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또 안 먹네. 배 안 고파?”
유영이 출근한 뒤 해연은 얼마 전 마당에서 발견한 길고양이의 사료를 가지고 나왔지만, 고양이는 사료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도리어 사료가 꼴 보기도 싫다는 듯 뒷발로 미친 듯이 땅을 파 사료에 흙을 잔뜩 부었다.
벌써 다섯 번째 사료를 바꿨음에도 반응이 한결같자 해연은 고양이의 앞발을 잡고 흔들었다.
“너 이 녀석. 그럼 대체 뭘 먹을 거야? 응? 왜 이렇게 입맛이 까다롭니? 빨리 살이 찌고 체구가 커져야 병원에 데려가 중성화를 해 주지.”
자신이 길냥이 취급하고 있는 삵이 바로 윤시후라는 사실도, 중성화라는 말에 숨어서 둘을 지켜보던 안주희가 깜짝 놀라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리 없는 해연은 기호성이 좋다는 사료를 다 갖다 바쳐도 먹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고양이를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고양이는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장난치는 줄 알고 해연의 손을 잡고 뒹굴거렸다.
참 사교성이 좋은 녀석이었다. 보통 길거리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경계심이 강하다고 하던데 매일 자신의 집 마당에서 떠날 줄 모르는 이 고양이는 집주인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걸 아는 건지 처음부터 몸을 비비며 친한 척을 해 왔다. 발톱 한 번 세운 적도 없었다.
워낙 생김새가 예쁘기도 하고, 애교까지 있으니 원래 동물을 좋아하던 해연도 점점 고양이에게 정을 들였다. 사실 집 안에서 키우고 싶었지만, 유영이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지 심하게 재채기를 하고 피부에 트러블이 나서 그날로 포기했다.
그러다 문득 해연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고작 고양이 밥을 걱정하고 있는 한가로움이라니.
이현이 준비한 집으로 이사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사했던 첫날 밤 과식을 해서 탈이 나긴 했지만, 그날뿐이었다. 임신이 아닐까 염려했던 것도 과민한 생각이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입덧이 딱 하루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리가 없으니까.
평온한 하루하루가 흐르자 해연은 점점 마음을 놓았다. 이현으로 인해 힘들었고, 또 이현으로 인해 다시 일상을 되찾았다. 모순적이었다. 아주 많이. 그래서 순간순간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심이 너무 충동적이고 성급했던 것이 아닐까 고민도 했었지만, 해연은 간신히 되찾은 일상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너무 괴롭고 힘든 나날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이현은 잘하겠다던 말대로 정말 조심하며 행동했다. 바로 옆집에 있음에도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고, 간혹 마당에 나온 해연을 멀찍이서 지켜볼 뿐이었다.
지금처럼.
멀리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바로 맞은편 집에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래서 안심이 됐다. 만약 무슨 일이 또 생긴다면, 그가 지켜 줄 것 같아서.
“하여튼 이상한 사람…….”
이렇게 유영이 몰래 마주 보고 있으려니 꼭 밀회라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해연이 저처럼 마당에 나와 있는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일주일간 매일 멀리서 그를 보긴 했지만, 이렇게 제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없을 때 섣불리 해연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유영의 경고를 아주 잘 지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제게로 오는 걸까. 해연은 살짝 긴장하며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미 할 거 안 할 거 다 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그건 아마도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저 남자의 얼굴 때문일 것이다. 해연은 홀린 듯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선선한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남자의 미려한 얼굴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두근거리며 뛰는 심장이 어색해 해연은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이현이 그녀를 따라 무릎을 굽혀 앉아서 시선을 피한 의미가 없어졌다.
“이 녀석 식사는 따로 챙기지 않아도 돼요.”
“……어, 혹시 당신이 키우는 고양이였어요?”
진작 말해 주지. 괜히 밥 안 먹는다고 안달복달했다. 일주일간 고양이 밥을 챙기던 모습을 다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던 이현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해연은 문득 든 생각에 휙 고개를 내려 이현에게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리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봤다.
설마.
이 아이는 너무 작고 귀엽기까지 했다. 이렇게 작은 고양이가 자신이 봤던 그 괴물과 같은 것일 리가 없다. 하지만…….
“혹시, 이 고양이도 당신하고 같은…….”
“맞아요.”
이현이 너무 빨리 긍정해 버린 탓에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던 해연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졌다. 해연이 살짝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자 이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당신 곁에 위험한 걸 둘 리가 없잖아요. 이건 그냥 집 지키는 개 정도로 생각하면 돼요.”
