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아……. 다행이네요.”
말은 다행이라고 했지만, 유영의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이제 와서 해연 언니와 만났을 때 일로 뭐라고 하진 않겠지?
사무실에 도착하니 이진아 피디는 이미 출근해 있었다. 아팠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무척 건강해 보였다. 처음엔 불편해서 이진아를 피해 다니던 유영도 퇴근 시간이 다 돼서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이진아 피디가 예전과 다름없이. 아니, 예전보다 활발한 모습으로 그녀를 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넘어가 주는 건가?’
평소처럼 무난히 일하고, 회의에 들어갔다가, 또 일했다. 평소와 다른 건, 항상 회의를 주도하던 이진아 피디가 한 발 뒤로 물러서 팀원들의 의견을 듣기만 했다는 것. 그런 별거 아닌 일만 조금 다를 뿐이었다.
슬금슬금 가방을 정리하던 유영은 기획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진아 피디를 힐끔거리다 눈이 딱 마주쳤다. 이진아 피디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윽, 왜 오는 거야?’
“안녕하세요, 유영 님. 우리 오랜만이죠?”
“아, 진짜요. 하하……. 그런데 많이 아프셨어요?”
“어머, 아니에요. 그냥 몸살 왔나 봐요. 지금은 아주 좋아요. 아주.”
“다행이에요. 그동안 너무 안 쉬셔서 피로가 한 번에 왔나 봐요…….”
유영은 전에 있었던 일을 먼저 언급해야 하나 하고, 이진아의 눈치를 봤다. 저쪽에서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굳이 말을 꺼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도 그렇고, 자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직급이 만들어 낸 부당함이라고, 유영은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요. 아, 잠깐 저 좀 볼 수 있을까요? 따로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이요?”
“그건 나가서 말해요.”
이진아 피디가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유영은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왜 이렇게 불길하지? 상대는 꽁한 기색이라곤 전혀 내보이지 않고 있는데도 뭔가 찝찝했다.
‘기분 나빠.’
한번 안 좋게 생각하니 계속 사고가 그쪽으로 돌아가는 걸까. 그래도 피디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유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진아 피디가 그녀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혹시 제가 불편한 건 아니죠?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제가 너무 건방지게 말했던 거 같아서, 계속 신경 쓰였거든요.”
“뭘 그런 걸 신경 써요. 별것도 아닌데.”
아니, 이게 진짜인가? 유영은 이진아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게 도리어 이상했다. 왜냐하면, 해연 언니와의 미팅이 이상하게 끝나고, 헤어지기 직전 이진아의 표정이 정말 화가 난 듯 굳었던 걸 똑똑히 본 탓이었다.
‘쉽게 풀어질 것 같지 않았는데…….’
하지만 상사가 그 일을 덮겠다는데 굳이 제가 끄집어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일주일도 훌쩍 지난 일을 새삼스레 화내는 것도 이상하긴 할 거다.
이로써 마음에 걸리던 모든 게 사라졌다. 일이 풀어지기 시작하니 좋은 일만 생기려나. 유영은 찝찝했던 마음을 털어 내고 나가자고 눈짓하며 먼저 앞장서는 이진아 피디의 뒤를 따라갔다.
회의실에 들어온 이진아는 문이 닫히자 몸을 틀어 유영을 바라봤다.
“그런데 유영 님, 요즘도 해연 님하고 같이 지내세요?”
“네? 네에.”
“그럴 줄 알았어요. 유영 님 몸에서 해연 님 냄새가 나고 있거든요.”
“……냄새요?”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지? 유영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제 몸에 나는 냄새를 맡아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해연 언니는 향수도 뿌리지 않았고,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영의 표정이 이상했는지 이진아 피디는 살풋 눈을 휘며 웃었다.
“나쁜 냄새가 아니라, 아주아주 좋은 냄새예요. 정말로.”
“네에…….”
유영은 이 화제에 대해 더 길게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빨리 얘기를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다.
‘겉옷을 입고 올걸.’
그렇게 추운 날이 아니었음에도 회의실 안이 묘하게 춥게 느껴졌다. 유영은 살짝 소름이 돋은 팔을 손으로 훑으며 이진아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하필 거울이 있었다. 유영은 이진아가 거울을 통해 저를 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걸 발견하고 흠칫 몸을 굳혔다.
* * *
유영은 회사를 나오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정말 별거 아닌 시답지도 않은 농담만 하다가 나왔다. 이진아 피디는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는 유영의 질문에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런 식으로 농담하며 어색해진 사이를 회복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경계했던 게 민망해질 만큼 산뜻한 얼굴로 미안했다고 사과하며 유영을 내보냈다.
“아, 진짜 내 육감은 망했나 봐.”
유영은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마다 예민한 감에 의지했었다. 매번 맞는 건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는 틀릴지 몰라도 아주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대체로 정확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감도 이제 끝난 모양이었다. 근래엔 아무것도 맞는 게 없었다.
‘요즘 몸과 마음이 편해서 그런가.’
