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네?”
“제가 사 둔 집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해연과 이유영 씨가 함께 지내 주세요. 집은 이유영 씨의 명의로 하고요.”
“……내가 고작 그런 거에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면,”
“아니요. 저는 그냥, 해연이 안전한 집에서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해연의 옆에 이유영 씨가 있다면 더 안심할 수 있고요.”
그것 외엔 다른 뜻은 없다며 이현이 유영을 향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유영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해연 언니에게 무슨 짓을 한 게 강이현 저 남자가 아닌가? 그럴 리가 없는데…….
“이유영 씨가 거절한다면 저는 혼자 있는 해연에게 계속 접근할 텐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그걸 두고 볼 거 같아요?!”
유영이 이현의 도발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현이 슬쩍 웃었다.
“그럼 결정됐네요. 이유영 씨가 얼마 전에 구한 오피스텔은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헐, 기가 막혀…….”
유영이 입을 뻐끔거렸다.
“남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건 좀 숨기는 게 정상 아니에요?”
“이유영 씨가 이미 알고 있는데 굳이 숨길 이유가 없죠.”
“아호 진짜 말이 안 통하네. 저기요. 나하고 해연 언니가 왜 그쪽이 구해 주는 곳으로 가죠? 내가 구한 오피스텔에서 같이 지내면 끝인데?”
“물론 그래도 돼요. 다만, 그 오피스텔을 제가 매입할 테니 결과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을 겁니다. 돈을 쓰는 건 내게 아주 쉬워요. 이 호텔 한 층을 모두 잡는 게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이유영 씨가 전세로 구한 그 작은 오피스텔 한 채를 사는 것도 쉽죠.”
“…….”
아호, 빡쳐. 유영은 이현이 재력을 내세우며 몰아치는 것에 이를 갈았다. 물론, 솔직한 말로 저 남자가 준다는 집은 구미가 당기긴 했다. 이 호텔 한 층을 다 예약할 재력이면 분명 아주아주 좋은 집을 샀을 테니까. 그리고 거기서 자신도 살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혹했다.
그럼 해연 언니하고 같이 사는 거니까. 언니가 언제 제주도로 내려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언니가 저 남자와 다시 이어진다면, 걱정하던 모든 게 사라진다…….
‘아니, 뭐래? 왜 혹하고 난리야?’
물욕에 약한 성격이 문제였다. 유영이 양 볼을 찰싹 때리며 번뜩 정신을 차리자 이현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역시 이상했다. 인간이 자신의 말을 거부했다. 해연의 옆에 아직도 붙어 있는 것도 그랬지만, 이유영에게 뭔가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청혈의 영향이었다면, 이유영은 진작 해연을 배신했을 거다. 변수가 뭔지 모른다는 건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만약 해연에게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었으면 머리를 헤집어 봤을 테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지금 해연에게 가장 안정감을 주는 인간이기도 했으니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게 없군.’
죽일 수도,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다면 차라리 옆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낫다. 그래서 이현은 굳이 이유영에게 해연과 함께 지내라고 제안을 한 거였다.
“설마 해연 언니한테도 이런 식으로 굴었어요? 막, 돈으로 협박하고 그런…….”
“제가 해연에게 감히 그럴 리가 없고, 돈 따위로 해연이 넘어갈 일이 없다는 것도 이유영 씨가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 물욕에 약한 자신이면 몰라도 해연 언니라면 그런 저열한 협박에 넘어갈 리가 없다. 유영은 자신의 질문이 근본적으로 잘못됐음을 인정했지만, 해연 언니의 성격을 자신보다 저 남자가 더 꿰뚫고 있는 건 기분 나빴다.
‘알고 지낸 기간도 저 남자보다 자신이 훨씬 오래됐는데!’
유영은 이현을 상대로 알 수 없는 경쟁심을 느끼며 다소 유치한 말을 했다.
“뭐야, 그럼 왜 나한테 이래요?! 내가 그쪽한테 협박 받았다고 해연 언니한테 말하면 그쪽이 타격이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이유영 씨가 말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고 내 패를 전부 보이는 겁니다. 맹세코 협박이 아니에요. 해를 끼칠 생각도 없습니다.”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구요?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그쪽이 예전에 내 원룸에서 한 짓을 생각해 보라구요!”
이현의 몸이 움찔 굳었다. 그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잠시 침묵을 지키자 유영은 드디어 저 뚫린 입을 막았다는 생각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정말 죄송합니다.”
단 한마디 변명조차 없이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모습에 유영은 놀라기도 했고, 살짝 꼬였던 기분이 풀리기도 했다. 누군가 집에 침입했다는 사실에 놀라긴 했지만, 큰 사고는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질이 나쁜 짓이었다. 조금 마음이 풀어졌다고 그대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런 짓까지 했던 사람인데, 내가 설령 둘 사이가 좋아진다고 해서 아, 예 알겠습니다. 하고 잘됐다고 박수칠 수 있겠어요? 그쪽은 사과 한 번에 넘어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인데, 나는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돼요.”
