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으음…….”
해연도 보고 싶은 영화긴 했다. 하지만 지금 영화를 보러 가는 건 영 마음에 걸렸다. 밤은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내일 토요일인데 조조로 보면 안 돼? 밤에 외출하는 건 좀 위험하잖아.”
“으으윽, 택시로 왔다 갔다만 하면 되잖아요.”
“…….”
예전이었다면 해연도 솔깃했을 말이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유영은 회사와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생활이 답답할 것이다. 그렇다고 왜 나갈 수 없는지 설명할 수 없는 해연으로서는 이 상황이 조금 난감했다. 게다가 이현도 바쁜 일이 있다고 연락도 안 되는 상태였다. 여러모로 지금 움직일 상황은 아니었다.
“아침 첫 상영하는 걸로 보자, 응?”
“칫.”
유영은 볼을 퉁퉁 부풀리고 삐진 티를 냈지만, 해연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대신,
“그럼 내일 가는 거예요?”
“으응.”
“나 예약할 거예요. 알았죠? 무르기 없기!”
“알았어.”
내일이면 이현도 돌아오겠지. 그도 하루쯤 외출하는 걸로 뭐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해연은 유영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기에 있었네?”
유영이 탄 택시의 뒤를 쫓아온 이진아는 어느 순간부터 따라가지 못했다. 자신을 죽였던 놈의 기운이 결계를 친 것처럼 막을 세워 놨기 때문이었다. 들어가려면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럼 놈이 알아챌 것이다.
아직은 놈을 상대할 만큼의 힘이 있는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리스크를 질 만큼 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유영이 있으니까 한해연을 밖으로 불러내는 건 쉽지.’
오늘은 어디로 숨겨 놨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밖에 없었다. 느긋이 한해연의 집 주변을 돌던 이진아는 담벼락 위에서 노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보고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냐아―
“아, 들켰네?”
평범한 고양이처럼 보여도 이진아는 저와 같은 동족임을 한눈에 꿰뚫어 봤다. 한해연의 집 주변을 둘러싼 기운과 매우 흡사한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보다…….
‘그 애새끼랑 느낌이 똑같은데?’
저를 궁지에 몰아 쥐새끼 다루듯 했던 윤시후라는 애새끼와.
하지만 그 애새끼보다 아주 약했다. 애새끼는 성인도 되지 않은 주제에 강했다. 그 당시에는 상대조차 되지 않았을 정도로. 이진아는 저게 그 윤시후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비슷한 기운에 살해 욕구가 불쑥 치솟았다.
‘어쩔까.’
죽일까, 아니면 그냥 보낼까. 저렇게 인간형으로 변하지도 못하는 작은 짐승 따윈 한 입 거리도 되지 않았기에 이진아는 저를 경계하며 다가오는 고양이를 여유롭게 지켜봤다.
그런데 하는 짓이 웃겼다. 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냄새를 맡더니 갑자기 배를 뒤집으며 바닥에 누웠다. 복종의 표시였다. 이진아는 헛웃음을 흘리며 발끝으로 고양이의 배를 툭툭 쳤다.
“이게 웃기는 짓을 하고 있네.”
심지어 발로 아플 정도로 찼는데도 뒤로 쭉 밀려났던 고양이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와 다리에 꼬리를 감았다.
“하하.”
아, 너무 우스웠다. 인간형으로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짐승조차 ‘순혈’과 한통속일 것이다. 그런데 잡종이라고 비웃었던 제게 아양을 부리고 있었다.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너 안재호라는 늙은이가 어딨는지 알고 있니?”
애피타이저로 그 늙은이부터 처리해야지. 한 번에 죽이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머리에 칩을 박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만들려던 것처럼 똑같이 해 주리라.
냐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고양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울었다. 이진아는 입술을 주욱 찢으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안내해 줄래?”
냐아―
가식적인 다정한 목소리도 좋은 건지 고양이는 벌떡 몸을 일으켜 따라오라는 듯이 그녀를 힐끔힐끔 보며 본가로 향했다. 이진아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풀리는 일에 피식 웃으며 고양이를 따라갔다.
* * *
“안녕?”
서재로 들어오던 안재호는 이미 제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넌 누구지?”
“아, 이 얼굴로는 처음 보지? 이렇게 하면 알려나?”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제가 머리에 칩을 박아 터트렸던 잡종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죽었어야 할 잡종이 살아 있는 걸로도 모자라 본가에, 그것도 본가 중심에 있는 제 서재에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있었다. 안재호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었다.
“분명 죽었을 텐데…….”
“맞아. 죽었었지. 네 덕분에 말이야. 그래서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왔지.”
그 순간 잡종의 얼굴이 안재호에게 아주 익숙한 얼굴로 바뀌었다. 바로 윤일영의 얼굴이었다.
“……!”
“익숙한 얼굴이지? 젊고 꽤 강해서 그런지 먹을 만했어.”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이유영의 뒤를 따라가던 이진아는 자신처럼 이유영의 뒤를 쫓는 순혈 하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놈이 눈치채기도 전에 단숨에 집어삼켰다.
“윤일우를, 먹었다고……?”
“이름이 윤일우구나. 역시 생긴 것처럼 답답한 이름이네.”
