거다.
택시를 타고 극장으로 가는 내내 해연이 계속 빌고 빌어서일까. 유영의 화는 많이 누그러진 상태였다. 핸드폰을 보며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내내 외면하더니 못 이기는 척 다시 해연을 바라봤다.
“언니가 팝콘하고 콜라 쏠 거죠?”
화해의 기미가 보이자 해연이 냉큼 반색했다.
“당연하지. 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다 사 줄게.”
“됐어요. 내가 무슨 돼진 줄 아나 봐.”
“아이, 우리 유영이가 왜 돼지야. 이렇게 이쁘고 날씬한데.”
“어후, 립서비스 너무 과하신 거 아니에요?”
“맹세코 진실만 말하고 있어요.”
“이번만 넘어가는 거예요. 다음에는 진짜 얄짤없어요.”
“네네, 정말 자비로우셔요.”
“푸핫!”
해연의 아부가 웃기긴 했는지 유영이 입술을 씰룩이더니 결국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 * *
“언니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먼저 들어가서 앉아 있어요.”
“응? 기다릴게. 다녀와.”
“나 좀 시간 걸릴 거 같단 말이에요. 그냥 들어가 있어요.”
유영이 눈치도 없다면서 눈을 흘기자 해연이 킥킥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연은 팝콘과 콜라를 들고 먼저 상영관에 들어가 예약한 좌석에 앉았다. 극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명한 영화고 주말이라 아침이라도 사람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을 돌아봐도 모두 빈 좌석뿐이었다.
‘편하게 보겠네.’
팝콘과 콜라를 손잡이에 있는 구멍에 끼울 때였다. 조용한 극장 안에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해연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예매할 때 빈자리가 많은 걸 알았을 텐데 하필 왜 여기에.
“어머, 해연 님?”
“……어, 이진아 피디님?”
제 옆에 앉은 사람은 매우 익숙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주 불편한 사람. 해연은 자신을 보고 반가운 얼굴을 하는 이진아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이진아는 아예 몸을 의자에 깊숙이 묻은 채 해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혼자 왔어요?”
“아니요, 유영이하고…….”
“아아.”
혼자 맞네. 이진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을 뻗어 해연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저기, 이런 건 좀 불편해서…….”
“예뻐서 그랬어요.”
정말 너무 예쁘네요. 해연은 마치 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말하는 이진아가 더욱 불편해졌다. 그녀의 말투가 매우 익숙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마치, 이현이 저를 볼 때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이현과 달리 이진아의 행동은 불편했다. 아니, 불쾌했다.
‘유영이가 왜 이렇게 늦지?’
유영이라도 와야 덜 불편할 것 같은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오지 않았다. 해연은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날 겸, 유영을 찾으러 몸을 일으켰다. 그때 이진아가 해연의 손을 잡았다.
“……!”
“영화 안 보세요?”
“유영이가, 안 와서……, 찾으러 가려고요.”
“유영 님이 어린애도 아닌데 곧 오시겠죠.”
“그건 그렇지만, 저기, 손 좀 놔주실래요?”
이진아는 해연에게 너무 과도하게 친근히 굴었다. 해연이 불쾌한 얼굴로 손을 뒤로 빼려고 할 때였다. 유영이가 왔다.
“언니 저 왔어요! 어? 피디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요. 그냥 영화 보러 왔는데 해연 님이 앉아 있더라고요. 해연 님, 이제 유영 님 오셨으니 앉으세요.”
“……네에.”
해연은 저보다 더 이진아를 불쾌해했던 유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친근히 대화를 하는 게 이상했다. 회사에서 화해를 한 걸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제게 말을 했을 텐데 유영은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해연은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