그도 그럴 것이, 날카롭게 안테나를 세우고 다닐 만한 일이 없어졌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자신만의 집도 생겼고, 그 집에서 해연 언니와 함께 지내며 가족의 안정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생존을 위해 움직였던 감이 녹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유영은 바로 택시를 잡았다. 평소엔 돈이 아까워서 타지 않던 택시를 요즘 아주 잘 타고 다녔다. 돈을 열심히 모으고 아껴야 했던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택시에 타기 직전, 유영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살짝 주변을 돌아봤다. 퇴근 시간 때의 거리답게 직장인들로 북적였지만, 아무도 저를 주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안 타요?”
“아, 타요. 죄송합니다!”
택시 기사의 재촉에 유영이 황급히 택시에 타 문을 닫았다. 유영에게서 행선지를 들은 택시가 출발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뒤따랐다.
* * *
집에 도착하자마자 유영은 마당을 뛰어가 재빨리 현관문을 열었다.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온기와 함께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일주일 내내 이랬다. 항상 집은 자신의 안식처면서도 차가운 곳이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요즘엔 집에 들어가면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곧 서른이 되어 갈 즘에 생긴 가족의 존재가 주는 따뜻한 온기에 유영은 코가 시큰거렸다. 평범한 사람들은 다들 이런 기분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고 살겠지. 가족이 없는 사람보다 가족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상이 유영에게는 너무나도 특별했다. 유영은 신발을 벗자마자 부엌으로 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던 해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엄마아아!”
“응? 언제 왔어? 그리고 왜 내가 엄마야?”
“내 엄마 해 줘요. 응?”
“나 지금 네 살 차이 나는 딸이 생긴 거야?”
“네, 마미!”
“참나.”
해연은 유영을 대롱대롱 매단 채 수저로 찌개를 떠 유영에게 맛을 보게 했다.
“어때? 괜찮아?”
“완전 맛있어요!”
“좋아. 그럼 잠깐 기다려 봐. 이거 식탁에 올리고. 위험하니까 이유영 어린이는 착하게 식탁에 앉으세요.”
“네, 엄마!”
식탁엔 이미 접시에 정갈하게 담은 반찬이 있었다. 유영의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을 준비한 해연은 뚝배기째로 찌개를 식탁 중앙에 놓은 뒤 밥을 푸고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이유영 어린이가 왜 이렇게 신났지?”
“그냥 집에 오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
“네, 여기에 날 기다리는 언니도 있구, 불도 켜져 있구. 그냥 다 좋아요. 요즘 회사 출근만 하면 집에 가고 싶어 죽겠어요.”
“나도 너 기다리는 거 좋아. 너 기다리면서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좋고.”
해연이 유영을 따라 씨익 웃었다.
“나 계속 회사 가지 말까?”
“으엉……. 안 돼요. 언니 능력을 썩힐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영은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젓가락을 들고 본격적으로 식탁을 둘러본 유영이 와,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늘 평소보다 식단이 화려하네요.”
“으응?”
“뭐 죄라도 지었나아?”
“그런 거 아니야. 만들다 보니까 이것저것 늘었어.”
사실은 기분이 심란해서 요리로 도피한 것이었다. 잠깐 낮잠을 잔다는 게 또 이상한 꿈을 꿨다. 그런데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을수록 꿈은 선명해지기는커녕 더 뿌옇게 흐려졌다. 꼭 기억해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으니 더 심란해졌다. 그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요리를 하다 보니 둘이 먹기엔 너무 많은 가짓수의 음식을 하게 됐다.
해연이 멍하니 허공을 보자 유영의 눈이 짐짓 가늘어졌다.
“에이, 아닌데. 오늘 강이현하고 무슨 일 있던 거 아니구요?”
“아니라니까. ……아주, 잠깐 더 얘기하기만 했어.”
해연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진짜! 진짜 그게 다야!”
“흐으으으응. 뭐, 믿어 줄게요.”
“전혀 믿는 얼굴이 아니잖아.”
“어허 어허! 어디서 말대답을 하시는 겁니까?! 나 몰래 그렇게 만났던 거 그냥 넘어가 줬더니!”
유영이 호텔에서 이현의 방에서 나오던 해연과 딱 마주쳤던 일을 다시 꺼내며 숟가락으로 식탁을 탕탕 쳤다. 해연이 찔끔하고 잘못했다고 납죽 엎드렸지만, 식사가 끝날 때까지 유영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밥을 다 먹고 천혜향을 꺼내 오는데 유영이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황급히 핸드폰으로 뭘 검색하더니 해연을 향해 소리쳤다.
“언니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영화? 왜? 뭐 재밌는 거 해?”
“김재우 감독 영화요!”
“아, 국제 영화상 받은 그거?”
“네, 그거 우리만 안 봤어요. 언니 나 그거 스포 피하려고 엄청 고생하고 있단 말이에요. 한 시간 뒤에도 상영하는 극장 있는데 보러 가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