“……정말요?”
“네, 정말. 그러니까 중성화를 해 줄 필요는 없어요.”
“……!”
그 말을 듣고 제게 왔던 거였구나. 해연은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는 멀쩡한 동물을 고자 만들 뻔했다는 사실에 머쓱하게 헛기침했다.
그런 해연을 보며 가만히 웃고 있던 이현은 할 말이 끝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해연은 그대로 가 버릴 것 같은 이현의 바지 자락을 저도 모르게 움켜잡았다. 이현이 왜 그러냐며 왼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묻자 해연은 머뭇머뭇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고 살짝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 아침은 먹었어요?”
해연의 물음이 예상에 빗나갔는지 이현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럼 들어가요.”
나도 안 먹었으니까. 해연의 말에 이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그래도 돼요?”
뻔뻔하게 자기 마음대로 밀고 들어올 때는 언제고 왜 되묻는 건지 모르겠다. 해연이 볼을 붉히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왜요? 같이 먹기 싫어요?”
“아니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해연의 마음이 변할세라 이현이 냉큼 대답했다. 확연히 밝아진 남자의 해사한 얼굴에 해연이 옅게 웃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살짝 주저하다가 차마 그의 손을 선뜻 잡지 못하고 그의 팔뚝만 툭 건드렸다.
정말 스치듯 부딪힌 거였다. 그런데 이현의 몸이 과할 정도로 크게 튀었다. 해연도 덩달아 놀라 그를 바라봤다.
“왜 그래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던 해연은 문득 떠오른 것에 휙 고개를 내렸다. 왼쪽 팔. 그때 정체 모를 사고로 자신을 보호하다 크게 짓물렀었던 화상. 자신이 서툴게 붕대를 감았었던 바로 그 팔이었다.
왜 잊고 있었을까. 그가 그동안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가 사람이 아닌 괴물이어서 자신조차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던 것이 생각나자 해연은 황망한 얼굴을 했다.
“설마, 아직 치료를 안 한 건 아니죠?”
“했어요. 정말이에요.”
“봐 봐요.”
그는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던 터라 직접 눈으로 봐야 했다. 해연은 손목까지 내려와 있는 그의 셔츠 소매를 밀어 올렸다.
“아…….”
멀쩡했다. 언제 다쳤냐는 듯 화상에 일그러졌던 피부가 매끈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씻은 듯이 나았다는 것은 이 남자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새삼 자각하게 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해연을 안도하게 했다.
괴물이어서 끔찍했지만, 또 괴물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것 봐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고개를 숙여 해연의 귓가에 나붓이 속삭였다. 그러고는 그의 팔뚝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쥐고 아래로 내렸다. 평소보다 단호한 손길이었지만, 해연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부드러웠다.
해연은 손을 잡은 채로 이현과 함께 걸어가며 그의 차가운 손이 조금씩 저의 온도와 비슷해져 가는 게 간질간질했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뒤 해연은 그를 보고 있으면 설레기도 했지만, 동시에 울고 싶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양극단의 감정은 꽤 오래 지속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지금 맞잡고 있는 손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녀는 자신을 보고 있는 이현을 향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계속 이렇게 평온하길 바랐다. 계속, 아무런 일도 없이.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기를 해연은 간절히 소망했다.
* * *
한번 아침을 같이 먹은 게 물꼬를 틀었는지 그 뒤로 두 사람은 유영이 출근하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끔 집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고, 마당의 그네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스킨십이라고 해 봤자 손을 잡는 게 다였다. 이미 수도 없이 몸을 맞댄 사이였는데 고작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묘했다. 설레기도 하고 긴장이 되기도 했다. 꼭 이제 연애를 시작하는 것처럼.
오늘도 유영이 출근하고 함께 아침을 먹은 뒤였다. 해연이 음식을 만들고 이현이 설거지와 정리를 담당했다. 해연은 깨끗이 씻은 그릇을 정리하는 이현을 향해 최대한 가벼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하세요.”
“그, 예전에 말했던, 생식 능력이 없다는 말…….”
해연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어물거렸다. 말을 꺼내고서야 이 부분이 ‘남성’에게 꽤 예민한 문제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남성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어쩌지…….’
하지만 자신으로선 물어봐야 할 질문이었다. 해연이 차마 질문을 다 잇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이현은 잠시 대답 없이 그녀를 깊은 눈으로 응시했다. 해연은 흠칫 마른침을 삼켰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 순간 더욱 어두워져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심연처럼 보였다.
“나를, 버리겠다는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