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난 이제 솔직하게,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거예요. 당신이 미워지면 밉다고 할 거고, 또 함께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할 거예요. 내가 제멋대로예요?”
“아니요. 전혀 안 그래요.”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나올 줄 알고?”
“당신은 그래도 돼요. 아니, 그래야 해요. 그리고 나도 좀 더 조심할게요.”
“마음에 드는 대답이네요. 잘했어요.”
“네…….”
몇 번이고 토닥이듯 쓰다듬는 손길과 함께 내려온 해연의 칭찬에 이현이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해연의 허리를 안으려다 아, 하는 신음과 함께 그녀의 허리 부근에 손을 댄 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안아도 되냐고 묻자 해연은 그 정도는 된다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해연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하지만 왼쪽 팔은 실수로라도 해연과 닿지 않도록 뒤로 뺀 채였다.
* * *
해연은 아예 소파로 자리를 옮겨 그를 제 무릎에 누였다. 이현은 두 눈을 감고 아주 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차마 손을 뗄 수 없었다.
째깍거리는 시계 침 소리만이 둘 사이에 평온하게 내려앉았다. 해연은 계속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불현듯 이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노파와 검은 개. 그 둘도 이런 비슷한 행동을 했었다. 검은 개는 예전에 봤던 이현의 짐승 형태와 몹시 흡사했다. 그래서 그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내 별 시답지 않은 꿈이라고 잊고 있었던.
“얼마 전에 꿈을, 이상한 꿈을 꿨었어요.”
“꿈?”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느리게 대답했다. 마치 잠에 빠지기 직전처럼 온몸의 긴장을 다 푼 채로.
“네. 아주 옛날 같았는데, 세월에 지친 얼굴의 노파와 커다란 덩치의 검은 개가 함께 지내는 그런 꿈이었어요.”
“……재밌는, 꿈이네요.”
그녀의 말에 대한 그의 반응은 살짝 눈썹을 찡긋거린 게 다였다. 그래서 해연은 그 꿈을 말하는 것에 부담이 더 적어졌다. 정말 개꿈이었나 보다.
“검은 개는 노파를 무척 잘 따랐어요. 둘은 가족처럼 보였고, 당신처럼 쓰다듬어 주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요?”
“네, 틈만 나면 엉겨 붙고 덩치에 안 맞게 애교를 부렸어요.”
꼭 지금의 당신처럼. 해연은 옅게 웃었다.
“아주아주 옛날처럼 보였어요. 마을의 집들도 움막 같았고, 현대 문명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런 꿈을 꿨는지 모르겠어요.”
해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꿈에 대해 더 말을 이었다. 개와 노파가 다붓한 시간을 보냈던 것에 대해. 함께 산을 타기도 했고, 장난을 치다 계곡에 빠져 홀딱 젖었던 것도, 지금처럼 위성이 아닌 밤하늘을 가득 채운 달과 별을 보며 잠들기도 했던 것도 전부 말했다.
해연이 말을 할 때마다 이현도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별것도 아닌 꿈 얘기가 재밌게 들리는 걸까.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는 썩 즐거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 노파가 사실은 그 검은 개를 증오하고 있었다는 말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선뜻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해연이 말을 멈추자 이현이 그녀를 재촉했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계속해요.”
“그냥, 끝이 별로 좋지 않았어서…….”
“어차피 꿈인데 말하면 어때요.”
그의 목소리가 조금 경직됐지만, 해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꿈인데 뭐 어떨까.
“그 검은 개는 그 사람을 무척 따랐는데, 그 사람은 개를 무척 증오했어요. 불에 타 죽을 때까지…….”
“……증오, 했다고요? 가족처럼 보였다면서요?”
“겉보기로만요. 그 노인은 사실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이 모두 그 검은 개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악신이라고.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주는 신이라고요. 그래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개의 행동에 다 맞춰 줬던 것 같아요.”
“그랬, 군요…….”
가만히 듣고 있던 이현은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그녀의 무릎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평소보다 너무 오래 있었어요.”
“벌써요?”
이현이 현관을 향해 몸을 돌리자 해연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평소보다 훨씬 오래 있었는걸요. 이유영 씨가 알면 분명히 화낼걸요?”
“언제부터 유영이 신경 썼어요?”
“아주 많이 신경 썼었는데 몰랐어요? 이유영 씨 꽤 무서운 보호자예요.”
이현의 장난스러운 말에 해연이 피식 웃으며 나가는 그를 배웅했다.
* * *
해연의 집을 나온 순간 간신히 짓고 있던 이현의 웃음이 무너졌다. 그 순간 환하던 낮이 깜깜해지며 거대한 천둥과 함께 새파란 벼락이 내리꽂았다. 그는 그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걷기만 했다.
