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사무실에서 나온 유영은 회사 로비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윤시후를 보고 연신 신기하다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아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지?”
“그치? 나도 누나를 여기서 만날 줄 몰랐어.”
“나두!”
유영의 환대에 신나게 대답하던 윤시후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뒤통수가 따가워졌기 때문이었다. 이유영을 경호하고 있는 윤일우의 시선이었다.
잠시 움찔하며 눈치를 보던 윤시후는 씨익 웃었다. 그러게 누가 나만 따돌리래? 순순히 전화를 받았으면 나도 이러지 않았지. 윤시후는 유영을 향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나 배고픈데 밥 좀 사 주면 안 돼?”
“어? 밥?”
“안 돼?”
윤시후는 유영에게 눈을 맞추며 애원했다. 유영은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수락하기도 뭐해 머뭇거렸다. 해연 언니와 통화하면서 퇴근하는 즉시 돌아가기로 했는데, 그렇다고 배고프다는 시후를 외면하기도 좀 그랬다.
‘으, 얘랑 또 언제 볼 수 있을 줄 알고 거절해. 아깝단 말이야.’
윤시후의 외모가 딱 유영의 취향을 그대로 적중해서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미성년일 게 분명한 애한테 뭘 어쩌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눈요기는 할 수 있는 법 아닌가?
유영이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남자는 해연의 애인이었던 그 개새끼 강이현이었지만, 유영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은 윤시후였다. 강이현처럼 부담스러운 얼굴보다 적당히 반항적이면서도 살가운 애교도 있는 산뜻한 윤시후 같은 얼굴이 좋았다. 그래서 더 고민됐다.
“으음…….”
“왜? 바빠? 나 밥 못 사 줘? 나 돈 있어. 그냥 같이 먹어 주기만 하면 안 돼?”
혼자 먹기 싫단 말이야. 윤시후가 본격적으로 떼를 썼다. 유영의 입술이 슬금슬금 풀어졌다. 어휴, 얘를 어쩌면 좋담. 하여튼 잘생긴 얼굴이 최고였다. 자고로 남자는 얼굴이 잘생기고 애교가 많아야 한다. 결국 유영의 입에서 윤시후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뭘 네가 사. 내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어린애한테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거든? 근데 우리끼리만 먹을 순 없고, 한 사람 더 껴야 하는데 괜찮아?”
“……누구?”
“왜 예전에 내가 연락 안 된다고 계속 찾고 있다고 말했던 사람 기억나? 해연 언니라고. 지금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
“아아……. 당연히 기억하지. 난 좋아! 완전 좋아!”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이었지만, 진짜 본 속셈은 밥을 같이 먹으면서 해연 누나의 위치를 캐려던 거였는데 제가 뭘 하기도 전에 원하는 게 나왔다. 윤시후는 환하게 웃으며 유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인내심이 끊긴 윤일우의 목소리가 뇌리에 꽂혔다.
“윤시후, 당장 안 돌아가?”
답지 않게 화가 가득한 목소리에 윤시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얄밉게 웃으며 유영을 향해 살갑게 말을 걸었다.
“누나 그럼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어? 어, 이쪽으로…….”
포옹도 놀랐지만, 거의 맞닿을 듯이 가까운 얼굴도 당혹스러웠다. 유영은 살짝 볼을 붉히며 해연과 머물고 있는 호텔을 향해 손짓했다. 당황한 나머지 해연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유영은 윤시후와 함께 호텔로 향하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나 어제 시후 네 형도 봤었는데 오늘은 널 보네?”
“어? 어……. 우리 형 봤어?”
“응. 근데 병원에서 봤는데 혹시 어디 아프셔?”
“엥? 우리 형이 왜 아파? 그냥 해……. 아, 아니, 아픈 사람 따라갔겠지.”
와 씨,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네. 이상하게 듣진 않았겠지? 윤시후는 슬쩍 이유영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유영은 그러냐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 게 전부였다. 수상하게 생각하는 기미도 없었다. 걸리진 않은 거 같았다.
그러나 윤시후의 뒤통수에 꽂힌 윤일우의 눈초리는 더욱 거세졌다.
“윤시후!”
‘안 들린다. 안 들려. 나는 안 들리는 거야.’
“너 계속 이렇게 나오면 나도 더 이상 네 뒷감당 못 해 줘. 그것만 알아 둬라.”
‘누가 해 달라고 했나? 생색은.’
흥. 윤시후는 윤일우의 경고에 콧방귀를 뀌며 이유영의 옆에 찰싹 붙었다. 어차피 이유영이 있는 이상 윤일우가 앞에 대놓고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 상황을 한껏 이용할 작정이었다.
‘해연 누나만 만나면 게임 끝이지.’
해연 누나 옆에 붙어 있으면 주인도 뭐라고 하지 못할 거다.
윤시후는 유영을 재촉하며 속으로 히죽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완벽한 계획이었기 때문에. 물론 주구장창 붙어 있진 못할 테니 뒷일이 조금 걱정되긴 했다. 주인 놈이 분명 화를 낼 테니까.
‘에이 뭐 그래도 죽이기야 하겠어? 난 아직 어리잖아.’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녀도 무사한 건 아버지 윤경훈이 감싸 준 것도 있었지만, 윤시후가 아직 성인이 아니란 이유가 가장 컸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있는 윤시후는 이를 매번 아주 잘 활용하고 있었다.
매번 그래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가리라고, 쉽게 생각했다.
* * *
이현은 해연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른한 얼굴로 욕조에 앉은 해연은 제 앞에 앉은 이현을 힐끔 바라봤다. 그는 사정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절정에 오른 뒤 주저 없이 성기를 빼냈다.
