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일은 그가 바라던 것보다 훨씬 더 쉽게 풀리고 있었다. 분명 이유영에게 들키지 않았더라면 해연은 또 그와 엮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리라. 그와 나누었던 시간을 후회하며. 당연히 그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좁힌 거리인데.
그래서 이유영이 밖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해연이 나가는 걸 억지로 잡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나가지 말라고 하면 해연이 더 나가려고 할 걸 알아서 말리는 척하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유영은 그의 생각보다 아주 잘 해 주고 있었다.
그는 삵이 된 윤시후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특유의 반항기도 전혀 없이 길든 짐승처럼 얌전했다. 윤시후로서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거였다.
일찍이부터 숨죽이며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아니, 보고만 있어야 했던 윤일우는 안주희를 휙 돌아봤다. 윤시후가 짐승의 형태로 변하기 시작할 때, 튀어 나가려던 그를 안주희가 필사적으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저게 뭐지? 시후는 분명 사자였어. 저런 삵 따위가 아니라.”
“……같은 고양잇과긴 하잖아…….”
“뭐?”
“너도 조심해. 저렇게 되기 전에.”
안주희는 기운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윤일우를 향해 경고했다. 윤시후마저 저렇게 된 걸 보니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순혈’이 아니다. 우린 그저, 주인의 힘을 빌려 인간이 된 짐승에 불과했다. 주인이 원하면 언제든 다시 짐승이 될 수 있는.
그동안 자신이 인간보다 우월하다고 여겼던 자부심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주인은 우리 종족 중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아니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격차였다. 갖다 대는 게 우스울 정도의 엄중한 차이.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왜 주인에게 아버지의 배신을 바로 말하지 않았던가. 얽힌 사람이 많다고 망설이지 말고, 시후에게 듣자마자 말했어야 했다. 자신도 주인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되면 언젠가 저렇게 되려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주인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손짓 한번으로 치워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오래 잠들었을 때 수장이 될 수 있을 재목이라 여겼던 윤시후가 반항 한번 못하고 잡종보다 못한, 비루한 짐승이 된 것처럼.
‘그럼 잡종은 뭘까?’
그것도 주인이 만들어 낸 것일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런 불완전한 생명체를 만들었지? 하지만 혼자 생각한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오로지 주인에게서만 답을 얻을 수 있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섣불리 물을 수도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불길한 의문이었기 때문에.
안주희는 자신처럼 혼란스러워하는 윤일우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몰라, 아무것도. 정말이야.”
“주희야!”
“주인님께 물어. 대답을 들을 자신이 있으면.”
“…….”
윤일우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인은 어딘가 그리운 얼굴로 인간의 지성을 잃어버린 윤시후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차마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니었다.
시후를 말렸어야 했다. 하도 제멋대로 굴어서 이번만큼은 제대로 혼나 보라고 방관했던 것이 설마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낼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큰아버지께 뭐라고 해야 하지……?’
시후만 바라보고 사는 분이었다. 시후가 이렇게 된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 * *
유영은 해연이 있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언니, 강이현하고 얘기해 봤는데요. 우리, 강이현이 구했다는 집으로 들어가요.”
“뭐……?”
유영이 이현과 단둘이 대화하겠다고 나간 뒤, 다시 돌아온 시간은 고작 십여 분이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이현이라면 이를 갈던 유영이 돌변했다. 해연은 유영을 샅샅이 살폈다. 이현은 사람의 정신을 현혹하는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겪어 봐서 잘 알았다. 겉보기론 똑같아 보여도 교묘하게 그의 뜻대로 움직이게 된다.
그가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유영이 돌아오자마자 한 말이 너무 뜻밖이어서 저도 모르게 의심이 갔다.
“유영아, 혹시 그 사람이 네 이마를 만졌어?”
“네에? 이마를 왜 만져요? 가까이 가지도 않았거든요?! 언니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유영은 질겁하며 괜히 제 이마를 손으로 북북 문질렀다. 해연은 그렇구나, 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섣부른 질문이 유영에게 분명 이상하게 들렸을 거다. 하지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아직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유영의 단호한 부정에도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갑자기 왜 그 사람이 구한 집에 가자는 거야?”
해연이 말을 돌리자 유영은 찝찝했지만, 지금은 설득이 먼저였기 때문에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거길 제 명의로 하기로 했거든요. 언니도 기억하죠? 강이현, 그 인간이 내 원룸에 도둑이 든 것처럼 해서 저 언니 집으로 들어가게 했잖아요. 그거 위자료로 받기로 했어요.”
‘위자료’라는 말은 이현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었지만, 유영은 어차피 제 명의로 하겠다는 이현의 말을 기억하며 말을 지어냈다. 이렇게 말해야 해연 언니가 더 쉽게 설득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니까.
“…….”
위자료. 해연은 유영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분명 유영은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걸 선뜻 받는 건 유영이답지 않았다. 아니, 원래 계산이 뚜렷했으니 유영이다운 행동인 건가. 안 좋은 쪽으로 뻗은 생각이 냉정함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뭐, 처음부터 좋다고 했던 건 아니구요. 거길 왜 들어가냐고, 내 오피스텔에서 함께 살면 된다고 거절하니까 내가 구한 ‘작은’ 오피스텔 사는 건 어렵지도 않다며 ‘부탁’을 하시더라구요. 죽어도 언니 따라다닐 기세였어요.”
“혹시 협박한 거야? 그런 거라면 내가 가서…….”
해연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유영이 진정하라며 그녀를 도로 소파에 앉혔다.