정신이 멍했다. 배 속에서 열화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가 망망대해에 빠진 것처럼 허망해졌다.
여자는 정말 대단했다. 자신을 천국으로 올렸다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처박았다.
우리의 과거를 꿈꿨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현은 마음이 들떴다. 비록 해연은 꿈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드디어 우리가 같은 기억을 공유하게 됐다는 기쁨을 섣불리 티 내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억눌렀다.
그는 그 아이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기에, 결말이 별로 좋지 않았다는 해연의 말에도 기대했다. 마지막에 자신을 보고 싶어 했는지. 혹은, 자리를 비운 자신을 원망했는지 알고 싶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지나 버렸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자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 아이가. 제게 이름을 주고, 세상에 지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다정했던 그 아이가.
몰랐다. 정말로.
이현은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이가 줬었던 그 작은 온기를 다시 느끼고 싶어서 영겁 같은 시간을 버티고 버티며 살아왔다. 사실은 자신을 단 한순간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르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다. 아이는 분명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름도 주었고, 매일 한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어여쁘다고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들이 거짓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게 그냥 나의 착각일 뿐이라면?’
너무 오래 살아서. 정말 자신이 미쳐 버려서 멋대로 기억을 왜곡시킨 거였다면 어쩌지?
자신의 기억이 정상이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다.
“…….”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 긴 시간을 버텨 왔는지 알 수 없어졌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 여자가 몇 번의 생이 지나도록 그를 싫어하고 증오하더라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받았던 애정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긴 이현이 도착한 곳은 해연이 버리고 간 집이었다. 이젠 그녀의 냄새가 거의 사라져 버려서, 자신의 냄새만 남은 그 빌라의 작은 집.
해연에게서 멀어져 도피한 곳도 결국 해연의 공간이었다. 이현은 해연의 거실에 우두커니 선 채 주변을 둘러봤다.
해연이 버리고 간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작은 집은 금방이라도 그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해연은 지금 그가 마련한 가장 안전한 장소에 있다. 이곳에 없다. 그럼에도 이현은 흡사 그녀가 앞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잘못 꾼 거예요. 꿈이니까. 그렇죠?”
분명 그런 것이리라. 나를 증오했을 리가 없다. 절대로.
“그 여자는, 그 아이와 나는 가족이었어요. 내 이름도 지어 주고 매일 날 쓰다듬어 줬어요. 그러니까, 날 증오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말이 이어질수록 바람처럼 옅었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됐다.
“그렇죠? 그 아이가, 당신이니까. 당신은 알잖아요.”
이곳에 없는 상대를 향해 이현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해연에게서 듣게 된 오래된 진실은 그를 절망에 빠트렸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 아이가 그를 증오했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해연이 말했던 내용은 전부 이현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소중하고 소중하게 움켜잡아 절대 잊지 않으려고 수도 없이 되새기며 살았던 그 기억 그대로.
아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그가 이곳에 뿌리를 내려 살아왔던 시간에 비하면 먼지와 같았다. 그동안 그는 다시 태어나는 아이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받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미워하고 싫어했다.
이현은 지금까지 이상하다 여겼던 것들이 이 사실로 인해 모든 아귀가 맞아 들어감을 느꼈다. 왜 다시 태어난 여자가 자신을 피하고 싫어했었는지를.
사실은 그 아이가 날 싫어했기 때문에. 아무리 다시 태어나도 자신을 향한 증오가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하지만 해연은 몇 번을 반복한 생애 처음으로 그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다. 그러니 해연의 가장 처음이었던 그 아이가 자신을 증오했다 하더라도, 설령, 해연이 또다시 자신을 거부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다.
자신은 결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을 테니까. 늘 그렇듯이.
분명 그럴 텐데 오늘은 유독 버티는 게 힘들었다. 지금껏 쌓인 피로가 한 번에 몰아치는 것처럼 몸이 무겁고 기력이 없었다.
우두커니 선 이현의 왼팔에서 검은색 셔츠 소매 아래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먼지 하나 없던 깨끗한 바닥을 더럽혔다. 해연에게 보였던 매끈했던 피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화상을 입었던 상처가 점점 썩어 들어가며 노란 진액과 함께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서, 오래된 육체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걸 그는 깨닫지 못했다.
* * *
이현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세찬 비가 내렸다. 해연은 우산을 챙겨 나갔지만, 이현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가 이런 비에 영향을 받을 리가 없지.
해연은 다시 들어와 거실 창을 통해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일기 예보로는 오늘 하루 종일 맑다고 했다. 그런데 웬 비람. 기상청 예보가 틀린 건 별로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아쉬웠다. 함께 비를 봐 달라던 이현의 소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