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어, 해연 언니?”
반가운 얼굴로 해연을 향해 활짝 웃던 유영은 해연이 나온 방이 이상해 제가 들고 있는 카드키와 호텔 문에 적혀 있는 룸 번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우리 방이 여기가 아니었나……?”
어리둥절해하는 유영이의 모습에 해연이 어설프게 웃었다. 이 순간을 모면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영이 퇴근할 시간이라는 걸 깜박했다. 너무 확실한 자신의 실책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아닌데, 우리 방은 여기가 맞는데. 언니 왜 거기서 나왔어요?”
방 번호와 카드키에 적힌 번호를 맞춰 본 유영이 해연을 보며 묻다가 해연의 뒤에 보이는 이현을 보고 눈을 비비적거렸다.
“뭐야, 내가 지금 왜 헛것이 보이지?”
“…….”
그야 당연히 헛것이 아니니까……. 해연은 유영의 말에 대꾸도 못 하고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유영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연과 주제도 모르고 낯짝을 뻔뻔히 들고 있는 이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두 사람 다 방금 씻고 나온 티가 너무 났다. 게다가 둘의 분위기가 묘했다. 모르는 사람이 봐도 둘이 연인이라고 바로 알 수 있을 것처럼. 유영의 표정이 단박에 사나워졌다.
“언니, 당장 이리로 와요.”
“어? 어어…….”
유영의 부름에 해연이 맨발로 호텔 복도를 내딛으려고 할 때였다.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이현이 해연을 번쩍 안아 들었다.
“바닥 더러워요.”
“아니, 지금 당신이 왜 나서서…….”
왜 상황을 더 곤란하게 만드냐고 한 소리를 하려던 해연은 유영과 눈이 마주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유영이 폭발하기 직전의 얼굴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유영은 후아, 아무 말 없이 카드키로 문을 열고 해연을 안은 이현을 향해 고갯짓했다. 빨리 들어오라는 무언의 행동에 이현은 해연을 방 안, 깨끗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순간, 유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현의 뺨을 올려 쳤다.
짝―
날카로운 파공성이 조용한 호텔을 크게 울리자 해연은 물론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치를 보고 있던 윤시후까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특히 윤시후의 충격이 컸다. 아무리 자신이 제멋대로 굴어도 저런 짓까지 할 용기는 없었다. 아무리 이유영이 주인의 정체를 모른다고 해도 주인 특유의 압박감을 생각하면 지금 이유영이 한 짓은 굉장한 거였다.
‘우와 진짜 여기 오길 잘했네.’
주인이 인간 여자 따위에게, 심지어 한해연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따귀를 맞는 장면을 못 봤으면 아까워서 땅을 치고 후회했을 거다. 윤시후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치려다 눈치를 보고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때린 유영마저 너무 크게 울린 소리에 당황했다. 심지어 손바닥도 찌릿찌릿 아팠다. 유영은 손을 위아래로 털며 이현을 바라봤다. 제 손이 이렇게 아플 정도면 분명 맞은 사람은 더 아플 거였기에.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차분한 사람은 오히려 이현이었다. 그는 손자국은커녕 붉은 기조차 없는 얼굴로 유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해연을 잘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
“그, 그걸 그쪽이 왜 고맙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무슨 낯짝으로 해연 언니 앞에 다시 나타났어요?!”
유영은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한 해연을 휙 돌아봤다.
“언니 혹시 저 새……, 아니, 강이현이랑 다시 잘해 보기로 한 거예요?”
“아, 아니야!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그러기만 해 보라는 듯한 유영의 사나운 얼굴에 해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고개를 저어 유영의 의심을 부정했다.
“그렇죠? 역시 우리 언니가 그럴 리가 없지.”
“으응…….”
해연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현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줬다. 하지만 유달리 눈치가 빠삭한 유영의 눈에 두 사람의 기류가 안 보일 리가 없었다.
‘아호, 저렇게 순진하니 저 나쁜 놈한테 홀딱 넘어가지.’
속이 답답해서 가슴을 쿵쿵 치고 싶었지만, 유영은 해연의 변명을 수긍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해연의 말에 타격을 받은 사람은 저보다 저 남자일 테니까. 유영은 해연의 옆에 조용히 서 있는 이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나가죠? 나는 해연 언니하고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이미 거의 넘어간 듯 보였지만, 그래도 단단히 단속해야 할 것 같아 한 말이었다. 하지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연을 보니 불길이 치솟던 유영의 마음이 훅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피해자인 해연을 닦달하는 게 타당한가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래, 모든 건 다 저놈이 문제인데 내가 왜 해연 언니한테 화를 내려는 거지?’
피해자는 그럴 수 있다. 피해자가 왜 피해자인데?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혼자 바깥도 못 나갈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은 해연이라면 ‘약간’의 혼란은 당연한 거다. 유영은 해연보다 저 인간부터 먼저 잡아야 한다는 걸 깨닫고 이현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일단 그쪽하고 먼저 얘기 좀 하죠.”