“……오해예요. 나는 그런 과분한 걸 바라서 이유영 씨에게 부탁한 게 아닙니다. 다만, 해연은 지금 신변이 위험해서 보호가 필요해요.”
“무슨…….”
“이건 해연에게 비밀로 해 주세요.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
해연 언니가 위험하다고? 하지만 대체 왜? 뭐 때문에 해연 언니가 위험하지?
“그,”
“죄송하지만,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어요. 이유영 씨도 위험해지니까. 그럼 제가 이유영 씨에게도 해연에게도 볼 낯이 없어져요.”
“……!”
유영은 굳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강이현의 말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적어도 제 촉으로는. 유영은 남자가 말했던 ‘패’가 지금 이 말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저 남자가 진심으로 해연을 보호하려 하는 것도. 그럼 위험하다는 말도 진짜이리라. 그리고 그 위험한 일이란 게 저 남자 때문에 생긴 일이란 사실도.
‘설마 조폭, 뭐 그런 건가?’
비밀이 많은 것도 그렇고, 돈이 많은 것도 그렇고, 조폭이라고 생각하면 설명이 된다. 설혹, 그런 게 아니라고 해도 유영은 역시 해연 언니와 저 남자와의 관계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조건이 너무 나빴다. 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길래 관련도 없는 사람까지 위험해지냐고.
‘근데 저렇게 좋아하면서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해연 언니가 그렇게 힘들어한 거지?’
물을까 말까 치열하게 고민하던 유영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저기요, 해연 언니한테 무슨 짓 했어요? 언니 밖에도 못 나가겠다고 할 정도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제가 이유영 씨에게 말할 부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해연이 말하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동안 계속 유영에게 해연과 있을 때처럼 부드럽던 이현의 눈이 차갑게 변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위압감에 유영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무렇지 않아졌다.
‘뭐, 뭐지?’
유영은 동그랗게 뜬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그때 이현은 유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해연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해연을 위해서.”
“그, 그냥 언니가 말 못 할 거 같아서 그쪽한테 물었던 거거든요? 됐어요.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누가 보면 나보다 저 남자가 해연 언니를 더 생각하는 줄 알겠네. 순간의 호기심으로 섣부르게 굴었던 걸 후회하느라 유영은 조금 전에 이현에게 겁먹었던 사실을 잊어버렸다. 이현의 의도대로.
“그리고 그쪽이 제안한 말은 생각해 볼게요. 어,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그쪽 마음대로 할 거 같으니까.”
“감사합니다.”
자신의 말에 강이현이 만족한 미소를 짓는 걸 보며 유영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분명 한 소리를 하려고 따로 보자고 한 거였는데, 소득은 전혀 없이 이 남자가 원하는 대로만 휘둘린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두 사람 사이를 허락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언니가 위험하다니까 이번만 강이현 씨 말대로 하는 것뿐이니 혹시라도 오해할 생각하지 말아요. 딱 봐도 그쪽 때문에 일이 생긴 거 같은데 언니 손가락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당연합니다.”
“후우, 그럼 언제 가면 돼요? 집은 이미 산 거 같고.”
“이유영 씨가 해연을 설득하면 언제든 갈 수 있어요. 저는 되도록 오늘 바로 갔으면 하고요.”
언제까지 이렇게 좁고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는 호텔에 두고 싶지 않다는 이현의 말에 유영이 탐탁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여기서 기다려요. 언니하고 얘기하고 올 테니까.”
유영은 다시 한번 이현을 노려보곤 몸을 휙 돌렸다. 이제 더 할 말도 없었고, 궁금하다고 알려 줄 것 같지도 않아 그냥 해연에게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이현이 유영을 불렀다.
“이유영 씨, 부탁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또 뭐요?!”
하나 들어줬으면 됐지, 뭘 또 바란담? 염치도 없고 뻔뻔하고, 정말 얼굴하고 돈 외엔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남자였다. 유영이 도끼눈을 한 채 다시 몸을 돌리자 이현은 그런 유영을 향해 정중히 부탁했다.
“……되도록 해연의 곁에 오래 있어 줘요. 가능하다면 평생.”
“그쪽이 그런 말 안 해도 꼭 붙어 있을 거거든요? 언니하고 나는 가족이나 다름없다고요!”
“그래요.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군요.”
“…….”
뭐야, 왜 저렇게 사람 불안해지게 말해? 말은 안심이라고 했지만, 강이현의 눈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뭐라고 저런 부탁을 한담. 우린 당신보다 더 가까운 사이거든?’
유영은 흥, 코웃음을 치고 방을 휙 나가버렸다.
* * *
쾅, 방을 울릴 정도로 큰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이현은 별다른 동요 없이 허공을 바라봤다. 그러자 윤시후가 허공에서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뚝 떨어졌다.
“윤시후.”
“뭐, 뭐, 왜?!”
나름 용기를 내서 대거리했지만, 윤시후는 한 걸음씩 천천히 제게 다가오는 주인을 피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고요한 부름이 사뭇 불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윤시후의 몸은 금세 벽에 부딪혔다. 주인이 무릎을 굽혀 몸을 내리자 윤시후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해연이 동물을 좋아하는 점이 네게 다행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