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고요한 접촉은 해연의 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잠시 멈춘 듯했던 해연의 눈물이 더욱 서럽게 흘러내렸다.
이현은 그녀의 눈물을 방관해야 했다. 지금 그녀를 위로할 자격이 그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해연이 아픈 원인이 바로 그였으므로.
그는 평범하게 시작했어도 되지 않았냐는 해연의 말을 동의하지 않았다. 해연에게 했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없이 한 후회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에겐 해연을 위로할 자격이 없었다.
그럼에도 해연의 눈물이, 자신으로 인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아팠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해연에게 닿고 싶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 짓을 해 놓고도 포기가 되지 않았다. 이 여자가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 당신을 원망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울먹이며 원망하던 해연의 말이 짙게 남았다. 이현은 쓴웃음을 삼켰다. 그래, 난 일부러 당신에게 그러는 거야. 그래야 당신이 날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겨 주니까. 그러니 당신이 주는 모든 여지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령, 당신이 아무리 괴롭다 하더라도.
이현은 입을 맞춘 상태로 그녀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해연은 굳이 눈을 떠 남자가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해연을 침대 위로 내려놓았을 때, 계속 얽혀 있던 혀가 겨우 풀렸다. 떨어진 남자의 입술이 맥이 뛰고 있는 해연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닿았다. 해연은 남자의 상의를 양손으로 꽉 잡은 채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남자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이 길게 드러난 해연의 목을 탐했다.
“아…….”
남자의 서늘한 손이 상의 안으로 파고들어 그녀의 허리와 등을 쓸었을 때, 해연의 입에서 젖은 탄성이 토해졌다. 점점 위로 올라오는 그의 손을 따라 상의가 가슴 위로 올라왔을 때, 해연은 그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침대로 떨어트렸다. 그와 함께 상의가 얼굴과 팔을 지나 완전히 벗겨졌다. 아주 천천히, 그녀가 거절한다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처럼 조심스럽고 느린 손길이었다.
해연은 상의가 벗겨져 맨살을 드러낸 이후에야 계속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둡게 음영이 진 깊은 눈이 해연을 맹목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해연에게 미세한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후회할 거다. 분명히. 이 이상한 열기가 식는 순간 짙은 후회가 그녀를 잠식할 터였다. 그걸 알면서도 해연은 이 기묘한 열락을 끊을 수가 없었다.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순간이 제게 남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것 같았기에.
“후회하는 순간이 온다면, 날 탓하면 돼요.”
이 모든 순간에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남자가 속삭였다. 그는 마치 해연의 속마음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을 탓하면 된다고?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해연은 가냘픈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당신은? 정말 그래도 당신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
“내가 어떻든, 당신이 걱정해 줄 필요 없어요. 나는 괴물이고, 당신은 그 괴물에게 휩쓸린 피해자일 뿐이에요. 이 순간조차도.”
궤변이다. 해연은 자신의 성격을 아주 잘 알았다. 이 열기가 식은 후에 폭풍처럼 몰려올 자괴감과 후회는 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쉽사리 물리쳐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녀가 이대로 물러설까 봐 두려운 듯 굳어 있는 남자의 표정이, 눈빛이 그녀를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에 감고 제게로 내렸다. 순순히 제게 이끌려 내려온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춘 순간, 그의 손이 해연의 허리를 강하게 안았다.
* * *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단단하게 부푼 가슴 사이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양손으로 가슴을 모았다. 뾰족하게 솟은 유두가 남자의 손바닥에 눌리자 해연의 몸이 위로 퉁, 튀었다.
“아!”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신음에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아주 작은 반응조차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까만 눈동자가 아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해연은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볼을 감쌌고, 매끄러운 피부를 느끼며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렸다. 그 순간 남자의 목을 타고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미간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해연은 창백하리만큼 하얀 목 위로 새파란 힘줄이 돋아난 것을 보며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화상 자국처럼 남은 기억 속의 남자와의 관계에서 여유 없이 휘둘리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이 남자는 언제나 여유로워 보였다. 그래서 그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끔찍하고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보다도 이 남자가 더 힘들어 보였다. 여유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 열기에 압도된 것처럼 이 남자도 감당하기 힘든 열기에 괴로워 보여서, 해연은 자신의 수치가 조금은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래서 이 열기가 가시고도 조금은 덜 후회할 것 같았다. 그게 이 순간의 유일한 수확이겠지. 해연은 고소를 삼키며 남자의 이마를 다시 쓸었다. 매끈한 이마가 송골송골 맺힌 땀으로 젖어 있었다. 서늘했던 피부도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한동안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버티고 있던 남자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렸다.
“안 돼요. 이러면 내가 참을 수 없어요.”
“…….”
해연은 당신이 지금까지 언제 참았었냐고, 그렇게 대꾸하려다 말았다. 지금 상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남자가 예전처럼 굴길 원하지 않기도 했기에. 해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남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꼭 안도한 것처럼.