다시 여자의 얼굴로 돌아간 잡종이 느긋이 웃으며 안재호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고는 장난치듯 의자를 한 바퀴 돌리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잡종의 눈에 섬뜩한 광기가 서렸다. 안재호는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도움을 요청할 일족을 찾았다. 만약 윤일우를 먹은 게 사실이라면 결코 그가 상대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머리를 쓰는 거라면 몰라도 몸싸움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기에.
“설마 잡종 따위가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순혈이라고 고고한 척 굴더니 겁쟁이였네?”
잡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재호의 몸이 서재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안재호는 황급히 뒤를 바라봤지만, 서재의 문마저 닫혀 퇴로가 막혔다.
이진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재호를 향해 걸어갔다. 높은 하이힐이 바닥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무슨 짓을 하긴. 감사의 인사를 하러 왔다니까. 늙어서 그런가. 방금 전에 들었던 것도 까먹었어? 오!”
이진아가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순간, 안재호가 그 틈을 빌어 공격해 왔다.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안재호와 반대로 이진아는 살짝 고개를 뒤로 뺀다든가 발만 조금 움직이며 공격을 피했다. 꼭 어린아이의 재롱을 즐기는 것처럼 여유로워서 안재호의 얼굴에 굴욕감이 서렸다.
“뭐야? 이게 다야? 조금 더 힘을 내라고.”
“이……!”
야유 섞인 응원에 안재호가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손을 휘두를 때마다 파공성이 일고 잘 정돈되었던 서재가 엉망이 되고 있었지만, 이진아는 연신 하품을 해 가며 지루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 더는 못 어울려 주겠다. 너무 지루해.”
“……!”
그 순간, 날카롭게 튀어나온 발톱이 이진아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안재호는 강제로 멈춰진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진아가 안재호의 정강이를 후려치자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안재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뼈가 바스라지는 통증에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약해 빠졌네. 고작 다리 한 번 맞았다고 꼴사납게 주저앉고 그래, 모양 빠지게. 설마 순혈이 다 너처럼 약한 건 아니지?”
이진아는 무릎을 굽혀 안재호와 시선을 맞췄다.
“재밌었지? 잡종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 죽이고 그런 거 말이야.”
“나, 나는…….”
“걱정하지 마. 안 죽여. 내가 왜 죽여. 이렇게 좋은 장난감을.”
“……!”
안재호의 얼굴이 굴욕적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섣불리 대응하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력을 다했던 공격이 단 한 번도 명중하지 못했던 것도 그랬지만, 잡종이 풍기는 분위기가 이전과 너무 달랐다. 이건, 흡사……. 그래, 꼭 주인 앞에 있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거대한 포식자 앞에 하찮은 버러지가 된 굴욕감.
“설마, 주인이 살려 준 건가?”
“주인?”
“느낌이 너무 비슷, 윽!”
슬슬 지루해진 이진아가 안재호의 머리를 한 손으로 움켜잡았다. 두개골을 부술 것처럼 강한 아귀힘에 안재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미안, 난 너와 쓸데없는 얘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거든. 놀아 주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야.”
나름 바쁜 몸이어서 말이야. 이진아는 안재호와 눈을 길게 주시했다. 이진아는 다시 살아난 이후 노랗던 눈동자가 검게 변했다. 머리카락의 색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이진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시 살아난 걸로 모자라 순혈도 굴종시킬 만큼의 힘을 가졌는데 이딴 변화가 신경 쓰일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힘의 증거인 것 같아 달갑기까지 했다.
빛이 죽은 검은 눈동자가 강제로 눈을 맞추자 안재호의 눈에도 빛이 죽어 가기 시작했다. 이지가 사라진 것처럼 멍청한 얼굴이 되자 이진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안재호의 뺨을 툭툭 쳤다. 이유영을 상대로 시험해 본 것인데 순혈에게도 잘 먹혔다.
“앞으로 내 말대로 해.”
“……네.”
“착하게 굴어야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죽여 주지. 응?”
“……네.”
“좋아. 아주 좋아.”
아하하하. 기분이 끝내줬다. 순혈이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제 말에 굴종한다. 정말 세상이 제 발밑에 있는 느낌이었다. 매번 도망만 다니던 굴욕적인 삶이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난 뒤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마약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황홀해.”
그 새끼는 알고 있을까? 제 수족들이 다 내게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진아는 자신을 죽였던 놈을 떠올리며 비릿하게 웃었다. 순혈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던 놈의 모든 것을 빼앗을 것이다. 모두 다.
‘그리고 나처럼 비참하게 죽어 봐.’
이제 다음 타깃은 한해연이었다. 이진아는 내일 아침 일곱 시에 극장에 간다는 이유영의 문자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놈이 따라온다고 해도 일단 그 집에서 나오면 기회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유영이 있으니까.
“자, 첫 명령이야. 이제 여기에 있는 순혈들을 불러 모아.”
할 수 있겠지? 이진아의 요구에 안재호는 눈을 깜박이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인님.”
안재호가 시키지도 않은 호칭까지 덧붙이자 이진아는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래, 이제 이 모든 건 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동안 당했던 굴욕을 모두 돌려주리라.
순혈들의 본거지에 들어와서일까. 안 그래도 넘치던 힘이 더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날뛰고 있는 느낌은 극진한 쾌락을 닮아 있었다. 이진아는 눈을 감은 채 두 팔을 넓게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