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이현이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고작 그게 뭐가 대단한 소원이라고 망설이고 망설이며 말했었다. 해연은 의자 하나를 끌어 창문 앞에 두고 앉았다. 비록 함께 있진 않지만, 그도 지금 이 비를 보고 있을 테니까.
“다음엔 꼭 같이 봐요.”
지금 마음으로는 그런 소원은 백번이고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창문을 부술 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았지만.
또다시 하늘을 하얗게 물들인 번개가 내리친 뒤, 번개를 뒤따른 천둥이 집을 흔들 듯이 거대하게 울렸다. 해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얼마나 크게 울리는지 귀가 멀 것 같았다.
“이건, 같이 보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인 것 같네.”
그렇게 애타던 소원을 이렇게 험악한 천둥 번개로 처음 들어주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을 테니까.
묘한 기분이었다. 아까 이현에게 꿈 얘기를 한 게 조금 후회가 됐다. 별것도 아닌 얘긴데, 그게 뭐라고 후회가 된담.
비가 와서 그런가. 갑자기 좀 추워진 기분이었다. 창문을 모두 닫고 있는데도 한기를 느낀 해연은 의자에서 일어나 커튼을 친 뒤, 식탁 의자에 걸쳐 놓았던 가벼운 카디건을 걸쳤다.
시계를 보니 이제 고작 열 시가 되었다. 유영이가 출근하고 이현과 아침을 먹고 잠깐 노닥거린 시간이 고작 두 시간뿐이었다. 아니, 두 시간이나 인가. 이현과 함께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기도 하고, 빠르게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비가 언제까지 오려나. 유영의 퇴근 전에는 멈췄으면 좋겠는데. 해연은 유영에게 비를 맞지 않았냐고 전화하려다 말았다. 지금 시간이면 진작에 회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노닥거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해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 안에서만 보냈다. 나가도 마당 정도였고, 조금 더 멀리 나가면 항상 이현과 함께였다.
심심할 때마다 보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요리를 어설프게 따라 하며 이현과 유영에게 해 주기도 했다.
아주 좁은 영역 안에서의 생활이었지만, 그래서 안정감을 느꼈다. 가끔 바쁜 생활에 익숙했던 예전의 습관이 떠오를 때면, 이제 슬슬 회사에 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강박감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아직은 더 쉬고 싶었기 때문에.
‘바느질이라도 배워 볼까.’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간 생각에 해연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집에서의 취미만 늘려 갔다간 영영 사회생활과 멀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소소하고 즐거운 일상이 얼마나 소중했던 것이었는지 몰랐다. 잃고 나서야 알았다. 평범하고 별일 없이 평온한 삶이 가장 갖기 어려운 것이라는걸.
‘물론 이 집도, 이현도 평범하다고 말하긴 좀 아귀가 맞지 않지만.’
해연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몸을 옆으로 길게 누웠다. 빗소리도 그렇고 슬슬 소화가 되는 배도 그렇고 낮잠을 자기 딱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 * *
해연은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공간에 서 있었다. 꿈이다. 자각몽. 지난번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노파와 검은 개가 나오는 꿈을 꿨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이번엔 또 무슨 꿈을 꾸게 될까. 해연이 침착하게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해. 그 괴물은 곧 너의 모든 것을 망가트릴 거야.’
그와 괴물. 해연은 단숨에 이현을 떠올렸다. 분명 그는 괴물이 맞았지만, 제겐 단순히 괴물이라고만 정의 내릴 수 없는 남자였다.
해연은 이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게 안 좋은 짓을 한 남자였지만, 그 이상으로 끌리는 사람이었다. 저를 보는 시선이 너무도 간절해서. 결국 그를 밀어내려 했던 마지막 벽마저 무너트렸다.
그러니까, 난 당신의 경고를 들어줄 수가 없어.
기회를 주겠다고 했으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것이다. 모두가 바보 같다고 비난한다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그를 향해 마음이 열려 버렸기 때문에.
해연의 대답을 들은 여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바람처럼 흩날리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나처럼…….’
그를 사랑하게 되어 끝내 모든 걸 잃어버리게 될 테니까. 그 말과 함께 섬뜩하도록 새파란 새벽이 찾아왔다. 깜깜한 어둠이 순간 뒤로 물러서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여자는 해연이 예전에 꾸었던 꿈에서 봤던 불에 타 죽은 노파였다.
그녀를 쫓아다니던 검은 짐승을 죽을 때까지 증오했었던…….
아니, 노파가 아니었다. 해연이 알았던 얼굴이 그녀를 비추는 빛을 따라 계속 다른 얼굴로 바뀌어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열한 번째. 여자의 얼굴은 해연의 얼굴과 똑같이 변했다.
마치 거울을 앞에 둔 것처럼.
해연이 뒤로 주춤 물러섰지만, 다가오는 여자를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해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제 몸에 무언가가 덧씌워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듦과 동시에 바닥이 흔들렸다.
해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다른 공간에 있었다. 휘황한 장식이 가득한 호화로운 방은 꼭 사극에서나 봤을 법한 옛날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그 넓은 방에는 여자와 남자 둘만이 존재했다. 여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외면하고 있는 여자.