“아니요, 흥정이었어요. 그런데 언니는 바로 협박했냐는 말부터 하네요? 그런 짓을 할 만한 인간이라는 뜻이죠?”
“아니, 그냥 나는…….”
“언니는 무슨 그런 미친놈을 만나서는.”
“…….”
유영이 할 말을 잃은 해연을 살짝 째려봤다. 해연이 지금 입고 있는 질 좋은 원단으로 만들어진 목이 넓은 티는 유영이 처음 보는 옷이었다. 원래 있던 옷은 모두 버려서 새로 산 옷은 모두 유영이 함께 나가서 쇼핑했다. 때문에 유영은 해연의 옷을 전부 알고 있었다.
‘저거 분명 강이현 그놈이 산 거겠지?’
단순한 디자인의 옷이었지만, 해연 언니와 정말 잘 어울렸다. 꼭 맞춤옷처럼. 그것뿐이라면 그냥 넘겼을 테지만, 왼쪽 목가에 남은 붉은 자국이 참 거슬렸다. 유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언니 목에 키스 마크 보여요.”
“……!”
해연이 한눈에도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손으로 목을 가렸다. 유영이 어딘지 말 안 했는데도 정확히 왼쪽을 가렸다. 그놈이 몰래 남긴 것도 아니라는 거지. 그러면서 협박받은 거 아니냐고 묻는 게 말이 되냐고. 그럼 자기는 협박이나 하는 남자한테 왜 홀랑 넘어갔대? 유영이 못마땅해 혀를 내차자 해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휴.”
“…….”
“어휴우우우!”
“…….”
유영의 한숨이 길어질수록 해연의 얼굴에 올랐던 홍조가 온몸으로 번졌다. 원래의 하얗던 살결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내가 진짜 걱정이 돼서 언니를 혼자 냅두겠냐구요.”
“미안…….”
“미안하면 그놈의 제주도는 내려갈 생각하지 말고 나하고 같이 살아요. 내가 아주 옆에서 감시할 거야.”
“유영아.”
“그럼! 언니 혼자 살면 그놈이 뺀질나게 드나들 텐데 내가 그걸 두고 볼 거 같아요? 차라리 내 눈에 흙을 뿌려요.”
당연히 해연으로선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도 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자신은 그에게 약했기 때문에.
“이것 봐. 이것 봐. 거짓말도 못 하면서 어딜 날 두고 가려고.”
“미안해. 네가 그렇게 걱정해 줬는데 내가…….”
해연이 눈도 못 마주치고 더듬거리며 사과하자 유영이 대뜸 말을 끊었다.
“됐어요. 내가 무슨 공치사를 바라고 그런 줄 알아요? 난 그냥, 언니가 괜찮아지기만 하면 된다구요.”
“…….”
“그러니까, 아무리 언니가 강이현 그 남자가 다시 좋아졌다고 해도 내가 인정할 때까지 기다려요. 언니 가족으로서 나한테 그 정도 권리는 있으니까.”
“응, 그럴게. 그렇게 할게…….”
아이고 이 언니야, 절대 좋아할 일이 없을 거라고 대답했어야지. 유영은 해연의 대답이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 말에 감동 받은 티를 여실히 내고 있는 해연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말고!”
“응.”
해연이 물기가 살짝 고인 두 눈에 힘을 딱 주고 부릅뜨자 유영이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설핏 웃었다.
“그럼 이제 짐 챙겨요. 그쪽으로 바로 가도 된대요.”
“지금? 이렇게 빨리?”
“네, 지금. 어차피 갈 거 여기서 더 뭉개고 있을 필요도 없잖아요.”
해연이 왜 이렇게 급하게 구냐는 듯이 바라보자 유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위험하다는데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사실 대체 뭐 때문에 위험하다는 건지 너무 궁금하고 무섭기도 했다.
‘뻥친 거면 가만 안 둬.’
지금 참고 넘어가 준 거 이상으로 되돌려 줄 테다.
‘우리 언니 또 울려도 마찬가지야. 그땐 진짜 너 죽고 나 살자니까 조심해라, 강이현.’
자신이 옆에 붙어 있다고 해서 강이현이 해연 언니에게 접근하지 않을 리가 없다.
‘여기선 안 붙어 있었나? 내가 회사에 가 있을 시간에 오늘처럼 또 스리슬쩍 들어올 테지.’
해연 언니가 딱 철벽을 쳐 줘야 할 일이지만, 오늘 일을 보아하니 턱도 없었다. 유영은 해연의 성격을 생각하며 한숨을 삼켰다.
정을 쉽게 주지 않았지만, 한번 정을 주면 떼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대우를 하는 회사도 쉽게 퇴사도 못 하고 오래 다녔던 거였다. 게다가 자신이 그렇게 이직하라고 노래를 불러도, 훨씬 좋은 조건을 단 이직 제의가 와도 무시할 정도로 고집도 셌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어하고도 목에 키스 마크까지 달고 함께 방에서 나온 걸 보면 이미 글러 먹은 거였다. 마음 약한 사람이 고집도 세면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한들 들을 리 없다.
‘이래서 커플 사이에 끼면 고생한다는 거구나.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진짜.’
사귀고 헤어지고, 또 싸우고 그래도 다시 좋다고 만나서 주변을 속 터지게 만든다던 커플들의 이야기가 저절로 떠올랐다.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유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감정이었다.
유영은 짐을 싸면서도 슬쩍슬쩍 제 눈치를 보는 해연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눈이 마주치면 아주 등짝을 팡팡 치며 정신 좀 차리라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