“유영아, 나하고 얘기해. 왜 이 사람하고,”
해연이 슬쩍 앞으로 나와 이현을 가리자 유영은 간신히 가라앉힌 화가 욱, 하고 치솟는 걸 느끼고 크게 심호흡했다. 참자. 참아야 한다.
“지금, 내 앞에서, 저 인간 편드는 거, 아니죠?”
“아, 아니야!”
해연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꼭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이 언니가 진짜. 해연 언니의 뒤에 서 있는 강이현이 슬쩍 웃고 있어서 더 속이 터졌다. 유영이 후후, 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들썩였다.
“나예요, 이 인간이에요?”
“뭐……?”
당장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유영의 말에 해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대답을 못 해요? 설마 나보다 저 인간이 더 중요해요?”
“아니야. 당연히 너지.”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냐고 해연이 얼른 대답하자 유영이 이현을 향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하지만 스스로도 유치한 행동이라는 걸 알아서 유영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유영은 흠흠, 헛기침하며 해연을 향해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럼 솔직하게 말해 줘요. 내가 언니 일에 나서면 안 돼요? 나한테 그 정도 자격도 없어요?”
“있어. 당연히 있지. 우린 가족인데 너 아니면 누가 내 일에 신경 써…….”
그나마 지금 유영의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드는 말이었다. 유영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언니는 가만히 있어 줘요.”
해연의 입을 딱 막아 버린 유영은 이현을 보며 밖을 향해 고갯짓했다.
“나가서 말하죠.”
“그래요.”
이현이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 순간, 해연이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해연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향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말라고, 유영이는 안 된다고. 차마 이유영 앞에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움직여 애원했다.
이현은 제 팔을 잡은 해연의 손 위로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영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유영은 둘이 얘기하잔 말에 대한 해연의 반응을 오해한 모양이었지만, 그는 해연이 자신이 이유영에게 해를 끼치는 짓을 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았다.
그가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미소를 짓자 해연은 안도한 얼굴로 숨을 가늘게 흘렸다. 그때, 두 사람의 행동을 빤히 보고 있던 유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둘이 지금 뭐 해요?”
분위기 파악 안 하냐며 유영이 눈을 부릅떴다. 해연이 화들짝 놀라 이현에게서 떨어졌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아유, 그러세요오?”
믿을 소리를 해야지. 유영이 애써 변명하는 해연을 찌릿 노려보곤 이현을 향해 소리쳤다.
“그렇게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나오라구요!”
해연은 유영이 저렇게 나오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까 다짜고짜 따귀를 때렸을 땐, 이러다 큰일이 날까 눈앞이 아찔할 정도였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계속 저래도 괜찮을까 걱정이 됐다.
‘정말 두 사람을 따로 보게 해도 괜찮은 걸까.’
그때 이현이 그녀의 새끼손가락을 스치듯 건드리고 유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해연은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는데, 그것만으로 미세하게 남았던 불안이 쑥 가라앉았다.
괜찮을 거다, 유영이는. 그는 유영이 어떻게 나와도 참을 테니까.
이상했다. 후회하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유영에게 들키고 나니 어딘가 속이 시원했다. 도망칠 퇴로가 막혀서. 갈팡질팡 흔들리고 후회하고를 반복하지 않아도 돼 버렸기 때문에…….
* * *
호텔 복도로 나온 이현의 시선이 도망갈까 말까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친 윤시후에게 닿았다. 윤시후가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슬쩍 유영의 팔을 잡았다.
“누나, 나는?”
“어? 아, 시후 네가 있었지. 깜박하고 있었네. 저기, 미안한데 오늘은 시간이 안 될 거 같아. 다음에 먹자.”
“뭐?!”
유영의 퇴짜에 윤시후가 펄쩍 뛰었다. 이러면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진다. 윤시후는 아직 문이 열려 있는 해연이 있는 방을 황급히 바라봤지만, 그 순간 이현이 문을 닫았다.
“……!”
아씨, 미치겠네. 윤시후는 마지막 시도로 해연을 부르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윤시후가 입을 벌린 순간 이현이 목소리를 막아 버린 탓이었다.
이현은 윤시후를 향해 무언의 경고를 한 뒤, 유영을 봤다.
“여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헐. 여기도 그쪽이 잡은 방이에요?”
이현이 가리킨 곳은 해연과 나왔던 방이 아니라 그 옆의 다른 방이었다.
“네.”
“돈 지랄 진짜.”
돈 많으셔서 좋으시겠어, 아주. 순순히 인정하는 꼴도 짜증 났다.
“그럼 여기에 온 것도 우리가 온 날이겠네요?”
“그것도 맞아요.”
“…….”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유영은 흥, 콧방귀를 뀌며 이현이 안내한 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윤시후가 입을 뻐끔거리며 유영에게 자기 존재를 어필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지금 윤시후에게 쓸 신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유영은 이현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해연 언니가 그쪽을 받아 주겠대요?”
“……아니요.”
“그렇겠죠. 해연 언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그나마 좋은 소식이었다. 더불어 저 뻔뻔한 남자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진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바짝 독이 올랐던 유영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현의 말에 다시 표정이 굳었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