놀랍게도 남자의 얼굴은 이현과 똑같았다. 그리고 여자의 얼굴도 익숙했다. 바로 조금 전 제 앞에 나타났었던 여자의 얼굴.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해연의 의식이 여자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신은 내가 싫겠지만…….’
여자는 남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는 남자가 소름 끼쳤다. 그녀는 저 남자가 자신의 정혼자를 잡아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정혼자의 얼굴을 하고 제게 나타났다.
저 남자가 나타난 뒤,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아무도 제 곁에 남지 않고 모두 죽어 버렸다. 여자는 그 모든 원흉이 저 남자라는 걸 알았다. 그런 주제에 오히려 제가 더 불행하다는 듯이 굴어서, 여자는 그를 미워하기로 했다.
가족마저 죽인 남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심지어 인간도 아닐 게 분명한 괴물을. 남자는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추워 보였다. 불행을 온몸에 휘감은 것처럼 척박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도 애써 웃는 모습이 어쩌면 가련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여자는 되도록 남자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보면 마음이 흔들려 버리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을 모두 잃은 여자 역시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건강했던 몸은 일어서 걷는 날이 드물 정도로 병들었다. 폐병처럼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는 날도 잦아졌다. 눈이 어두워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날이 며칠 이어지기도 했다.
눈이 안 보이는 건 다행이었다. 애써 아픈 몸을 돌리지 않아도 남자를 안 볼 수 있기 때문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럼 내 모든 것을 망가트린 저 괴물에게 흔들리는 이 염치도 없는 마음을 느끼지 않아도 될 테니까. 여자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눈에 가쁜 숨을 흘렸다. 왠지 오늘일 것 같았다. 그토록 바랐던 끝이.
그래서였다. 여자는 그토록 외면하던 남자에게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우리, 다신 만나지 말아요.’
‘…….’
‘절대로. 절대로 보지 말아요.’
‘…….’
등 뒤에 있는 남자의 대답은 없었지만, 여자는 그가 자신의 말을 모두 들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이 바로 앞에 있어서일까. 여자는 남자와 자신의 악연이 이번만이 아님을 알게 됐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제 앞에 나타나는 남자. 그리고 남자가 여자의 앞에 나타나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끔찍한 불행들.
남자는 항상 불행을 몰고 왔다. 그게 두려워 여자는 항상 그를 밀어내고, 도망치고, 증오했다. 몇 번이나 반복해 가며.
백탁이 낀 눈에서 진물 같은 진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악연은 이걸로 끝냈으면 좋겠다. 당신도 괴롭고, 나도 괴로운 악연은…….
어쩌면 짧고, 어쩌면 긴 침묵이 지난 뒤, 여자의 숨이 멎었다. 여자의 마지막 기억은, 아니 해연의 의식이 사라지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은 자신의 몸을 와락 끌어안는 남자의 떨리는 손과 차가운 체온이었다.
* * *
‘아무리 생각해도 해연 언니가 위험하다는 말은 거짓말 같은데…….’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완전 평화로움 그 자체인데. 유영은 아무래도 자신의 육감에 오류가 생긴 것 같다고 혀를 내찼다. 그럼에도 유영은 딱히 화가 나지 않았다. 그건 강이현이 마련한 집에 들어온 이후 해연 언니가 굉장히 안정감을 찾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이현도 나름대로 조심히 행동하는 것 같고.
자신이 회사 간 틈을 타서 해연 언니에게 마음대로 접근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둘이 만나긴 하는 것 같은데, 막 걱정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해야 아침을 같이 먹거나 산책을 잠깐 한다고 했으니까. 해연 언니는 거짓말을 하면 티가 팍팍 나는 타입이라 강이현 그놈을 못 믿어도 해연 언니는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유영은 강이현이 준 집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사실이 강이현의 거짓말에 화가 안 나는 이유의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별로 좋은 일로 얻은 행운이 아닌데 눈치도 없이 신난 물욕이 자꾸 유영의 속을 어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히죽 웃었다가 화들짝 정신 차리고 다시 입술을 내리려고 했지만,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앙. 난 정말 속물인가 봐.’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강이현에게 받은 집은 다 그만한 일이 있어서 받은 정당한 대가였다. 게다가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해연 언니도 이 상황에 만족해 보이니까 두루두루 좋은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산뜻해졌다. 유영이 발걸음도 가볍게 회사 로비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유영 님, 오늘 뭐 좋은 일 있어요? 웃음이 끊이지 않네?”
“어, 기욱 님. 안녕하세요!”
유영이 출근하다 마주친 강기욱 기획팀장을 향해 꾸뻑 고개를 숙였다.
“이것 봐요. 뭐 로또라도 당첨됐어요? 이러다 오늘 퇴사서 쓰는 거 아닌가 몰라.”
“요즘 로또는 당첨돼도 일해야 하거든요? 그럴 일 없사옵니다.”
사실 로또보다 더 대박인 일이 생겼지만, 그래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가면 안 되는 거 알죠? 꼭 명심해요.”
“당연하죠! 아, 그런데요. 이진아 피디님하고는 연락되셨어요?”
무슨 큰일 있는 건 아니냐는 유영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강기욱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침에 전화했는데, 조금 아프셨다고 오늘은 출근하신다고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