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현은 해연의 거처를 마련할 때 같이 사 두었던 바로 옆집으로 들어갔다. 탁, 문을 닫는 순간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손으로 입을 거칠게 훔쳤다. 손에 검게 죽은피가 흠뻑 묻어 있었다.
“하…….”
만월엔 힘을 사용하는 게 어려웠다.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설핏 웃었다. 대가라니. 얻은 게 그렇게 많은데 몸이 조금 상하는 건 신경 쓸 가치가 없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잡종에 의해 상처 났던 팔을 바라봤다. 완벽하게 복구된 것 같던 매끈한 피부가 녹아내리며 흉측한 상처를 드러냈다. 해연이 신경 쓰지 않도록 가려 놨지만, 이현은 이 상처를 고칠 생각이 없었다. 이것조차 해연에게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상처 위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해연의 집은 완벽하게 꾸며 놓은 것과 달리 그의 집은 황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아무것도 없었다.
이현은 거실 한쪽 면을 모두 차지한 창을 활짝 열어 허공에 뜬 달을 바라봤다. 검은 하늘엔 구름도 별도 보이지 않아서 노란빛을 내는 달이 유독 선명하게 빛났다.
욕심 같아선 해연을 마음껏 탐하고 싶었다. 욕망을 참는 것이 어려웠다. 해연을 안았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말을 한마디라도 내뱉는 순간, 간신히 억누른 자제력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서.
그는 해연과 닿았던 입술을 손으로 쓸며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해연이 그를 밀어내지도,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시 받아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자신을 선선히 안으로 들이는 해연의 행동에 이현은 기쁘면서도 이 순간이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느껴졌다. 믿을 수 없어서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그런 꿈. 어쩌면 불길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발코니 밖에 서 있는 이현을 향해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훑으며 지나갔다.
* * *
이현이 달을 보며 해연을 생각하고 있을 때, 해연도 싱숭생숭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잠을 자려고 해 봤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해연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하염없이 보고 있을 때, 자는 줄 알았던 유영이 잠기운이 물씬 묻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언니, 자요?”
“아니, 안 자. 왜?”
해연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오늘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에요.”
“……그러게…….”
“강이현 그 남자 대단하긴 하네요. 결국 제가 뺨 한 대 치고 끝났잖아요. 진짜 벼르고 있었는데.”
유영이 아쉬워하며 하는 말에 해연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그것도 엄청난 건데, 유영만 그걸 몰랐다.
“진짜 마음 같아선 아주 난도질을 하고 싶었는데……. 제가 언니 때문에 참은 건 줄 알아요.”
“으응…….”
차마 고맙다는 말까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음부턴 그러지 말고 조심하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한다고 들을 애도 아니었고, 괜히 편든다고 오해할 것 같기도 해서였다.
사실 유영이 계속 잠이 안 오는 이유는 집이 낯선 이유도 있지만, 아까 강이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집이 너무 예뻐서 깜빡 정신을 빼고 있었는데, 자려고 누우니 번뜩 생각이 났다.
해연 언니가 위험하다. 그런데 이걸 해연 언니는 모른다고 한다.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던 강이현의 말을 그대로 따라야 할지, 아니면 말을 해서 조심하게 해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혹은, 위험하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도 있었다.
생각이 많아지니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이 가장 믿는 감도 확신할 수가 없어 유영은 주저하며 해연을 불렀다.
“언니, 있잖아요…….”
“응?”
“아니, 아니에요.”
“뭔데? 왜 말을 하다 말아?”
유영이답지 않게 말을 끊자 해연은 그냥 말해 보라며 채근했다. 해연의 목소리는 속에 담았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게 유영을 더욱 망설이게 했다. 여기에 큰 돌을 집어 던지면 다시 어두워지겠지.
‘아, 모르겠다.’
일단은 강이현 하는 짓을 보고 생각해 보자. 며칠만 두고 보면 각이 나오겠지. 뭔가 수상쩍은 기세가 보이면 언니 들고 튀면 되고. 유영은 결국 잠깐 입을 닫기로 결정하고 말을 돌렸다.
“내가 진짜로 이런 집을 받았다고 그냥 넘어간 게 아니라구요.”
“그럼, 당연하지. 알아, 유영아.”
이번에는 아까처럼 얼버무리며 넘어가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다해 대답하자 유영이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길게 하품하더니 말이 없어졌다. 잠든 거였다.
유영의 숨이 깊고 고르게 변하자 해연은 살짝 부푼 입술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오늘 대체 몇 번이나 그와 키스를 했던 건지 셀 수가 없었다. 그와 몸을 맞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수없이 이어진 내밀한 접촉은 꽁꽁 싸매려 노력했던 경계를 힘없이 허물었다.
‘강이현…….’
짐승으로도 변할 수 있는 남자. 사람이 아닌 괴물.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 남자. 그리고…….
‘나도 그런 거겠지.’
그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그 남자에게 끌리는 거라면.
그녀는 입술을 만지던 손을 아래로 내려 아직도 미세하게 울리고 있는 아랫배를 덮었다. 그가 들어왔던 곳이 아직도 열려 있는 것만 같았다. 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 낯설어 배를 만지작거리던 해연은 불현듯 배를 울리는 꼬르륵 소리에 볼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아침만 먹고 계속 굶은 상태였다. 하도 일이 정신없이 흘러가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한번 허기를 인식하니 뭔가를 먹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냉장고에 뭐가 있으려나.’