‘분명 힘들 텐데…….’
이현은 해연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작게 웃었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보지도 말고요.”
위험하니까. 가벼운 목소리와는 달리 그의 말의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해연은 살짝 눈을 찌푸렸다. 신경 쓰지 않기엔 그의 성기는 존재감이 너무 컸다. 혈관이 불퉁하게 튀어나온 기둥도 그렇고, 너무 두껍고, 너무 길었다. 게다가 당장이라도 사정할 듯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해연이 계속 시선을 주자 끝에서 희뿌연 액체가 뭉글하게 흘러나왔다. 이현은 으음, 하는 난처한 신음을 뱉으며 해연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위험하다니까요.”
“하지만.”
“난 당신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이래요. 정말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
언제나 그렇다는 말이 더 신경 쓰였다. 게다가 아까의 섹스를 생각하면 더욱 무시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열기가 가시면 후회할 거라 확신했던 충동적인 섹스는 해연의 기억보다 차분했고, 상냥했다. 꼭 정신없이 요동치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듯이. 그래서 후회가 덜했다. 그 점이 해연을 너그럽게 만들었다.
그래, 그냥 손으로 도와주는 정도만. 그 정도는 해 줘도 괜찮을 거다. 대체 왜 이 남자의 사정에 신경 쓰냐는 냉정한 이성의 말에 열심히 변명하며 해연은 손을 뻗어 그의 성기를 잡았다. 이건 정말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현이 몸을 크게 떨었다.
“흣.”
“아, 아까 받은 게 있으니까…….”
그러니 큰 의미를 담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달리 해연의 귀가 확연히 붉어졌다. 이현은 밭은 숨을 내쉬며 웃었다. 끝까지 외면해도 상관없는데 이 여자는 마음이 너무 약했다.
‘이렇게 틈을 주니까 내가 자꾸 기어들어 가는 건데.’
이현으로서는 당연히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해연의 손에 몸을 맡긴 채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아까와 달리 그는 해연이 성기를 잡고 흔들 때마다 밭은 신음을 연신 쏟아 냈다.
“하아…….”
“…….”
남자의 신음이 쏟아지자 해연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그도 모자라 자신의 어깨를 약하게 깨물고 핥으며 허리를 흔들었다. 자신이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마찰이 길게 이어지자 손바닥이 홧홧했다. 성기가 움찔거리며 부피를 키우는 게 너무 잘 느껴져서 난감했다.
괜한 짓을 한 것 같다. 왜 해 주겠다고 했을까. 그냥 무시해도 됐을 텐데.
해연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섹스가 다시 시작된 기분이었다. 그가 허리를 흔들 때마다 욕조에 반쯤 찬 물이 출렁거리며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고스란히 해연에게 이어졌다.
“빠, 빨리 해요…….”
“읏!”
해연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꽉 주며 재촉하자 이현이 짧은 신음을 토하며 몸을 떨었다. 깨끗했던 물이 그가 쏟아 낸 정액으로 뿌옇게 흐려졌다.
눈을 감고 절정을 음미하던 이현은 천천히 눈을 떠 해연을 바라봤다. 사정을 한 사람은 이현이었지만, 해연의 호흡 역시 흐트러져 있었다. 발긋하게 달아오른 피부도 열감이 번진 눈도 계속 깨물고 있었는지 유난히 빨간 입술도 모두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마주한 갈색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흔들리기 시작하자 이현은 신음 같은 탄성을 질렀다.
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납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 * *
해연에겐 아주 길고, 이현에겐 아주 짧았던 입맞춤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다시 깨끗한 물을 받아 몸을 씻었다. 이현은 아주 능숙하게 해연의 시중을 들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해연은 끔찍한 기억 뒤로 그가 항상 저를 소중하게 대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자신의 동의가 전혀 없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해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살짝 풀어진 마음은 자꾸 남자의 좋은 점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이러다 완전히 그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남자에게서 얼른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찾았지만 해연은 결국 눈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제멋대로 떨어진 옷이 엉망이었다. 그나마 겉옷은 구겨진 정도라 괜찮았지만, 속옷은 다시 입기 힘들 정도였다.
난감하게 옷을 보던 해연은 한숨을 쉬고는 그냥 입으려 했다. 어차피 바로 맞은편이 자신의 방이니 잠깐만 참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마 속옷은 입을 수 없어 바지만 입으려던 찰나, 이현이 그녀를 말렸다.
“새 옷을 줄게요.”
“여자 옷이 있……. 설마 내 옷을 미리 사 놨던 거예요?”
“혹시 몰라서 가져왔어요. 아니, 오늘 같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말아요.”
“……빨리 주세요, 입게.”
오해할 기력도 없었다. 해연은 그가 건네주는 옷을 입은 뒤 그를 바라봤다. 그도 마침 옷을 다 입은 채였다.
“돌아갈래요.”
“……지금요?”
이현은 문 쪽을 슬쩍 바라보곤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조금 있다가 가는 게 좋겠어요.”
“아뇨, 난 지금 갈 거예요.”
해연은 다음에는 이 남자에게 볼일이 생기더라도 아주 짧게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이성을 차리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꾸 그에게 휘말렸다. 해연이 성큼 문을 향해 걸어가자 이현이 따라와 다시 한번 그녀를 말렸다.
“조금만 더 있다가요. 지금은,”
“이러지 말아요. 가겠다고 했…….”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해연은 그의 말을 끊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보이는 사람을 본 순간, 해연은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막 호텔에 도착한 유영과 눈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