남자는 아주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를 만졌다. 해연이 겁먹지 않도록. 혹은 이 순간을 완전히 각인시키고 싶은 것처럼. 그의 손과 입술이 해연의 온몸을 구석구석 만지고 핥았다.
어느 곳 하나도 그의 손길에서 벗어난 곳이 없을 만큼 집요하고 탐욕적인 손길에 해연은 목을 뒤로 꺾으며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열병이 오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몸 안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불길이 남자의 손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갔다.
그래, 이건 그의 말대로 휩쓸린다는 말이 맞았다.
해연이 상체를 들썩이며 가늘고 긴 숨을 흘리자 남자는 그녀의 배에 입술을 붙였다. 허리와 등을 쓸며 내려온 손이 곧게 뻗은 허벅지를 가볍게 잡았다. 자연스럽게 해연의 다리가 벌어졌다.
그녀와 비슷한 정도로 열기가 오른 남자의 손이 해연의 음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질구는 육체의 흥분으로 촉촉하게 젖었지만, 아직 손가락 하나도 빠듯했다.
해연이 불편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자 그는 다시 손가락을 빼냈다. 살짝 몸을 긴장하고 있던 해연이 안도의 숨을 내쉬려던 찰나, 아랫배에 대고 있던 그의 입술이 손이 지나간 자리를 차지했다. 처음에는 자잘한 입맞춤을 하며 그녀의 긴장을 풀더니 곧 그의 혀가 젖은 안으로 들어왔다.
“아!”
남자는 그녀의 아래를 집요하게 핥고 빨았다. 흘러나온 애액을 모조리 먹고도 부족하다는 듯 혀를 구멍 안에 넣어 자극하며 더 흘리도록 채근했다.
“하읏! 아, 아아! 응, 앗……!”
짜릿하게 터지는 쾌감에 해연은 시트를 꽉 잡았다. 몸의 감각이 하나도 남김없이 그를 향해 열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빨리 삽입하는 게 더 낫겠다 싶을 만큼 남자는 해연을 완전히 달아오르게 했다.
해연이 다리를 덜덜 떨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의 손이 허벅지 아래로 들어와 단단히 받쳤다. 그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들썩이고 아래가 움찔거리며 조였다. 타액과 음액으로 축축한 소음이 울렸다. 탐욕스러웠지만, 부드럽고 섬세했던 손길과는 달리 그의 혀는 음탕하고 게걸스러웠다.
가장 예민한 곳이 파헤쳐지자 이미 달아오른 상태였던 열기가 가파르게 뛰어올랐다.
“아, 안, 안 돼, 아! 아아아!”
단숨에 오른 절정에 해연이 몸을 들썩이며 높은 교성을 질렀다. 당혹스러울 정도로 날카로운 쾌감에서 벗어날 곳이 없었다. 심지어 그는 도톰하게 오른 클리토리스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그녀의 쾌락을 더 길게 지속시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원치 않으면 금방이라도 물러설 것처럼 조심스러웠던 것과 달리 집요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하, 하아, 하…….”
강렬했던 절정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자 해연은 가쁜 숨을 터트리며 위로 들어 올렸던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감각이 곤두섰다.
해연의 다리 사이에서 머리를 들어 올린 남자는 엄지로 입술을 훑고 손가락에 묻은 해연의 애액을 혀로 핥았다. 그러고는 몸을 위로 올려 아직도 멍한 얼굴을 한 해연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꼭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는 것처럼.
해연이 그의 가슴을 뒤로 밀려고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흣, 집요하게…….”
그는 대답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다정한 듯 사나운 웃음은 다분히 육욕적이었다. 해연은 그제야 그가 어느 순간부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왜 말을 하지 않냐고 물으려던 찰나, 단단하게 발기한 남자의 성기가 아까보다 훨씬 풀어진 음부로 조금씩 진입했다.
“으응!”
“…….”
그는 허리를 한 번 움직이고 그녀의 안색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해연은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남자가 들어올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의 성기가 그녀의 안을 완전히 차지했을 때, 해연은 상체를 들썩이며 젖은 한숨을 흘렸다.
‘아, 말도 안 돼.’
그녀의 몸은 능숙하게 남자를 받아들였다. 남자의 몸이 너무 익숙했다. 그녀의 체온보다 서늘한 피부도, 전신을 감싼 단단한 몸도. 해연의 안이 움찔거리며 남자를 조이기 시작했다.
“아아……!”
끝까지 삽입한 채 움직이지 않는 좁아진 내벽에 갇힌 성기의 모양이, 감촉이 너무 선명히 느껴졌다. 그게 너무 버겁고……, 좋았다. 해연은 아까 남자의 애무로 몸의 긴장이 완전히 풀어져 그를 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됐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는 상체를 숙여 해연을 완전히 끌어안은 채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물 흐르듯 잔잔했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해연은 두려움 없이 익숙하게 이 쾌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