왠지 이현이라면 냉장고를 모두 채워 놨을 것 같았다. 해연은 유영이 깨지 않게 조심하며 가볍게 먹을 것을 찾아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여니 역시 예상대로 먹을 것이 줄을 맞춰 정렬되어 있었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조리된 음식부터 갖가지 음료와 디저트, 과일까지. 냉동고도 마찬가지였다. 종류별로 줄을 세운 고기에 라벨까지 붙어 있었다. 이걸 다 해치우려면 며칠, 몇 주가 걸릴 지 가늠이 가지 않을 정도로 꼭 차 있었다.
‘정말 적당한 걸 모르는 사람이야.’
내심 혀를 내찼지만, 그래도 덕분에 허기를 채울 수 있으니 다행이긴 했다. 해연은 데우지 않고 바로 먹을 수 있는 샐러드와 빵 두어 개를 골라 아일랜드 식탁 위로 올렸다.
“…….”
이내 해연은 순식간에 음식이 사라진 빈 그릇을 멀뚱히 바라봤다. 배는 뭘 먹었냐는 듯 여전히 허기를 알렸다.
“배가 많이 고팠었나 봐.”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해연은 혼자 변명하며 슬그머니 다시 냉장고로 향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이 꺼냈다. 조금 전에 먹었던 게 입맛을 돋웠는지 식탐이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해연은 열심히 먹고 싶은 걸 골라 식탁에 올려 두고 의자에 앉아 음식을 하나둘 해치우기 시작했다. 사실 꺼낸 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욕심껏 내놓긴 했지만,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깔끔하게 끝냈다.
배가 차니 만족스럽긴 했지만, 식탁에 가득 찬 빈 그릇을 보니 민망했다.
“와, 이걸 내가 다 먹은 거야……?”
어이도 없고, 이 많은 걸 먹고도 멀쩡한 위가 신기하기도 했다. 해연은 재빨리 그릇을 씻고 증거를 인멸했다. 세면대에 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정리를 마쳤을 무렵, 해연의 표정이 갑자기 훅, 굳었다.
속이 이상했다.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손으로 입을 꾹 막고 있었지만, 계속 속에서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는 게 힘들었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변기를 잡고 몸을 숙였다.
“우욱!”
입을 여는 순간 막고 있던 토사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잠깐 멈췄을 때도 속이 들썩이며 다시 남은 것을 밖으로 밀어냈다. 먹었던 게 많았던 만큼 구토도 길고 힘들었다.
“하아, 하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무릎이 꺾였다. 몸에 남아 있던 모든 기운이 일제히 사라진 기분이었다. 해연은 차가운 타일에 볼을 댄 채 누워 숨을 헐떡였다. 숨을 쉬는 것도 벅찼다.
‘어지러워…….’
다행히 조금 시간이 지나니 몸이 나아졌다. 어지럼증도, 메슥거리던 속도 한결 괜찮아졌다. 몇 번 눈을 깜박이니 시야도 돌아왔다. 해연은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지탱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일어설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해연은 몇 번 다리에 힘을 주다 포기하고 벽에 상체를 기댄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분명 몸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현 때문인 걸까. 해연은 이현이 제게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뒤 묻어 두기로 했지만, 몸에 이상이 생기니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현을 만나기 전까진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선 정말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흔한 감기조차 걸리지 않고 건강했었다. 해연은 무의식중에 아린 배를 쓰다듬다 다른 가능성에 생각이 닿았다.
‘설마…….’
아니겠지. 이현도 그렇게 말했고, 생리도 했다. 그 뒤로 관계를 가진 건 아까뿐이었으니 임신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치솟은 식욕도 그렇고, 그 뒤로 메슥거리는 속과 구토도 모두 그녀가 알고 있는 임신의 초기 증상과 똑같아서 불안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오래 안 먹다가 한 번에 과식해서 탈이 난 것이리라.
‘그래도, 만에 하나 정말 임신한 거라면 어쩌지……?’
해연은 예전에 임신한 줄 알고 괴로워했던 때를 떠올렸다. 괴물의 아이를 뱄다고 생각해서 정신이 나갔다. 자살마저 생각했을 정도로……. 이현이 너무 끔찍하고 미웠을 때는 그랬다.
‘그래, 그랬었지.’
불과 몇 주 전인데 꼭 까마득히 먼 옛날에 있었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지금은 불안하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고작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인정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는 건가. 고작 하루인데. 그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순간, 괴로웠던 마음이 사그라들었다.
거짓말처럼. 마치 이게 정답이라는 것처럼.
그래, 어차피 자신은 또 그에게 흔들릴 것이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끊임없이 제게 다가오는 그 남자를 떨쳐 내지 못하고 또 끌려갈 테지.
‘바보처럼…….’
웃음도 나오지 않을 만큼 너무나도 뻔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내가 괴롭지 않으려고. 아니, 조금이라도 덜 괴로우려고.
아니, 사실은 이것마저 그에게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만들어 낸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해연은 애써 외면했다. 그래야 살 것 같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